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평화 빼앗긴 슬픈 대자연

21c-park 2006. 9. 8. 11:36


 평화 빼앗긴 슬픈 대자연

 


비무장지대는 ‘사기’다
무장지대를 허물어 평화공원으로
남기는 일을 후세에게 넘길건가


 

 

 

한겨레원형질 민족문화상징 100

(6) 비무장지대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국제연합(UN)군 사령부를 대표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을 대표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서류에 서명했을 때, 비무장지대는 탄생의 고고성을 알린다. 출산을 알리는 왼새끼 금줄 대신 철책선이 쳐졌고 그 아기는 쉰살을 넘겨 차츰 노년기로 접어들었다.

비무장지대는 ‘사기’다. 왠 비무장? 비무장은 ‘결코’ 없다. 중화기도 부족하여 각종 화공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후방에는 미사일이 곳곳에서 노린다. 섬처럼 진출한 전방 지피(GP)는 서로의 복부를 겨냥하며 적막 속에 으르렁거린다. 반공드라마의 은밀한 침투 간첩조 이야기가 <공동경비구역>같은 영화로 진화를 거듭한 것은 사실이나 지뢰밭 현실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 엄혹한 무장지대를 여전히 비무장지대라 부르고 싶어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가는 찻길과 철길이 뚫려서 숨통이 트이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협상에서 개성공단 제품은 민족내부거래가 아니라 여전히 ‘외국제품’이어야 한단다. 비무장지대는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과 속’이 교차하는 제의의 장소라고나 할까. 엄청난 전쟁과 죽음 그리고 침묵의 제의, 양면적인 그 무엇이 함께 155마일을 흐른다.

지금의 외형적 침묵이 민족통일의 축제로 승화될지, 또 다른 죽음의 제의로 폭발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세계 역사상 전쟁은 늘 있어왔지만 같은 민족 간에 이처럼 공고한 격리공간이 존재해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비무장지대는 ‘세계사적 성역’이기도 하다. 성역은 평화롭게 보존되어야한다. 전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며, 냉전 유물이기는 하지만 성역답게 제대로 보존되고 후세를 위해 살아있는 평화박물관으로 이어져야한다.

‘잃어버린 땅’을 찾겠다며 비무장지대 안의 토지문서를 사고 파는 자본주의적 발상이 이미 본격화하고 있다. 여기에 지자체마다 평화를 내걸고 야금야금 냉전의 유물 조차 돈으로 환산하는 지경에서 비무장지대가 끝내 100대 민족문화상징으로 선정되었다. 비무장지대가 민족문화상징의 반열에 올랐음은 슬픈 일이다. 동족상쟁의 잔혹한 과거의 이미지까지 모두 함께 올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많은 청년들이 선택과 대안없는 징병제로 청춘을 불사르는 답답한 현장이기도 하다.

주강현·한국민속연구소장

 



신명이 깨운 한민족 자화상

 

 


붉은 길거리 응원단 열풍이 지닌 ‘스포츠 애국주의’에 대한 일각의 비판은 경청할만하다. 언제부터인가 산적한 모든 사회적 현안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파묻히고 만다. 그래서 스포츠 열풍에 휩싸인 사회적 맹목성에 대해 집단 경고음이 터져나오곤 한다.

그런데 길거리응원은 어느날 갑자기 월드컵 때문에 탄생된 것만이 아니다. 뒷풀이를 좋아하고 본굿보다 거리굿을 즐기는 한민족의 굿판이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월드컵 잔치 등에 거리굿으로 연출된 것이니 일종의 주기적 통과의례다. 무속적 심성이라고나할까. 신명의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현대적 주술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길거리응원이 100대 상징의 반열에 올림을 주저하는 일부의 반대를 무릎쓰고 당당히 올라선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심성이란 그렇듯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지 않다.

어쩌면 다혈질적이고 빠르고 신명에 넘친다. 그 신명이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너무 빨라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 ‘고려공사 3일’이라고 용두사미로 끝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다이나믹, 밀어붙임, 격정과 분노의 함성 등등이 없었더라면 이 정도의 국력을 단기간에 성취할수 없었으리라. 길거리응원은 한민족의 자화상 정도로 규정해도 좋지않을까.

주강현·한국민속연구소장

 



질박한…장엄한…선사시대와 대화

 


빗살무늬토기·고인돌


비무장지대와 길거리 응원이 걸쳐있는 현대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상징물로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이 눈에 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참으로 ‘시원’, 그 자체였다. 머리를 빗듯, 토기를 빗어서 역사의 지문을 남겼다. 이름조차 빗살무늬(즐문토기)다. 그 무늬에는 선사시대의 ‘결’이 각인되어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영향이라거나 북유럽 일대에서 왔다는 문화전파설도 있지만 자생설도 만만치 않다. 모든 문화의 독립·자생적 발생만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나, 전파설에만 기대는 것도 문제다. 사실 빗살무늬는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일대에서도 흔히 발견되지만 암사동을 비롯한 한반도 빗살무늬가 단연 압권이다.

땅을 파고 소박하게 장작더미를 싸놓아 흙을 구으면서 만든 단순 질박한 토기의 힘. 빗살무늬의 미학적 힘이다. 우리 예술사의 첫대목을 쓰게 만드는 예술품이자 생활도구사의 초반부 유물이기도 하다. 고고학에서 말하는 ‘토기학’ 교과서의 지론처럼 질그릇들은 당대인들의 삶의 풍경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흔적이다.

고인돌은 어떠한가. 서유럽, 북아프리카, 중국 랴오닝성과 산동반도, 큐슈에도 고인돌은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그중에서도 단연 ‘고인돌의 나라’가 아닐까. 북방식, 남방식의 구분법도 존재하지만 기원과 유래에 관한 논쟁은 고고학자들 몫일 것이며, 일반인들은 거석문명 앞에서 영혼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영국 웨일스 해변마을에서 5천년 전 고인돌을 발견하고 매혹되어 <거석을 찾아서 내 영혼을 찾아서>란 명작을 쓴 미국의 작가 M.스콧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리라.

고인돌은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미학적이다. 홀로 솟구친 웅장·장엄한 풍경 못지않게 돌무더기들이 떼지어 시위하는 풍경은 인상적이다. 돌을 옮기는 과정을 재연하는 실험고고학 현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선사시대를 이해시키는 충분한 공부거리다.

과거 고인돌은 분명 무덤이거나 족장문화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고인돌은 그 자체가 환경조각일 수 있고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의 박물관들이다. 그래서 ‘버림받았던’ 고인돌을 지자체마다 ‘공원’‘박물관‘ 등으로 옮기거나 작명해 대접한다.

때로 노예적 동원을 연상케하는 고인돌은 족장의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힘겨운 삶을 웅변하기도 한다.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제 자리에 서있는 거석들은 그 무게중심만큼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 천년을 사는 나무도 세월이 가면 죽기 마련이나 돌은 움직임 없이 붙박이다. 선사시대 오솔길에서 마주친 거석을 보며 태고의 시공에 비춰진 역사와 인생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주강현·한국민속연구소장

 

출처: 2006년 9월 1일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