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세종, 원효, 이황,정약용,비빔밥,인삼,김치

21c-park 2006. 9. 22. 09:57



세종, 오백년 문화의 터전을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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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편하게 한글 만들고… 유교정치의 기틀 세우고…
새 국가건설의 활력과 세종의 출중한 자질이 어울려
민족문화의 터전이 된 지성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말은 사람과 사람끼리 뜻을 통하는 것이고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말과 글의 소중함은 그것 없이 지내지 않고서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일제 말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만큼 절실하게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새 조선왕조가 제대로 자리잡기까지는 반세기가 필요했다. 태종이 강화시킨 왕권의 터전 위에서 세종(1418~1450 재위)은 든든한 반석을 깔았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백성들을 위한 시책을 강구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책을 펴냈고, 갑인자 등의 활자 제조를 직접 지휘했다. 이런 빼어난 자질과 관심의 결정체가 세종 25년(1443) 만든 한글이다.

자기네 글을 언제 어떻게 만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을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런데 세종은 창제 3년 뒤 펴낸 〈훈민정음〉에 이런 내용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백성들이 쉽게 익혀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창제 의도가 너무도 분명하다.

또한 세종대에는 의례와 제도를 닦아 유교정치의 기틀을 세웠다. 유교 전적에서 역사 음운 지리 천문 의학 농서에 이르는 방대한 편찬 사업도 이뤘다.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농업, 의약기술, 음악, 법제가 정리되었으며 국토를 넓히고 세제를 개편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세종의 관심은 세세한 분야까지 미쳤다. 관청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산전 30일 산후 100일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편에게도 30일간 휴가를 장려했다. 지금부터 5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추진한 주체였다. 왕조 사회에서 모든 공적은 국왕에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은 후대 정조처럼 스스로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학자였다. 유교정치에 대한 높은 소양이 있었고 역사·문화적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을 바탕으로 창조적 역량을 한데모아 추진한 힘과 신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에 남는 일은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지 않는다. 능력이 출중해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여건이 갖춰져도 빼어난 역량이 없으면 엮지 못한다. 새 국가 건설의 활력과 세종의 출중한 자질이 어울려 문화 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세종만의 업적이 아닌 국가 구성원 모두의 역량이 한데 모여 이룬 일이었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이끈다. 젊은 집현전 학자에게 보였던 뜨거운 배려와 어려운 이들에게 미쳤던 자상한 염려, 이런 사람됨이 사회적 여건과 조화를 이루어 민족 문화의 터전이 된 지성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 ·한국사학

 



원효
사상과 행동의 자유인

 



원효(617~686)는 우리 불교사에서 첫손 꼽는 사상가지만 요석공주와 시장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무애행(세상의 어떤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따라붙는다. 승려에게 웬 공주일까. 그의 무대가 삼국간 항쟁이 치열하던 7세기 한반도였기에 생긴 일이다.

이때 불교가 들어온 지 삼백년이 되어 인도, 중국 불교가 아닌 신라 나름의 사상 정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불교의 이치는 하나로 통한다는 일심을 보았다. 일심은 만물의 근원이다. 무명과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중생은 일심의 근원을 회복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승과 속은 나뉘지 않고 초월하여 하나 되는 것이다.

자신도 얽매인 골품제의 신분 제한을 통찰한 원효가 지향한 것은 승과 속이 둘이 아닌 재가불교였다. 계율도 동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 원효는 거리로 나섰다. 경전 못 읽는 보통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무애행을 실천했다. 대중들과 함께한 원효의 삶은 당대 사상적 과제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풀어낸 한 지침이었다. 무애행은 원효가 사상과 행동의 자유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황
참지성인의 본보기

 



성리학은 고려 말 이래 조선 초를 거쳐 사림들의 피 흘리는 노력 끝에 국가 사회의 이념적 중심으로 부상했다. 선비가 조정에 나아가 이념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정도였다.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 또한 서른넷에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림들의 원칙주의는 여전히 기존 권신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을사사화의 싹이 보이자 퇴계는 벼슬을 내던졌다. 그의 진면목은 50대 이후 인생 후반을 오로지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전념한 데서 살아난다. 성리학 체계를 독자적으로 재편했던 원동력이다.

