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park 2023. 12. 22. 19:50

*지워진다는 것은

 

핸드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삭제했다. 미움도 경계의

대상도 아닌 이름을 지운다는 게 하나의 의식처럼 간단해

서 슬프다. 평소에 다정하게 늘 보고파 그리워했던 사람은

아니지만가끔 쓸쓸하고 외로운 바람 한 줄기 긋고 가는

계절풍 같은 사람이 었다.

남편의 친구인 그는 꿈을 먹고 사는 만년 소년이었다.

영화여행이 전부였던 그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고

허전하고 쓸쓸할 땐 영화나 여행으로 빈 가슴을 채웠다.

까운 곳에 살면서도 삶의 무게가 다른 그는 자주 찾던 우리

집도 어느 날부터 멀리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자주들러 놀아주기도 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이들

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던 친구에게 남편은 유독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

. 많은 친구 중에서도 아픈 손가락이 었다.

남들과 조금 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뿐인데 늘 그는 평

범함의 밖에서 서성였고 아무리 끌어들여도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사람처럼 느껴

졌다. 한 집안의 장남으로 보편적인 일상을 거부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가장 소소한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흐르는 시간 앞에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작년 가을이 었다. 서울 어느 공원인데 죽

을 것 같다며 119에 신고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위치를 몰

라 스스로 해야 한다고 일러주던 남편의 목소리가 격앙되

어 있었다. 저녁에 전화를 받고 달려간 남편은 병원에 입

원을 시키고 챙겨 주었다. 그날 우연히 남편 앞으로 써놓

은 유서를 보게 되었다며 그 후 1운명 같은 시간이 주

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시소처럼 바

닥에 닿아 있던 그는 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최선의 삶이란 주어진 여건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에게 남편과의 관계는 친구 이전에

삶과 생을 이어가는 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는 관심

을 먹고 자라고 한번 형성되면 영원히 지속하는 자동시계

가 아니라 수시로 애정과 관심으로 보살펴주지 않으면 바

로 멈춰버리는 수동시계란 말이 떠오른다. 관심이 없어지

면 관계는 경계로 바뀌고 만다. 하지만 다들 관계를 살피

지 않고 경계를 해도 남편은 그의 유별난 식성과 까다로움

도 잘 맞춰주며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명절이나 연휴 때

가 되면 혼자쓸쓸하게 지낼 친구에게 작지만용돈도 챙기

고 필요한 것을 사 주기도 했다. 못 먹는 술자리도 마련해

그의 쓸쓸함을 채워주곤 했다. 그래도 심성이 착한 친구가

밉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우리는 매 순간을 선택하고 그 결정으로 삶의 계단을 오

르내리며 살아간다. 한 번의 어긋난 선택과 결정으로 잘 다

니던 직장을 잃었고 외국이라는 막연한 꿈으로 인해 현실감

각을 놓쳐버린 사람이었다.

욕망은 삶에 있어 근원적인 에너지다.

그가 원하는 외국이라는 삶이 그를 지배하게 되고 자

신에게 허용되지 않은욕망이기에 그의 삶 전반에 기울기가

생긴 것이다. 뜬구름 같은 삶을 연명하는 그를 옆에서 지켜

보는 이들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하루

하루 노동으로 연명해가는 처절한 견딤이었을 것이다.

 

힘겹게 거리를 활보했을 체온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슬

픈 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의壽衣 한 벌로 세상

의 곡진 삶을 입고 누운 그의 모습은 근심걱정을 잊은 평

온한 얼굴이어서 울컥 눈물이 솟았다. 육체가 생명을 포기

할 때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

끼기나 했을까. 폭풍처럼 밀려오는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

항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 뒤에는 많은 생각이 이어졌지만 아무도 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평온하고 목적 없는 마무리에는

고통과슬픔, 삶에 대한 억압도 없다. 모든 걸 잊고 지낼 수

있는 편안한 길이기를 이구동성으로 바랐다. 기구한 운명

을 지고 힘든 길을 걷기도 어려웠을 그에게 더 없는 평온

이 함께하길 빌면서 그의 단출한 가족들과 헤어져 오는데

가슴에서 바람 한 줄기 긋고 지나간다.

삶의 가변성은 생각이나 기분에 따라 균형을 잃기도 해

서 일정을유지하기가 어렵다. 턱없이 기울기도 하고 양과

질에 따라 추락하기도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임의 연

속이다. 오늘 움직이고 내일 움직여야 모레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희망과 꿈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움직여야 산다는 것움직여 무언가를 해

야 한다는 것에 묶이지 않아도 되는 그는 이제 자유인이다.

인생은 단추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고 건설하

는 것이란 말이 실감 난다. 추석 명절을 이틀 앞두고 한 줌

의 재로 돌아간 그는 서러움이나 슬픔과 허무를 다시는 만

나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

져오듯이잘 보낸 삶이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고 말

했다. 찾아올 사람도 없어 장례식장은 차리지 못했지만 몇

몇 친구들이 찾아와 자취를 더듬으며 그를 안주 삼아 술잔

을 주고받았다. 그에게 건네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위로의

술잔이었으리라.

 

한 사람의 체취가 지워지고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

에서 차차 사라질 것이다. 가족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거

닐다 묻히겠지만 한 달이나 지난 뒤 남편은 핸드폰에서 그

의 이름을 지우려다 한참을 머뭇거린다. 세상의 끈을 놓아

버린 친구를 생각하는 남편의 옆 얼굴에 허무와 슬픔을 견

디는 그늘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