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park 2007. 6. 27. 13:50

 

Wild Wea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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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ong - cblee9978님의 첨단무기/전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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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D & Wild Weasel".

 

 SEAD 란 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ce (적 방공망 제압)의 약자입니다. 기본적인 개념을 여러분들도 다 아시리라 믿고, 이 SEAD 임무가 현대 공군의 여러 임무 중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1. Ingress & Egress

SEAD 임무를 설명하자면 먼저 이 두 단어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술용어이기도 하고 비행용어이기도 하지요. Ingress 를 우리말로 하면 “들어섬, 진입” 이런 뜻입니다. Egress 는 그 반대되는 뜻으로 “이탈, 밖으로 나감” 이란 뜻이지요.

전술적으로 Ingress 란 말은 적의 영공으로 진입하는 행위/상태를 의미합니다. Ingress Route, 이런 표현도 쓰지요. 또 Target Ingress 하면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한 Attack Pass (공격 경로)를 설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현대 공군의 작전을 분류할 때 Ingress Enemy Airspace 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데, 바로 적의 영공에 침입하여 벌이는 작전을 뜻합니다. 이는 Main Mission 과 Support Mission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Main Mission 은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Strike Mission 을 뜻합니다. 미국 공군과 나토 공군은 보통 이 Strike 임무를 아래와 같이 3가지로 구분하지요.

Strike Mission
(1) CAS (Close Air Support) - 근접 항공 지원
(2) BAI (Battle Area Interdiction) - 전장 항공 차단
(3) INT (Interdiction) - 후방 차단 [AI - Air Interdiction 항공후방차단 이라고 하기도 함]

또 이를 지원하는 Support Mission 은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지요.

Support Mission
(1) CAP (Combat Air Patrol) - 전장 상공(항공) 초계
(2) SEAD (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ce) - 적 방공망 제압
(3) CSAR (Combat Search And Rescue) - 전장 탐색 및 구조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해보기로 합시다.

(1) CAS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근접항공지원”은 아군 지상군 부대와 인접하거나 교전 중인 적 지상군에 대해 적절한 항공 화력을 투사하는 작전을 말하지요. 적과 인접한 공간을 전술용어로 FEBA 또는 FLOT 라고 합니다. 아군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항상 아군 머리 위에 폭탄을 떨구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미공군 조종사들은 이 끔직한 상황을 가리켜 "Blue-on-Blue" 아니면 “Fratricide=가족 살해”라고 부릅니다.

FEBA - 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
FLOT - Forward Line Of Troops

그래서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FAC(Forward Air Controller) 를 두고 최대한 정밀하게 화력을 유도합니다. 지상요원도 있고 공중에서 선회하면서 이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는데 FAC 용 항공기(전선항공통제기, 우리 공군의 경우 최근 KO-1 배치, 미 공군은 OA-10A) 가 그런 기체입니다. 전선항공통제기가 현장에 있을 경우는 지상의 FAC 요원이 전선항공통제기로 연락하고, 전선항공통제기가 다시 CAS 항공기로 연락을 하는 게 보통입니다. 전선항공통제기가 없을 경우는 지상 FAC 요원이 CAS 항공기에 바로 연락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말처럼 쉬운 작전이 아니어서 전선항공통제기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FAC 는 FSCL(화력지원 협조선)을 설정하고 FLOT 와 FSCL 사이의 영역으로 화력을 유도하게 됩니다. CAS 는 또 세부적으로 Air Strike(공중 타격), Escort(지상군 호위), Column Cover(기동 종대 엄호)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요.

CAS 작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서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이번 SEAD 글 후속으로 “CAS 작전의 특징과 Case Study, A-10 과 Su-25 정밀 비교”하는 씨리즈를 마련할 예정인데 그 때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FSCL - Fire Support Coordination Line

(2) BAI
전장 항공 차단은 약간 고전적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아군과 인접한 또는 교전 중인 적 지상군이 증강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 후속 예비부대나 물자의 접근을 막는 거지요. CAS 와의 차이점이라면 전장으로 통하는 교량, 도로, 철도, 물자집적소 등 사전 계획에 의해 공격 가능한 고정표적(Pre-planed fixed target) 이 포함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현대전에서는 BAI 의 성격이 많이 달라져서 CAS 의 개념이 좀 확장되거나 아니면 거의 같은 개념으로 간주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와 달리 지상군의 공중기동 작전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후속예비부대나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헬리본 작전이나 낙하산 부대를 이용하여 지상군을 투입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투입된 지상군은 다시 공중지원을 요청하고 출동하는 공군은 거기서 (BAI, 가 아닌) CAS 를 또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새로운 FLOT 가 생기고 CAS 임무가 또 생긴다는 뜻입니다.