성리학의 주축은 이기론이다. 작용하는 기와 작용 원리로서의 이를 통해 세상의 현상을 설명한다. 둘의 상호작용에 대해 퇴계는 이와 기는 섞이지 않고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을 내세웠다.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반면 율곡은 상대적인 기의 운동성을 강조하여 이기이원적일원론을 주장했다.


퇴계가 조선 성리학의 완벽한 기초를 닦고 율곡은 조선 성리학을 구축해냈다. 상호 인정하는 열린 관계 속에서 진리는 빛을 발한다. 퇴계는 자신의 이론적 완성 또한 기대승과의 열린 논의를 통해 이루었던 참지성인의 본보기였다. 퇴계의 학설은 조선 후기 막대한 정치·사회적 파급력이 있었으며 일본 근세 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다

 



다산 정약용(1746~1834)은 전통 농경사회가 흔들리던 시대를 살았다. 농업사회의 합리적 질서인 성리학 대신 새 국가 이념을 찾아야 했다. 다산은 농업 중심 개혁론을 폈던 성호학파의 학문 풍토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성향이 다름에도,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북학파 사상도 적극 수용하였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 치세에 백성들의 복지 사업에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수원성을 쌓는 데 거중기를 써서 성과를 올렸다. 그는 또한 농촌경제 개혁안을 내놓아 농민이 땅을 공유하고 경작하여 균등 분배하고 선비는 정치를 맡아 인정과 덕치를 통한 민본주의 왕도 정치를 책임지는 역할 분담론을 역설했다. 18년간의 고통스런 유배시기에는 경학, 정치사상, 농업 군기 제조 의료 등 다방면의 당대 지식을 책 500여권으로 집대성하며 방대한 지식사상 체계를 집중적으로 이뤄냈다.

다산은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유배 때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대한 편견도 버렸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노론 지식인에게서도 새 서적을 빌려 보고 같이 토론했다. 열린 마음으로 큰 이룸을 향해 나아간 지성이 큰 결과를 이뤄낸다는 사실을 실증한 이가 다산이다.

정병삼

 


민족문화상징 100



전주비빔밥, ‘완전’을 향한 정성의 맛·멋

완벽’을 꿈꾸는 전주 비빔밥에서도 ‘대충’ 용납못해
색상까지 고려한 조리법 투철한 장인의식마저 느껴져


 



전북의 고도 전주는 ‘완전’을 꿈꾸어왔다. 옛 이름 ‘완산주’의 첫 글자와 현 이름의 첫 글자 모두가 온전함 혹은 완벽함을 뜻하며 그것을 모으면 ‘완전’이 된다. 애초에 도시를 만들어 나가면서 사방에 신령스러운 네 동물, 기린과 봉황, 용, 그리고 거북을 배치한 것에서도 이 꿈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선사시대만의 얘기가 아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 도시의 동서남북에는 이를 굳게 지켜줄 절(固寺)이 자리를 하게 되며, 근래에 이르러 기독교가 자리를 잡으면서는 또다시 수호의 동, 서, 남, 북문 교회가 세워진다. 재난을 막아 ‘완전의 땅’으로 만들려는 기획으로 볼 수밖에 없는 예들이다.


