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park 2023. 12. 18. 01:48

*꿈꾸는 아지트


머리가 복잡할 때 구석방에 오래 머문다. 넋 놓고 멍하 
니 지친 몸을 놓으면 품속에 꼬옥 안긴 듯 편안하다. 몇 날 
며칠 게으름을 부려도 잔소리 없이 지켜봐 주는 곳.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나만의 색깔이 필요할 때 구석 
방의 힘을 빌린다. 가끔 그곳에 널브러진 자신과 마주할 때 
가 있다. 구석구석 물건으로 가득차 있지만 아늑하고 편안 
한 모습으로 그윽하게 눈을 맞춰 준다. 많은 말을 쏟아내도 
무릎을 낮추고 온몸으로 경청해 준다. 삶에 지쳐 돌아누우 
면 새로운 온기를 채워주고,혼돈으로 방황하고 고독이나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의지를 안겨준다.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을 발효시키기 좋은 온도를 가지 
고 있다. 복잡한 생각이 종횡무진 질주해도 행간이 짧아 정 
리하기 좋은 곳이다. 묵언 수행자처럼 은근한 기다림으로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줄준비가 되어 있다. 후회나 반성이 
넘쳐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 막아주는 힘이 있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적소가 있을까. 과거에 
묶여 있던 나를 해체해 현재로 이끈다. 흔들리는 눈빛과 심 
장을 안정시켜주고 단단하게 여민 가슴도 무장해제 된다.
여유로 넓혀진 공간은 미래까지 꿈꾸게 한다. 이곳에선 어 
린아이처럼 엉뚱한 상상을 즐겨도 좋다. 꿈꾸는 방에서는 
새로운 도전에 겁먹지 않는다. 기억을 풀무질하고 참담함 
을 보고도 한숨짓지 않으며 현실과 미래 사이를 저울질하 
지 않는다. 비바람이 날을 세워도 끄덕하지 않는다.
결별한 시간이 모여 있지만 너른 세상에서 갖지 못한 다 
른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막막한 대상을 향해 새로운 호기 
심으로 이끌어준다. 구석방은 거절을 몰라 계절이 바뀌어 
도 늘 한결같다. 제빛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림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계급이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막살 
다간 사람의 뒤를 캐지 않는다. 무수한 계절 앞에서도 중심 
을 잃지 않는 원동력은 초심이라고 속삭여 준다.
모시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을 좋아해 낮은 자세로 대한 
다. 각이 선 날카로움보다 부드럽고 유연함이 있어 권위나 
체면을 구길 염려가 없다. 언제나 같은 몸짓으로 화려함을 
갈구하지 않는다. 늘 한결같이 겸손하고 부드럽다. 잘남보 
다 부족함을 더 반기는 수더분함은 무모한 도전도 꿈꾸게 
한다.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전과 편안함으 
로 예를 갖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지루해도 먼저 하품 
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석방은 작지만 초라한 이름에도 
의연하고 품이 넓다.
커피 한 잔의 향에도 쉽게 취해 화를 삭이는 데 안성맞 
춤이다. 사방에 책이 있어 헐렁한 생각의 백대를 단단하게 
조이기도 하고 허기진 가슴을 채우기에 좋다. 그래서 그 
곳에선 친밀감이 형성되고 나만의 진솔한 화법이 통한다.
지금은 이곳의 단골이다. 뒤틀린 내 삶의 구조 변경도 
언제든 가능하다. 서 릿발 같은 감정의 경계를 허물고 나올 
때는 이미 봄이 닿아 있다. 낭비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서 벗벗한 어깨가풀리고 봄바람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낯 
선 풍경을 말없이 품고도 늙을 줄 모르는 아지트. 추억의 
창고이며 내 삶의 온도를 조절하는 곳이다.


변덕이 심해도 너그러이 바라봐 주는 곳. 허기진 마음 
이 기대어 살아가는 이 방은 구조 변경 주문으로 늘 분주 
하다. 생각을 쉬게 하고 헝클어진 삶을 가지런하게 다듬을 
수 있는 곳에는 나만의 비밀이 빼곡하다. 생의 무게에 눌 
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아지트. 출입이 자유로워 언제 
든지 찾아가 머물 수 있는 곳에는 꿈을 꾸는 나만의 수다 
가 아직도 두런거 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