(3) INT.
후방차단은 전략적인 성격이 강한 개념입니다. 2차 대전 같으면 대형 폭격기들이 담당했을 작전인데, 적의 지휘소, 통신시설, 공장, 사회간접자본, 해공군 전략 기지 등 High-value fixed target 을 주로 공격하고 또 적의 후방 주력 예비부대를 사전 타격하는 임무도 수행합니다.
(장거리 폭격기에 의해서 수행되는 전략적 작전을 Deep Strike 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전투기의 성능향상과 공중급유 등으로 현대전에서는 INT 와 Deep Strike 의 구분도 점차 모호해져 가는 추세입니다)

나머지 임무들은 여러분도 잘 아는 개념이라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CAP 은 Strike 임무를 수행하는 항공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공중을 초계하고 접근하는 적기를 격퇴시키는 임무이고 CSAR 는 격추되거나 사고로 적진에 남겨진 조종사를 구출해오는 임무를 가리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 대로 우리 공군에도 “탐색구조 전대”라고 이름이 붙은 부대가 있지요.

이제 SEAD 임무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얼마 전 어떤 회원분이 F-35 JSF(Joint Strike Fighter) 를 우리 언론에서 번역하기를 “통합공격기” 라고 한 건 오류라고 지적한 내용을 보았는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외신 기자들의 군사지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공격기란 번역은 정말 넌센스입니다.

Strike Fighter 는 절대 Attacker 가 아닙니다. A-10, A-7 처럼 공격기라는 분류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Strike 임무는 Fighter 나 Attacker, Bomber 모두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Strike 는 지금까지 위에서 설명한 (3가지 세부 개념으로 나뉘는 전술 용어) 바로 그 Strike 를 말합니다.

저는 “타격” 정도로 번역을 하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고 그냥 "스트라이크" 정도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따라서 Strike Fighter 는 "스트라이크 (임무를 주로 하는/ 임무 개념이 강조된) 전투기"를 의미합니다. Joint 의 개념은 공군/해군/해병대가 통합기체를 쓴다는 의미이므로,

결국 “F-35 JSF”는 “(3군) 통합 스트라이크 전투기” 로 번역하는 게 가장 적당할 듯합니다.
(또 한가지, F-35 Lightning II 를 “번개 2” 로 번역하는 촌스러움도 없어져야 겠지요? 무슨 나이트클럽 웨이터 이름도 아니고...)

2. SAM & SA-2 Guide Line

이제 본격적으로 SEAD 와 Wild Weasel 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위에서 SEAD 를 Strike 임무를 돕는 지원임무에 포함시켰지만, 전자전과 SAM 의 위협이 날로 증대하는 현실 속에서, 그 중요성은 절대 과소평가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나오게 될 얘기이므로 우선은 현대 공군의 SEAD 임무를 잉태하게 만든 원인, 곧 지대공 유도 미사일(SAM=Surface to Air Missile)에서 출발을 해야만 하겠지요.

제트 전투기와 유도탄의 근원이 나치 독일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V-2 로켓에 관한 이야기는 히틀러가 양성한 독일의 천재 과학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히스토리 채널에서 V-2 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에 대한 다큐를 보았는데, 여러분들도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비화가 정말 많지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동생이 미군에게 항복 교섭을 한 얘기나, 미군에게 포로가 된 다음에 부러진 팔에 기부스한 브라운 박사가 “미군이 정말 잘 대해줬다. 계란 후라이까지 해줬다니까!” 라고 말한 사실, 또 V-2 로 죽인 민간인이 6천명 정도인데, 지하 공장에서 이걸 만들다 학대/처형으로 죽은 유대인들이 무려 1만-2 만이나 되어, 무기를 만든 종업원들이 그걸로 죽은 사람보다 많았던 유일무이한 무기라는 사실 등입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 하나만 보자면, V-2 의 추진체, 항법시스템, 탄체 제어 시스템, 이른바 3 대 기술은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또 미영소의 기술력과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획기적인 기술이었습니다. SAM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나치독일이 사상 최초로 개발한 지대공 유도탄 “Wasserfall" 역시 놀랄만한 무기로 당시 독일 과학자들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부족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 Wasserfall = 폭포 (영어로 하자면 waterfall)