지금도 전주에서는 ‘완전’을 꿈꾼다. 판소리나 산조가 예술적 완벽성을 꾀하는 것도 전주에서의 일이다. 온전한 몸을 위하여 한방이 성하고 한지공예가 공예 이상을 꿈꾸며 비상하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전통문화를 가지고 고민을 하는 것도, 생태와 환경 그리고 삶의 질까지를 함께 아우르는 대안적 삶, 공동체를 상실하면서 잃어버린 온전한 삶의 형태를 되살리려는 노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식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 전형적인 예가 전주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일종의 간편식이다. 궁중에서도 비빔밥은 점심, 혹은 종친들이 입궐했을 때 수라 대신으로 이용했던 가벼운 식사였다. 농번기 농경문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에서도 이러한 특색은 확인되며, 군사문화나 사찰문화, 의례문화 등과 연계된 태생설도 이러한 조리의 편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전주비빔밥의 특징은 이러한 탄생 배경과 멀리 떨어져 있다. ‘완전’을 꿈꾸는 전주에서는 비빔밥에서도 ‘대충’을 용납하지 못한다. 적어도 조리과정에서는 그렇다. 1968년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조사한 전주비빔밥 조리법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물이 아닌 사골국물에 밥을 짓는 것이나 밥이 한 물 넘으면 콩나물을 넣고 뜸을 들인 뒤 따뜻할 때 참기름으로 무친다는 대목에서도 조리의 간편성과는 거리가 먼 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숙주나 미나리, 고사리 등도 나름의 특성을 살려 각기 따로 조리하며 색상까지 고려하여 노란 청포묵과 오방색의 화려한 고명을 고집하는 데서는 투철한 장인의식마저 느끼게 된다.

핵심은 정성이다. 철분이 풍부한 전주콩나물만 고집하는 등 조리 재료의 선택에서도 ‘완전’을 향한 정성은 확인된다. 최근 들어 색깔별로 나물을 배치한 뒤 중앙에 빨간 고추장을 떠놓고 그 위를 달걀 노른자로 장식하는 모습은 화룡점정의 숙연함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전주비빔밥에는 ‘원래’가 없다. 어제가 오늘과 다르고 내일은 또 더 나은 재료, 더 나은 혼융을 통해 더 나은 맛과 멋을 추구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과 다르게 위생과 보온효과를 위해 놋그릇을 고집하게 된 데서도 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증거는 확인된다.

요즘 비행기 기내식으로 각광을 받는 것이나, 1000인분, 2002인분 비비기 등 행사용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서도 전주비빔밥의 밝은 미래는 엿볼 수 있다. 특히 최근 중국에서 열린 세계미식대회에서 비중국요리부문 최고상을 전주비빔밥이 거머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완전’을 향한 정성의 비빔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여 정성이 생략된 산업화나 섣부른 세계화는 피해가야 할 것이다.

이종민 전북대 교수



삼계탕·떡·불고기… 순자연적 지혜로 빚은 융합의 백미

 

 

 

 

 



“현대는 융합의 시대다.” 융합의 요체는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요 미지의 ‘푸른 바다’(블루오션)를 열어가는 것이다.

융합의 백미는 우리 ‘국물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국물문화족’이다.


그런데 이 융합에도 철학과 원칙은 필요하다. 얼치기 퓨전음악과 같은 뒤범벅을 피하기 위해서다. 서로 해치지 않고 상생의 조화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을 섞어야 ‘푸른 바다’로도 나갈 수 있다.

이런 거듭남의 탁월한 예가 삼계탕이다. 따뜻한 성질의 닭에 인삼·대추·녹각·마늘·찹쌀 등을 넣고 푹 고아 우러난(거듭난) 국물에 이 보양식의 묘미가 있다. 이 국물에 더위로 허해진 몸을 보할 수 있는 단백질을 비롯한 영양소가 함께 녹아 있다. 몸에 좋다고 아무 약재나 넣어서는 맛도 텁텁해질 뿐 아니라 허증 해소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몸은 여름철이 되면 피부 쪽 혈관이 확장되어 혈류량이 늘어나면서 체온을 조절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위나 장 등 몸속 장기들은 상대적으로 차가워진다. 이때 더위를 식힌다고 찬 음식을 먹게 되면 배탈 설사를 동반할 수 있다. 더위를 오히려 더운 음식으로 다스리는 순응 아니면 역설의 지혜! 삼계탕에서 취해야 할 게 보양의 영양만이 아닌 것이다.

