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실/김용임 플래시

남원산성-김용임

21c-park 2008. 1. 24. 21:03

 

                   

남원산성-둥가타령

 

김  용 임

              <1>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

              석양은 늘어져 꾀꼬리 울고

              능수버들가지 휘늘어진데 꾀꼬리는 짝을지어

              이산으로 가면 꾀꼬리 수리루...

              음 ...  어허야 ... 에헤야 뒤여

              둥가 어허 둥가  둥가 내 사랑이로다

              <2>

              남원산성 올라가 부유한수 바라보니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 

              산천은 푸르고 산새는 우니

               

              이만 꽃들이 보기가 좋데 뻐꾸기는 짝을 지어

              이산으로 가면 뻐꾸기 수리루...

              음 ...  어허야 ... 에헤야 뒤여

              둥가 어허 둥가 둥가 내 사랑이로다

 

 

남원산성-김소희

 

 

 

호 만정(). 본명 순옥().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당대 여류명창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흥보가》 등을 전수받고, 다시 정정렬()에게 《춘향가》《수궁가》를 배웠다. 이후 22세 때에는 박동실()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우고 그 밖의 명창·연주자들에게 가곡·거문고·가야금 등을 차례로 익혔다.

미모와 맑은 음색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정렬·임방울·이화중선 등과 전편 취입한 《춘향전》에서는 춘향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하였고,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였다. 1970~1993년 국악예고 재단이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진이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 석양은 늘어져 갈매기 울고
능수버들가지 휘늘어질 때
꾀꼬리는 짝을 지어 이 산으로 가면 꾀꼬리 수리루
음음 어허야 어허야 뒤여허 허둥가
허허 두웅가 둥가 내사랑 이로구나
(받는소리)
에헤야 뒤여허 둥가 허허 둥가 둥가 내 사랑이로구나

 

 

2 옥양목 석자 없다고 집안에 야단이 났는데
새 보선 지어 신고 속없이 뭐 하러 또 내 집에 왔냐
음음 어허야 어허야 뒤여허 허둥가
허허 두웅가 둥가 내사랑 이로구나

 

 

  

3 앞집에 큰애기 시집을 갔는데
속없는 노총각 생병났다드라
음음 허야 어허야 뒤여허 허둥가
허허 두웅가 둥가 내사랑 이로구나

 

 

 

 

4 니가 나를 볼라면(니가 나를 볼라면) 심양강 건너가
이친구 저친구 다정한 내친구
설마 설마 설마 섯설마 제일천하 좋네
니가 내 사랑이지(내 친구지)
음음 어허야 어허야 뒤여허 허둥가
허허 두웅가 둥가 내사랑 이로구나

 

 

 ▣  남원산성은 남원시 산곡동 16-1에 위치한 교룡산성((蛟龍山城)을 일컫는데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남원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해발 518m인 교룡산(蛟龍山)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현재 동문의 홍예(虹예)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민요 남원산성은 둥가타령의 별칭으로 둥가의 곡명은 후렴의 "어허야 둥가..둥가 내사랑이로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민요 남원산성을 남한산성으로 잘 못 아는 사람들이 있고 노래의 깊은 의미를 달리 해석 하는

경향이 있다. 하여 필자는 남원시청 문화관광 과장(김종록 님)의 자문을 받아 위 민요에 나오는 단어에 대한 해석을 정리하고 또 노래의 숨은 의미에 대하여 세상에서 달리 해석하는 바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위의 김소희님이 부른 가사는 남원시청 자료와 일치함을 밝힌다.

 

 ▣ 민요에 대한 두 가지 해석

   

 1)구한말 이후 애국지사들이 조선 망국의 한과 호국의 의지를 부르던 노래라는 견해가 있다.

    사냥매를 독립투사로 보고 종달새 등을 민중들로 본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일리가 있어보인다.

 

   2) 남원산성은 새타령으로 보며 노래에 등장하는 새들을 여성의 자태로 묘사하여 노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여성을 정적인 꽃으로 보지 않고, 동적인 새로 묘사한 것이 이채롭다.  

 

  ▣ 민요에 등장하는 주요단어 해석

 

 주요단어

일반적 해석

호국의지적 해석

 남원산성

*남원시의 북서쪽에 있는 교룡산성, 남원에 있는 산성

* 일제가 지배하지 못한 남은   산성이라는 뜻도 있음

 이화문전

*이화는 이원(梨園), 문전은 교방(敎坊)

  남원시 관계관에 의하면 "옛날 남원산성에 내려다보

 면  배밭이 펼쳐저 있어서 이화문전이라고 했다는 전

 언이  있다"고 함. 한편 교방은 아악과 속악을 관장하던 장악   원 의 좌방, 우방의 총칭이라고 함

*이화문전(李化門前) 즉,

 이씨 왕조의 궁궐문으로 봄. 즉 조선왕조를 일컬음.