나치독일은 이미 1941년까지 여러 종류의 Anti-Aircraft 로켓을 개발하여 테스트하고 있었는데, 괴링의 독일 공군성은 V-2 로켓 같은 공격용 무기에만 관심이 있던 나머지 1943년까지는 더 이상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였지요. 허나 연합군의 공습이 날로 강화되자 1943년부터 여러 종류의 지대공 유도탄 개발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Enzian, Rheintochter, Schmetterling, Wasserfall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들 모두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실전 배치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격추실적 0)
허나 이들 중에서도 “Wasserfall"은 가장 대형이고 가장 복잡한 기술을 사용하며 실전적용에 가장 근접했던 완성도 높은 미사일이었습니다. 그 기술적 연원은 오늘날의 지대공 미사일의 할아버지라고 부를 만합니다.

 


Wasserfall 미사일의 유도시스템을 좀 더 설명하지요. Rheinland 라는 야간 유도 시스템은 4개의 unit 로 구성되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지요.

1) Radar set
2) Direction Finder Set
3) Comparator Computer
4) Control Transmitter

탐색 레이더가 표적을 획득하면 미사일이 먼저 발사됩니다. 발사와 동시에 이 탐색레이더는 Wasserfall 미사일 내부의 응답기(transponder) 에 지령을 보내 신호를 발생시키도록 하지요. 신호를 발생시키는 이유는 미사일의 위치를 정확히 추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신호를 Direction Finder Set 를 통해 수신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사일의 2축 좌표(Azimuth & Elevation)이 파악되지요. 이 정보는 단순한 아날로그 연산기인 Comparator Computer 로 보내집니다. 이 연산기는 미사일의 좌표와 현재 방사되고 있는 레이더 빔의 좌표를 비교하고 미사일이 레이더 빔 내부로 들어오도록 Steering 지령 신호를 Control Transmitter 를 통해서 미사일에 보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미사일이 레이더 빔 내부로 들어오면, 미사일 자체의 수신기에 의해서 더 이상 빔을 벗어나지 않고 (그래서 빔 편승 - Beam Riding 이라고 함) 목표물을 향해 접근하게 되지요. 이 방식도 오늘날 실전 배치된 여러 미사일에 적용되는 선구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외에도 또 다른 방식의 유도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했다는 점은 더욱 놀랄 만하지요.

다른 한 가지는 미사일 전용 추적 레이더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Conical Scan 방식의 추적레이더로 미사일을 추적해서 빔 밖으로 벗어나면 지령을 통해 다시 빔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지요.

(빔 편승 방식을 안 쓰고) 이 추적레이더와 미사일 Steering 명령을 조합하면 오늘날 Command Guidance 라고 불리는 “무선지령유도 방식”이 성립되지요. 아래 설명할 구 소련의 SA-2 미사일이나 미국의 나이키 미사일이 바로 이 방식 그대로 입니다.

또 다른 하나, 나치 독일 과학자들이 고려했던 제 3의 유도 방식은 놀랍게도 오늘날의 AIM-120 암람 미사일과 같은 것으로, 관성항법장치에 좌표를 입력하여 발사하면 그 대로 날아가다 적 항공기 근방에서 내부에 탑재된 Active Seeker 레이더를 작동시켜 목표에 명중시키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근원을 따지다 보면 현대의 최첨단 미사일 유도 시스템도 결국 독일과학자들의 손을 못 벗어나게 되지요. 개인적으로 대단한 인재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 U-2 기, SA-2 미사일에 떨어지다.