떡 또한 융합으로 빚어낸 우리 민족 최고의 별식이다. 육식을 멀리하고 차를 즐기는 음다 풍속의 유행과 연관된 떡 문화는 쌀에 조·수수·콩·보리 등 여러 잡곡류를 섞어, 분명 쌀을 아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눈여겨볼 것은 여러 조합을 통하여 매우 다양한 종류의 떡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융합 혹은 퓨전을 통해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일을 우리의 떡이 일찍이 선보인 것이다.

또 하나, “남의 떡에 설 쇤다”든가 “얻은 떡이 두레 반이다” 등의 속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떡에 서려 있는 정을 나누는 풍속도 주목할 일이다. ‘밥 위의 떡’으로 누구나 반기는 별식이지만 자기(식구)만을 위해 떡을 하는 일은 없다. 햄버거나 피자 문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불고기는 삼계탕, 김치, 비빔밥 등과 더불어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표적 한국음식이다. 이 또한 고기를 얇게 저며 간장·파·깨소금·후추·설탕 등 다양한 채소와 양념에 재웠다가 구워낸 것으로 융합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 요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육식을 즐기는 외국인들이, 갑자기 그것에 눈을 뜬 민족이 자연의 섭리를 살피며 빚어낸 색다른 ‘퓨전음식’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도 채소를 곁들여 먹게 함으로써 육식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순자연적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불고기 또한, 비록 그 탄생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우리 민족 특유의, 디엔에이와 같이 변함없는 기질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준 것이다.

이종민



신이 한민족에 내린 ‘영험’ 세계로 뿌리뻗자



인삼은 신의 점지를 거쳐야 주어지며
착한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신이 내린 신초’
그 상징성의 깊이만큼이나
고급브랜드화,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인삼

1764년 일본인 사카우에 노보루는 조선 인삼을 경작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삼경작기〉란 책자가 그것인데, 종자채취·토양선정·해충 예방법·뿌리의 형상과 구별 등을 도해를 곁들여 서술했다. 조선 인삼을 만주 인삼과 비교해 그림으로 설명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우리 인삼 재배기술을 빼낸 셈인데, 지금으로 치면 저작권을 슬쩍한 국제적 문화벤처라고나 할까. 에도 바쿠후는 조선 인삼 수입의 대가로 지불하는 은의 유출을 줄이기 위해 재배기술을 들여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밀정도 보낼 정도였으니 조선 인삼이 동아시아 국제거래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음을 말해준다.

인삼은 멀리 오키나와까지 수출됐다. 중국 부자들은 조선 인삼이라면 거침없이 큰돈을 썼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은 백두산에 인삼을 재배하면서 ‘장백산인삼’이란 이름으로 브랜드화를 꾀하고, 일찍이 중국 의학 기록에 1700여년 전부터 등장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인삼집결지 홍콩시장에서 중국 삼은 우리 삼에 비해 10분의 1 가격이다. 인삼 종주국 한국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 인삼도 쏟아지고, 한국 인삼보다 오히려 좋다는 흑색선전까지 난무하고 있다. 중국 쪽 물량공세도 무섭다. 이땅의 재배 면적으로는 이런 물량공세를 당해낼 수 없다. 문제는 질이며 고급브랜드화다. 최고 인삼이라도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없으니 우리가 인삼의 세계화에 정말 온몸을 던졌는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인삼이 흔해졌다. 백화점 매대나 시장 좌판에도 넘쳐 흐른다. 오늘날처럼 인삼을 많이 마주치던 시절도 없었다. 요사이는 기르는 인삼과 캐는 산삼을 구분하지만 옛날엔 산삼이 곧 인삼이었다. 재배 인삼이 쏟아져 대중화한 반면, 인삼의 신성성은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삼은 신이 내린 신초(神草)다. 좀처럼 눈에 띄질 않는다.


