허정열수필집/4부 애인있어요.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21c-park 2024. 1. 17. 16:49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맑은 눈망울이 아젤리아 꽃봉오리에서 반짝인다.

햇살이 아젤리아 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꽃잎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초겨울인데 어쩌자고 꽃대를 밀어 올렸느냐고 나무라는 듯 바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봄소식이 왁자하게 깔리면 어김없이 아젤리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 봉긋 거리던 몽우리가

자줏빛 입술을 열어, 가지마다 주먹만 한 겹꽃이 다투어 핀다.

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넉넉해진다.

일 년 치 토정비결에 좋은 소식만 받아들고 온 것 같은 설렘이 있다.

피고 지고 머무는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짧게 느껴져 아쉬움

을 더한다.

우리 집에 온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나무는 단독주택에 살 때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우아하게 봄소식을 전해주던 전령사였다. 아파트로 오면서 한쪽 날개를 접고 화분에 옮겨 앉았다. 좁은 베란다 모서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도 늠름한 기개는 변함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간이 넓은 쪽으로 기우는 가지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해가 갈수록 꽃 피는 송이가 잦아들더니 이파리도 진초록을 찾지 못하고 스러지기도 하고 우수수 낙엽을 쏟아낸다.

그럴 때마다 거름을 주고 관심을 가지면 다음 해 달라진 모습으로 봄을 매단다.

함께 어울려 피지 못한 가지가 늦가을이나 첫눈이 다녀간 뒤 몇 송이 꽃을 밀어 올려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거뭇거뭇한 가지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지만끝까지 제 몫의 책임을 다하는 나무의 꿋꿋함이다.

올해도 눈발 날리는 날 어김없이 몇 송이가 고고하게 피었다. 나무는 쉼 없이 뿌리에서 가지 쪽으로 물을 퍼 올리고 있을 것이다.

한 뿌리에 벼리처럼 묶여 있는 곁가지도 늦게 핀 꽃송이에 애틋함이 가는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것도 있는 법.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위를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모습은 마치 왕따에 시달린 학생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모습과 흡사하다.

올해가 가기 전 꼭 피워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져 애처롭다. 꽃이 질 때까지 얼지 않도록 창가에서 멀리 화분을 옮겨 주었다.

작년 이맘때 구미에서 아빠와 함께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초등학교 6학년인 태양이가 떠오른다.

아들은 아빠를 이해하고 아빠는 아들의 속마음을 처음 들여다보는 계기 가 되었다고 했다.

신체 접촉을 통해 가슴과 가슴을 맞대 보고 눈물을 닦아주던 부자父子의 모습이 생생하다.

몇 번인가 가출을 시도했던 태양이는 다시는 엄마 아빠를 떠나 달아나지 않겠다고 했다.

하루를 함께 공유했던 그날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는지 부자父子는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주고받았다.

언제 썼는지 돌아오는 내 손에 감사 편지를 쥐여 주던 꼬막손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뒤 몇 번의 전화와 문자로 달라진 아이의 마음이 달려와 안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그 아이 맑은 눈망울이 아젤리아 꽃봉오리에서 반짝인다. 계절을 놓치고도 제 소임을 다하겠다는 한 송이 꽃에 끊임없이 힘을 보됐을 보이지 않는 뿌리의 아버지 같은 사랑. 방황하는 태양이에게 꿈을 되찾아주기 위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며 관심과 사랑을 주었을 태양이 아빠가 보인다.

꿈이 있는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보다 성공 확률이 높다고 한다. 끈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 이룰 수 있는 확률 또한 높다.

상담하면서 만나는 요즘 학생들은 꿈이 없다.

무엇을 할 것인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구체적 인 꿈이

없다. 친구의 꿈을 따라가거나 즉석에서 생각해내는 방식이다. 답답한 현실이다.

부모의 꿈을 아이들의 꿈으로 착각하고 그냥 좇아가는 목표가 없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왕따의 대상이 되거나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자기에게 힘을 실어주는 친구 따라 가출이나 폭력에 가담하게 된다.

꿈에서 더욱 멀어지기까지 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누군가 그들을 위해 귀 열어주고 등 토닥여주는 마음이 함께했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외로운 눈빛을 살피고 그들 말에 고개 끄덕 여주는 작은 관심을 기다리는 청소년들의 가슴은 뜨겁다. 우선 눈높이를 낮추고 그 자체를 인정 해주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서 작은 꽃망울을 밀어 올리지 않을까.

꿈꾸지 않는 자는 절대 절망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말 못 하는 식물은 온몸으로 소통을 한다. 비록 소리 내어 말

하지 못하지만 자주 그들과 눈을 맞추고 곁에 두다 보면 나무도 나의 속마음을 읽고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물이 부족하면 어깨를 늘어뜨려 축 처져 있고영양과 햇빛

이 필요하면 누렇게 탈색한 얼굴로 끙끙 앓는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고 물을 흠뻑 주고 나면 싱싱한 이파리를 흔들며 화답해준다.

봄은 한 해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일 년 치 계획을 품는 계절이다. 꽃을 잘 피워야 튼실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유실수처럼봄을 지나는 청소년들에게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의 끈이 필요하다. 그 끈으로 조금 늦더라도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