이제 미 공군 Wild Weasel 의 탄생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인 구 소련의 SA-2 지대공 미사일에 대해 알아봅시다. 2차 대전 막바지에 이르자 미영소의 첩보기관들은 V-2 와 관련된 기술과 과학자들을 손에 넣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미국이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지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와 그 휘하 연구진들, 관련 문서, 심지어 V-2 부품까지 몽땅 손에 넣어서 미국으로 옮겨갑니다.

구 소련 역시 동독 전역을 샅샅이 뒤져서 V-2 나 Wasserfall 관련 기술자와 자료들을 소련으로 끌고 가서 각종 유도탄을 만드는 데 활용합니다. 구 소련이 맨 처음 만든 유도탄은 SA-1 Guild (나토 코드명) 였는데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모스코바 방어용으로 급히 만들어진 것으로, 실험적 성격이 강한 미사일이었지요.

다음으로 SA-2 Guideline. 이 미사일은 1953년에 나토 첩보기관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되었는데, 1960년 5월 1일, Francis Gary Powers 가 조종하던 U-2 기가 러시아 Sverdlovsk에서 격추됨으로써 크게 유명해집니다. 비행 중에 모두 14 발의 SA-2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요격을 위해 출동한 구소련 Mig-19 까지 실수로 격추되는 소동이 있었지요.

이어서 Cuba 미사일 위기가 한창이던 1962 년10월 27일이었는데, 정찰을 하던 U-2 기 한 대가 SA-2 에 의해서 격추되어 조종사 Rudolf Anderson 소령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ECM 장비 및 대 레이더 미사일 개발 등에 박차를 가하게 되지요.


SA-2 Guideline 의 유도시스템에 대해 좀 더 알아봅시다. 베트남전의 Wild Weasel 작전이 SA-2 사이트를 격파하는 임무를 주로 하다 보니, 그 내용을 이해하자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지요.

유도미사일(Guided Missile)은 우선 목표물을 탐지하고 유도하는 에너지로는 Radio Frequency (RF)/ Infra-red (IR 적외선) / Optical(가시광선)/ Laser 등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1) Homing Guidance
(2) Command Guidance

Homing Guidance 는 미사일 내부에 목표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레이더 반사파/적외선 등)를 감지하는 Seeker 를 이용 미사일 스스로 목표를 찾아가는 유도방식을 말하지요.
Command Guidance 는 미사일 자체는 시커가 없거나 제한적이고 외부의 지령에 의해서 목표물에 명중하는 방식입니다. 아래 표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SA-2 미사일은 Command Guidance 중에서도 1세대 미사일로, 무선 지령만으로 미사일을 목표에 유도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방식은 보통 탐색/표적획득 레이더가 표적을 탐지하고 이어서 추적 거리에 들어오면 추적 레이더가 추적을 시작하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추적 레이더는 2 가지를 반드시 해야 하는데, 하나는 목표물을 추적하는 것과 또 하나는 발사된 미사일을 추적해야만 하지요.

이를 위해 2 개의 Tracking Unit 를 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SA-2 시스템의 추적 레이더는 Fan Song 레이더로 모두 최대 6개의 목표물을 추적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요. 허나 이 무선지령유도 방식에 있어서는 동시추적 갯수는 중요한 개념이 아니고 표적의 미래위치를 계산하는 연산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표적의 추적 데이터 자체는(다시 말해 현재 위치)는 미사일 유도에 있어 별 의미가 없고, 이 자료들은 표적의 미래위치(비행경로) 를 계산하는 자료로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사일에 Steering 지령을 내릴 때는 미사일을 표적의 미래 좌표로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서 사통 컴퓨터가 표적의 Position Rate 를 신속하게 계산합니다.
즉 표적의 3차원 좌표(Azimuth, Elevation, Range) 값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지속적으로 기록하며 그 변화율을 계산하는 거지요.

SA-2 의 사통컴퓨터는 이 연산을 표적 1 개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표적 1개와만 교전이 가능하지요. 또 1 개의 표적에 대해서 3 발의 미사일을 동시 유도할 수 있습니다. (위에 설명한 대로 미사일은 현재위치만 알면 되기 때문에 미사일의 Position Rate 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유도지령은 L-band 무선 교신으로 이루어지는데, 3채널로 되어 있어 채널별로 미사일 한 발씩 할당되지요. 실제로 SA-2 는 실전에서 표적 1 개 당 3 발의 미사일을 쏘았다고 합니다. 다만 동시유도가 3발이라는 뜻으로, 첫 번째 미사일이 폭발하여 채널이 하나 비면(Chennel Free) 네 번째 미사일을 쏴서 유도할 수가 있지요. 이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서 한 목표물에 10발 이상도 쏠 수 있습니다.