 

 

 수진이

*사냥에 쓰려고 길들인 매나 새매(남원시 관계관)

  함경도 앞바다의 거친 파도를 타고 자란매(사냥매)

*한국의 전통사냥매로 의병을  상징

 날진이

*길들이지 않은 야생매(남원시 관계관)

 험준한 태백산 줄기에서 자란 매

*한국의 전통사냥매로 의병을  상징

 해동청

*송골매(남원시 관계관)

  평안도에서 난 매

*한국의 전통사냥매로 의병을  상징

 보라매

 *난지 한 해가 채 못된 새끼를 잡아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남원시 관계관)

  평안도에서 난 매

*한국의 전통사냥매로 의병을  상징

 종달새

 

*백성, 민중

 ⑧수리루

* 입타령의 일종

 

 ⑨어허야

 

*조상신이나 호국신

 ⑩둥가

*귀여운 아기를 어르거나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입타령(남원시 관계관)

*둥가는 등가(登歌)로 궁중의  종묘악 또는

 왕조시대 애국가

 ⑪부유한수

*남원을 지나 흐르는 부유한 요천강을 뜻함

 (남원시 관계관)

 후유 한숨, 후휴 한숨 등 여러 표현이 있으나 뜻이    모호하다.

 

* 한수(漢水) 즉 한강으로

  보는 견해

 

 

 

 ⑫옥양목

*무명보다 더 새하얀 천(피륙의 일종)

 

 ⑬심양강

*양자강(중국 강서성 구강시 부근을 흐름)

 

 

이상 주요단어를 해석해 봤는데 "수진이"를 백성들 탈취에 숙달 된 관리로 보고, 해동청 보라매를 갓들어간 관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소희

“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

예술에서나 일상에서나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단아하고 향기있는 삶과 예술로 귀감이 됐던 만정 김소희.

한평생 소리꾼으로서의 외길을 걸어 무소불통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던 만정 김소희선생이 우리곁을 떠난지 올해로 4년째가 됐다.

판소리의 대가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인 만정은 지병인 간암으로 서울 소격동 자택에서 다소 쓸쓸하게 보내다가 95년 78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달밤의 기러기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쪽진 머리에 옥비녀와 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로 관객을 울리고 웃긴 고인의 판소리는 구성진 가락과 풍부한 방울목으로 유명했다.

‘고려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조선조 백자의 희다겨운 옥빛이 어려있고 가을밤 기러기 소리며 청전의 학울음 소리와 낙목한천의 찬바람 소리를 느끼게 했던 목소리. 평평한 목소리로 나가다 한량없이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아 올려가지고 거기에서 애절비절하게 쥐어짜다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들이는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던 명창’(중앙일보 95년4월19일 분수대)이라는 평을 듣는 그는 애기명창으로 어릴 때부터 일찌기 이름을 날렸다.

하늘이 내린 목을 타고 났다. ‘천구성’인 것이다.

만정선생은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 여러 명창의 소리가 들어있다 한다.춘향가에는 송만갑명창의 소리가 있고, 정정렬명창과 김소희명창 자신의 소리가 들어있다. 만정은 동·서편의 소리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들어보아도 가성이나 꾀목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소리를 냈다. 군산대 최동현교수는 19세기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전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만정을 꼽으면서, 윤곽은 크고 바르게 그리면서도 세부는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게 엮어가는 것이 그의 소리였다고 평한다.
이매방에게 배운 살풀이며, 정남희에게 배운 가야금이며, 김월하에게 배운 가곡이며 여러 부문에 걸쳐 두루 일가를 이룬 그는 거문고 양금 서화에도 한자락 경지에 올랐다.

1917년 고창에서 본명을 순옥으로 하고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난 그는 가세가 기울면서 9살때 부모의 곁을 떠나 광주 언니집 신세를 졌다. 광주여고보 시절인 13세때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울리고 웃기는 가락이며 가사, 부채를 꼬나쥔채 관객을 온통 탄성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발림, 오금을 못쓰고 빨려들게 하는 아니리 등에 완전히 도취되고 말았다”고 만정은 전북일보 김현기기자와의 인터뷰(1972년8월20일자, ‘나의 편력’기사 중에서)에서 그 때의 감회를 밝혔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자나 무대 생각뿐이어서 열병에 걸린 것처럼 공연이 계속되는 10여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설극장의 포장문을 들추고 맨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소리공부를 위해 처음 찾은 이는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그는 첫 대면에서 들어본 그녀의 소리 흉내에 “어쩔 수 없구나. 네가 타고 났다.”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소리 한평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정렬에게서 춘향가, 전남 화순의 박동실에게서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17살까지 오직 배우기만 열중해온 그는 당시 북과 고전무용의 권위자로 명성을 떨치던 한성준선생의 사설무용연구소에서 창을 배웠다.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 한성준씨를 전속반주자(북과 장고)로 라디오 생방송을 하면서 만정의 진가는 더욱 발했다.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춘향가를 취입한 것도 이 때.

