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값
*이름 값
‘정열’
예쁘지도 여성스럽지도 않다. 어떤 사람은 이름에서 건
강함과 열정이 느껴진다고 하지만 나는 마뜩잖았다. 얼굴
과 어울리는 이름,이미지와 잘 맞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정열이란 이름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
으며 살았다. 어떤 이름이 나와 어울릴까?
곧을 정 매울열은 곧고 매운 사내아이처럼 되라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있었다.
‘정 순’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르던 이름이다. 중학교
에 들어가면서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평상시 이름과 다르
게 등록되어 있었다. 손자를 기다린 할아버지께서 결정하
신 이름이라고 하니 첫 손자를 무척이나 기대하셨던 할아
버지의 바람이 느껴진다. 남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다음
에 남동생을 보게 된다고 믿고 계셨으니 그럴 만도 하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13년 동안 불리던 정순이란 이름을
두고 하루아침에 바뀐 이름 때문에 모든 게 낯설고 힘들어
졌다. 아버지께 따지기도 여러 번 했지만소용없었다. 울며
불며 이름 바꿔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꿈쩍
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출석시간마다 대
답을 놓쳐 결석 체크가 되기 일쑤였다. 바꾸려면 좀 예쁘고
여자다운 이름으로 바꿀 것이지 남자 이름으로 바뀐 뒤부
터 학교 가는 것도 싫었다. 민영,은주,수빈 같은 예쁜 이
름을 가진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다정하게 ‘정열 씨’라고 불러준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왠지 남자를 부르는 것 같아서 였다고
한다. 그저 성만 붙여 ‘허 양’ 아니면 ‘미스 허’라고 불렀다.
내 이름이 싫어지는 날들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도 마찬가
지였다. 몇 번씩 상대방의 확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내 몫이었다. 동사무소나 은행에서 업무를 볼 때도 담당 직
원과 꼭 얼굴을 한 번 더 마주쳐야 했다.
“본인 맞으시죠?”
이름 때문에 늘 받던 익숙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곧잘
내 이름과 모습을 대조하면서 웃음을 지 었다. 그리고 전화
가 걸려오면 아저씨 바꾸라는 말도 다반사다 보니 그러려
니 하게 되었다.
고양문인협회에 처음 가게 되던 날, 약속장소에서 나란
히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옆사
람에게 다가가 여쭈었다.
혹시 문인협회에서 나오시지 않았나요?
허정열 씨인가요?
네,제가 허정열입니다.
그러시군요. 저는 남자분인 줄 알고 전혀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바라보며 서로 웃었다. 이렇게 여성스러
운 분이 정열이라니 남자 이름이라 여자분일 거라고는 상
상도 못했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후로는 약속 장소에
서 막연하게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제가 허정열입니다.
혹시….”라며 다가가는 용기도 생겼다. 이름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교육장에서 남자 방에 배정이 되어 있
어 당황했던 일. 남자인 줄 알고 조장으로 되어 있어 팀의
조장이 되어 이끌었던 일. 청탁을 받고 원고를보냈는데 교
정 때문에 전화하게 되었을 때 남자분인 줄 알았다는 말 등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참 많다.
이름은 그 사람의 첫인상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
처럼 살게 된다는 말도 있다. 첫인상은 놀람으로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 쉽게 기억되기도 하
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기도 한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야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등단을 하고 시를 배울 때였다. 하루는 선생
님께서 “정열인 누가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궁금하다.
”라 고 물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는 대답에 선생님
은 “참 잘 지었어. 이름이 너무 좋아.”하셨다. 에너지가 느
껴지는 이름이라고 글도 잘 쓸 수 있을 거라며 칭찬을 아
끼지 않으셨다.
‘정열,
그러고 보니 내 삶에도 이름값이 녹아 있는 듯하다. 열
정과 정열이 느껴지는 삶.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난 이
름값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값을 하며 살
라는 할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욱 ‘정열’
이라는 이름이 소중해진다. 지금은 이름처럼 열정과 정열
이 넘친다는 말을 들으면 톡톡히 이름에 어울리게 살아왔
다는 자부심이 든다. 돌아보니 살아온 삶에 내 이름이 크
게 한몫을 한 것 같아 흐뭇하고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