또 지령신호에는 탄체의 Steering 신호 외에도 신관 설정(Fuze Arming), 지령 폭파(Detonation), 수신기 셋팅(Receiver Setting) 등의 신호도 보내게 됩니다. SA-2 의 이러한 유도방식은 우리 공군이 곧 교체할 나이키 미사일과 아주 흡사합니다.

(* 미사일의 유도시스템 - 특히 레이더를 이용한 - 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를 갖고 있답니다. 나중에 한 번 날 잡아서, 자세하게 탄체 제어 방정식부터 미사일 기하학에 이르기까지 정리를 할 예정입니다. 그 때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지요)

미 공군이 Wild Weasel 임무를 편성한 직접적인 계기는 Vietnam 전이었습니다. 1965년 7월 24일(미국시간은 23일) 북 베트남 Hanoi 서북방 55 마일 지점을 비행하던 미 공군 15th TFW F-4C 편대 한 가운데서 SA-2 미사일이 폭발, 1 대는 격추되고 나머지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어서 미국은 발 빠르게 SAM 킬러 부대를 편성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 씨리즈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1. Junior SAC.

미 공군의 Vietnam 항공전은 "Junior SAC"란 단어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이 단어는 미국 공군이 Vietnam 전을 맞이했을 때의 상황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지요.

SAC 는 Strategic Air Command (전략공군 사령부)의 약자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그 때는 아직 공군이 독립하기 이전, 그러니까 US Army Air Force 시절) 몇 개의 사령부를 신설하면서 사령부 단위로 지휘계통을 정비합니다. 예를 좀 들어보면 아래와 같지요.

SAC - Strategic Air Command 전략공군 사령부
ADC - Air Defense Command 방공 사령부
TAC - Tactical Air Command 전술공군 사령부
AMC - Air Materiel Command 공군 수송 사령부 (훗날의 MAC-Military Airlift Command).

그리고 1947년 7월 26일, National Security Act 가 제정되어 2 차 대전을 수행하던 War Department 가 해체되고 민간인 국방장관 밑에 독립적이고 대등한 3 군을 두게 되는데,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이었습니다. 해군/해병의 항공대는 독립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각 군 역시 민간인 장관을 두어 행정부분을 관장하게 했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공군은 1947년 9월 18일에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최초의 공군장관(Secretary of Air Force)은 Stuart Symington, 최초의 공군 참모총장(Air Force Chief of Staff)은 Carl Spaatz 였습니다.

그리고 1950 년대로 접어들면서 미소의 대립이 첨예화됨과 동시에 핵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미 공군 내에서 전략공군 사령부(SAC)의 발언권은 엄청나게 커집니다. 그야말로 미 공군 전체를 좌지우지했지요. 육해공 3군 중에서 가장 많은 국방예산을 할당 받는 군은 공군이었는데, 공군 몫 중에서도 전략공군에 투자되는 돈이 가장 많았지요.

1948년 Curtis E Lemay 대장이 SAC 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2차 대전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지요. 유럽에서 B-17 폭격기 부대를, 아시아에선 일본 주요도시를 초토화시킨 B-29 부대를 지휘한 손꼽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부임 직전에는 소련의 동베를린 봉쇄에 대항한 대규모 공수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는데, 이 분이 1957년까지 전략공군 사령관을 그리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미 공군 참모총장 지내면서 50, 60 년대 미국 공군의 성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If United States fight and win the big war, it could always win any little war."

굳이 해석을 안 해도 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소 잡는 칼을 갖고 능숙하게 소를 잡을 수 있다면 닭 같은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big war 는 말할 것도 없이 소련을 의미했고, 소련을 굴복시킬 전력만 키운다면 다른 작은 나라들과의 전쟁은 간단히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였지요. 다시 말해 작은 나라들을 굴복시킬 별도의 전략이나 전술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미 공군은 B-52 같은 폭격기로 소련을 핵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집중합니다. 아울러 반대로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의 핵공격을 요격하기 위한 요격용 기체를 개발, 생산하는데 노력하게 되지요. B-52의 생산을 늘리고 F-102, F-106 전투기를 개발 배치하지요. 최우선의 솔류션은 폭격기체와 요격기체였습니다.