그래서 심메마니(심마니)는 산삼 캐기를 신성공간에 몰입하는 수도승같이 수행한다. 부모의 중병을 고치려고 눈 덮인 산골을 헤매는데 산신령이 산삼 한뿌리를 주어 병을 고쳤다는 식의 효 사상과 결부된 보은담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인삼은 신의 점지를 거쳐야 주어지며 착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 산신령 그림의 소도구에 늘 인삼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인삼에 관한 한 녹용과 더불어 신앙 이상의 항심을 품고 살아간다. 삼계탕에서 1년산도 못 되는 인삼 잔뿌리라도 발견하면 왠지 정력이 뻗칠 것만 같은 생각에 젖는다. 인삼차, 정관장, 홍삼, 인삼김치에 이르기까지 상품들은 다양하다.


신성성에 기댄 신초로서의 정직성을 더불어 회복한다면, 상징성의 깊이만큼이나 고급브랜드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재배인삼이 무한공급되는 시대지만 인삼의 상징성 속에 담긴 그윽한 뿌리와 비밀스런 출현담을 기억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사람 모양을 닮은 인삼을 좀더 격이 높은 것으로 쳤으니, 바다에 해삼이 있다면 땅에는 사람 닮은 인삼이 있는 격이다. 식물 뿌리가 사람을 닮았다? 유감주술의 힘에 의탁하는 오랜 영험성이 아닐 수 없다.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

 


‘조화’로 버무리고 ‘여유’로 발효시킨 전통의 지혜


한겨레원형질 민족문화상징 100


김치

우리는 한때 김치를 배척한 적이 있다. 우리답게 요란스럽게. 김치에서 나온 기생충 알이 호들갑의 빌미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것이면 무조건 경멸해 마지않던 풍조와 궤를 같이한다. 김치 냄새 싫어하는 서구인들 비위 살피며 맵고 짠 맛을 핑계로 위암 등 각종 질환의 원인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외국인들이 낯설어한다고 전통 문화를 미개, 미신 문화로 치부했으니 의아해할 일도 아니다.

공동체 삶의 산물인 전통문화가 21세기 문화콘텐츠 보고로 부각되면서 김치의 의미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콩을 발효시킨 장류, 곡물·과실로 빚은 주류·식초 등과 함께 과학이 증명한 ‘인류 음식문화의 백미’로 칭송되기도 한다. 심지어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 주는 ‘의료식품’으로도 떠받들어진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도 스트레스 해소 등의 탁월한 효능을 ‘과학’의 이름으로 강조한 바 있다.

비위생적이라 비하한 것도, 건강 효과를 내세운 것도 과학이니, 덩달아 춤출 일은 아니다. ‘우리 게 좋은 것이여!’에 편승한 또다른 쏠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라도 김치의 문화적 의미는 차분하게 따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김치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성숙의 무르익음을 기다려야 한다.

근래 전통문화에 주목하는 건 돈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치에 관심을 갖는 게 건강 장수에 좋기 때문만도 아니다. 과학과 발전의 이름으로 팽개친 전통 삶의 지혜에서 피폐한 자본세상, 개인주의적 삶의 대안을 꾀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우리가 버리고 온 공동체적 삶에서 확인되듯 이질적 요소들이 뒤섞여 전혀 다른 새 가치로 재탄생한 먹거리다. 배추와 소금, 고추와 마늘 등 양념들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한데 어울려 탁월한 시너지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김치는 억지 부리지 않는다. 시간이란 불가항력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김치를 ‘만든다’고 하지 않고 ‘담근다’고 한다. ‘담근다’엔 ‘삭힌다’ ‘익힌다’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삭고 익기 위한 기다림을 거쳐야만 독특한 맛과 향이 살아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며 거친 개성의 모남을 누그러뜨리고 각종 양념과 버무려 이질적,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무르익음을 기다린다. 인위가 작용하지만, 완성은 시간의 흐름과 발효라는 자연의 생성변화 원리가 작용해야 이뤄지는 셈이다



김치를 담그고 나눠 먹는 과정에서도 공동체적 온기는 확인된다. 옛날 김장은 모내기와 더불어 두레 품앗이의 대표적 사례였다. 김장하고 이웃 모르쇠 하기가 지금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에 유습처럼 남아 있다. 최근 외국산 김치 수입이 급증한 것도 공동체적 삶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함께의 정신’은 김치와 다른 음식과의 관계에서도 보인다. 아무리 좋아해도 김치만 따로 먹지는 않는다.