21세에 결혼한 그는 10년만에 부군을 여의고 3남매(2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 사망)를 혼자 키운다. 제자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후배 소리꾼들에게는 예술가는 품위가 있어야지, 천박하게 놀아서는 안된다며 몸소 예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시대의 명창 만정은 안향련 김동애씨(작고)를 비롯해 성창순 신영희 남해성 박량덕 이명희씨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만정의 소리법통을 이어받은 명창 안숙선씨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95년4월24일) “만정선생은 늘 우리 곁에서 거대한 산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감싸주셨는데, 이젠 잘못을 저질러도 따끔하게 꼬집어 주실 분이 없어요. 그분 소리는 격렬하면서도 처지지 않는, 절제된 소리의 정수였다.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과장이 없는 소리 그 자체였다. 스승은 비록 가시고 안계시지만 그분의 소리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려 한다.”고 밝혔다.

친딸 박윤초씨(55세, 국악인, 김소희선생기념사업회 대표)는 96년 1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공연에서 고인의 장기였던 판소리 춘향가 중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며 부르는 「갈까부다」를 열창, 고인의 예술혼이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95년 범국악인장으로 치러진 만정 영결식장에서 만정과 각별한 사이인 소고당 고단(78)이 76년 만정의 육순을 맞아 지은 시에 고인이 직접 곡을 붙인 ‘만정가’가 뱃노래 가락에 실려 불리어져 구슬픈 마음을 더했는데 고단은 그 뒤 만정의 방일영문화재단 국악대상 수상 축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가사로 답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이지적인 용모에/ 차돌같은 가슴속에 영롱한 별빛이/ 애수를 호소하듯 비취비녀 다홍댕기/ 옥색갑사 치마저고리 자주고름 늘어뜨려/ 합죽선 손에들고 「범피중류」 「옥중가」를/ 열창할때 기막힌 그감동 그여운은/ 몽환인듯 생시인듯 깨닫지 못할지다”라고.

만정은 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공연으로 기립박수를 받는 등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90년부터 시작된 병마를 무릅쓰고 국악부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던 그는 병색이 완연했던 93년 76세의 고령에도 대한민국국악제를 진두 지휘했고 영화 ‘서편제’에 구음으로 출연, 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심청가의 한 대목에 구음을 붙여 개작한 소리 ‘떠나가는 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73년 국민훈장 동백장, 82년 제 1회 한국국악대상, 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91년 동리대상, 94년 제 1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 95년 작고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으며 음반으로는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 앨범 등이 있다.

만정은 본인이 생전에 터를 잡아놓은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살 수만 있다면 팔순 기념무대에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보이고 싶다던 그녀, 말년에 낙향해서 조그만 예술전수관을 지어놓고 제자들이나 키우고 싶다던 그녀가 팔순을 한해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 김소희국창 생가복원

고창이 낳은 우리나라 국악계의 대모인 고 김소희국창의 생가복원사업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으로 있어 또 하나의 관광명소가 탄생할 전망이다.

고창군은 올해 4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흥덕면 사포리 345번지 김소희국창의 생가터 3백평을 매입한데 이어 내년에 4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생가를 복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군은 지붕이 스레트로 되어있는 이 집을 헐고 30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생가를 복원한다는 계획이나 아직까지 김소희국창이 생전에 살았던 집형태에 대한 정확한 고증자료를 입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생가복원에 신중함을 기울여야 할것으로 보인다.

사업기한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정확한 고증없이 생가를 복원할 경우 고인에 대한 송구함은 물론 평소 김소희국창을 흠모해온 제자등 국악인과 관광객들에게 원망과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는만큼 사진등 자료발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창군도 이같은 점을 감안, 정확한 고증자료가 발굴될 때까지 우선 옛 집을 헐고 부지를 정비한후 여기에 안내표지판만을 세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이곳을 �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도모하고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가만 복원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 조경시설과 함께 화장실,음수대등을 설치하고 현지에서 김소희국창의 살아생전 판소리를 생생하게 들을수 있도록 음향시설도 함께 갖춰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김소희국창의 생가가 완전 복원돼 일반에 공개될 경우 우리나라 판소리 다섯마당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선생의 생가, 조만간 착공예정인 판소리박물관,기존의 동리국악당과 함께 고창의 4대 판소리관광지로서 명성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경   력
▲송만갑 정정렬 박동실 등에게 소리 배움
▲1934년 콜럼비아레코드사와 전속계약 맺고 ‘춘향가’ 취입
▲1935년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한성준 김연수 정남희 등과 함께 조선 성악연구회 설립
▲1954년 민속악의 본산 국악예고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초대원장·이사장, 국립 구극단 부단장 역임
▲1959년 5선보에 의한 독창회 원각사에서 개최, 김동진 작곡 춘향가를 여공주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공연
▲196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지정
▲1971년 창악전수소 설립, 후학 양성
▲19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 독창회 개최
▲1993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