이러한 솔루션은 앞으로 있을 어떤 종류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획득하는 지름길임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사상은 전술공군사령부(TAC)에도 영향을 미쳐, 전술공군은 “꼬마 SAC” 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전술공군(TAC)도 전략공군(SAC)처럼 되고 싶다.”

위에 말한 “Junior SAC" 가 바로 그 뜻입니다. TAC 는 SAC 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군수뇌부를 설득하여 전투기의 핵폭탄 운용능력을 배양하는데 힘쓰지요. 약간의 B-45 쌍발 제트 폭격기와 F-84E 썬터제트 단좌전투기에 Mark-7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냅니다. 아울러 전략공군과 달리 저고도를 고속으로 비행하며 핵무기를 투하하는 전술도 함께 개발하지요.

핵무기 운용능력을 갖도록 개조된 임시변통의 기체 F-84E 를 빠른 시일 내에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기체도 개발합니다. Republic 항공사의 F-105 Thunderchief 가 그 후계기였는데, 당시 미공군 단발엔진 기체 중 최대크기를 자랑하고 내부에 폭탄창을 지닌 최대속도 마하 2 급 전폭기였습니다.

핵무기 운용능력과 빠른 속도(고속 침입 및 이탈)만 추구하다보니 운동성은 뒷전으로 밀렸고 국지전에는 적합하지 못한 기종이 되어 버렸지요. 가격도 합리적이 아니어서 F-105 1대를 살 돈으로 해군 A-4 Skyhawk 기 3대를 사고 돈이 남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F-105 Thunderchief 는 폭탄 탑재량과 항속거리가 F-100 Super Sabre 의 2 배 가까워서, 훗날 북베트남 폭격의 주역을 담당하게 되지만 냉정히 따져볼 때, 그런 임무에 적합한 기체는 못되었지요. 그게 미 공군의 현실이었습니다. "Junior SAC" 는 베트남 항공전과 같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Century 씨리즈로 대표되는 당시 미 공군의 신예기들은 하나 같이 Vietnam 과 같은 국지전에는 별 쓸모가 없었습니다. Convair 사의 F-102 Delta Dagger 나 F-106 Delta Dart 는 당시로서는 최고성능의 FCS(Fire Control System) 를 장착했지만 폭격기 요격용 기체였고 “인간이 탑승한 미사일”(missile with a man in it)로 표현되는 F-104 Star fighter 역시 상승력과 속도에만 중점을 둔 기체로 저고도에서 경쾌한 MIG 기와 근접전을 고려해볼 수 있는 기체는 전혀 못되었습니다.

남베트남에서 Vietcong 에 대한 COIN(COunter-INsurgency 대게릴라전)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던 F-100 Super Sabre 의 경우도 해군의 프로펠러기인 A-1 Skyraider 가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엔 미해군 쪽이 실용성과 적합성을 두루 갖춘 국지전용 전술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F-4 Phantom 기 역시 해군이 개발한 기종으로 효율성을 중시하던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F-105 의 교체기 겸해서 구매토록 압력을 넣어 결국 공군이 채택한 일화도 있었지요. 훗날 미 공군 기체 중 국지전용으로 가장 적합했다고 평가받는 A-7D 역시 본래 해군이 개발한 기체였습니다.

이와 같은 TAC 의 사정은 베트남전에 미 공군이 깊이 개입하기 시작할 때 많은 부분에서 문제를 드러내게 되지요. 기체의 성능이나 공군력의 구성뿐만 아니라 전술 개발과 조종사의 훈련 면에서도, 국지전과 재래식 무기에 관련된 부분은 취약한 편이었습니다. 로켓이나 일반 폭탄을 사용한 훈련시간 보다 핵폭격 훈련 시간이 훨씬 많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막강한 미국의 Air Power 가 여과 없이 투사되기는 합니다만, 준비가 부족했던 만큼의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되지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Vietnam 항공전을 거치면서 이와 관련된 많은 교훈과 반성이 이루어지고 이후 미 공군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2. Rolling Thunder 작전.