밥이나 고기, 하다못해 고구마, 라면이라도 함께 챙겨야지 성인병에 좋다고 김치만 먹지는 않는 것이다. 오훈채나 쌈, 비빔밥처럼 한국 음식은 “여러 맛 겹치고 한데 엉겨 조화를 이루는 데 큰 특성이 있다.” 각각의 요리를 순차적으로 즐기는 서양이나 중국 등과 다르게 모두 한 상에 차려놓고 함께 먹는다. 어느 분 지적처럼 “한국 음식은 관계의 틈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 하나, 김치야말로 퓨전음식의 모범이다. 18세기 야채 절임과 고추의 그 극적인 만남과 뒤섞임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치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질적 문화가 만나 새 문화로 거듭난 성공적 예라 할 수 있다. 세계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충돌하는 요즘, 새로운 문화 창출을 위해서라도 김치가 보여준 좋은 선례를 유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종민 전북대 교수


패스트푸드에 맞선 ‘느림의 맛’

                               된장·청국장·고추장


김치와 더불어 발효과학의 총아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된장, 청국장, 고추장이다. 이들 역시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느리게 기다리며 숙성시킨 ‘슬로 푸드’다. (영어엔 슬로 푸드란 표현이 없다. 패스트푸드를 비튼 이 말에는 햄버거 따위에 대한 비아냥, 세계화 물결에 대한 불복종의 의지가 서려 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나 산업문명 탓에 속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덫에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생활조차 조급함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자극적인 것만 찾아 우리들 심성도 점점 더 성마르게 되어간다.

한때 된장·고추장을 홀대했던 것은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속도와 화려함에 취해 오래 묵을수록 제 맛을 내는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으니 피자와 햄버거만 좇다가 비만의 멍에를 쓰게 된 꼴이라! (하여 이제부터라도 ‘된장녀’처럼 우리 문화를 비하하는 듯한 말들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림의 음식을 천천히 즐기는 여유로움은 반생태적 삶의 대안

물론 “발효는 과학이다!” 그러나 발효에서 보아야 할 게 영양이나 건강만은 아니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더딘 성숙의 과정이다. 무르익음을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의 심리학이다. 된장이나 청국장, 고추장은 우리 몸에 좋은 양질의 영양소를 함유한다.


현대 과학이 이를 앞 다투어 증명해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느림의 음식들을 천천히 즐길 줄 아는 마음의 여유로움이다. 영양제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과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발효과학의 총아들도 별 무소용인 것이다.

이 발효식품들의 느린 성숙을 지켜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옹기다. 옹기 또한 편리함만을 내세워 한때 플라스틱 그릇에 밀린 바 있다. 요즘 다시 건강에 좋다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더 주목할 것은 그것이 지니는 생태적 의미, 즉 스스로 숨을 쉬며 더딘 무르익음을 보장해주는 그 ‘느림의 미학’인 것이다.


옹기 자체가 흙과 물, 그리고 불이 만나 오랜 ‘성숙’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으로 속도와 편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편리성만을 중시하는 조급함이나 건강을 지나치게 챙기는 ‘건강염려증’이 오히려 정신은 물론 육체의 건강까지도 해칠 수 있다. 건전한 정신만이 건전한 육체를 보장해준다.


우리가 김치나 고추장, 된장 등 전통 발효식품에 주목하면서 거창하게 ‘잃어버린 공동체’ 운운하는 것도 현대 산업문명이 조장하는 반생태적 삶의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면 망하고 순응하면 흥한다. 음식문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음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