월남전을 대표하는 대규모 공습 작전은 Rolling Thunder 작전과 Linebacker 작전입니다. Linebacker 작전은 I, II 로 나누기도 하는데, 다음회에 자세히 설명할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Rolling Thunder 작전만 살펴보도록 하지요.

남베트남에 미 공군 병력이 최초로 파견된 것은 1961년이었습니다. 주로 베트콩과의 게릴라전을 지원하고자 T-28 이나 B-26 같은 구식 기체 약간과 FAC 요원들이 보내졌지요. 애초 본격 개입할 생각이 없었던 미국도 1963년 말에 가서는 남베트남 정세가 악화일로를 걷자 군사고문단(Military Advisors) 파견에 적극 나서면서 그 숫자도 괄목할 만큼 늘어나게 됩니다.

1964년에 접어들자 Vietcong 의 게릴라전이 대규모로 전개되고 북베트남 정규군까지 남베트남으로 내려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미 정보당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4년 한 해 동안 12,500 명의 베트콩과 북베트남 정규군이 Ho Chi Minh Trail 을 통해 북베트남 훈련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다시 같은 루트로 남베트남으로 잠입했다는 내용까지 있었지요.

물론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베트남을 군사력으로 붕괴시키고 민주화된 통일정부를 베트남 전역에 수립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분단 상태의 고착으로 끝난 것처럼 남베트남/북베트남 이렇게 전쟁 없이 조용해진 상태를 최선의 목표로 정한 거지요.

존슨 대통령의 보좌관들과 합참의 장성들은 북베트남이 작은 나라이며 빈약한 산업기반과 오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피폐해 있고 Hanoi 측의 남베트남 게릴라들에 대한 지원도 경제적 출혈을 감수하면서 어렵사리 부담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산업시설과 도로, 철도, 사회간접자본 등을 폭격하여 전쟁수행 능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Hanoi 지도부의 전쟁 의지를 꺾어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서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작전을 검토하기에 이르지요.

그리고 1964년 8월 2일, 이른바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이 터집니다. 이 사건은 Tonkin 만을 초계중이던 미 구축함 Maddox 호, Turner Joy 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로(이 사건도 베트남전이 끝나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지만), 이후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군사개입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지요. 산발적인 군사 보복 조처와는 별도로 미 합참(Joint Chiefs)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계획하고 구체적인 폭격 목표물 - 모두 94 개의 목표물 리스트- 을 선정하게 됩니다.

마침내 1965년 3월 2일, 104 대의 미공군 전투기, 폭격기와 28 대의 남베트남 공군기기 참가하여 DMZ 북방 35 마일에 위치한 Xom Bang, Quang Khe 의 탄약 저장시설(ammunition depot)을 폭격함으로서 3년 하고도 9개월에 걸친 Rolling Thunder 작전이 막을 열게 됩니다.

Rolling Thunder 작전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작전 기간 - 3년 9개월.
작전 개시일 - 1965년 3월 2일
작전 변경일 - 1968년 3월 31일 (폭격지역을 북위 20 도선 이하로 제한)
작전 종료일 - 1968년 11월 1일
출격 회수 - 총 1 백만 쏘티.
폭탄 투하량 - 75 만톤.

롤링 썬더 작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봅시다. 아래 설명할 Wild Weasel I 팀이 SAM 사이트 파괴 작전을 수함에 있어서 독립적인 작전 보다는 이 롤링 썬더 작전의 일환으로 Strike 편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많이 맡았던 이유도 있지만, 아울러 세계 항공전 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의외의 결과가 도출된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Roling Thunder 작전은 전적으로 미 공군이 밀어 붙인 계획으로, 1965년에 Curtis Lemay 의 뒤를 이어 공군참모총장이 된 John P McConnell 대장이 “28일이면 94 개의 목표물을 모두 격파할 수 있다”고 장담한 작전이었습니다. (미 합참은 3 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 또한 해군은 항속거리 문제 등으로 DMZ 인근 지역의 제한적인 작전을 선호)

미 공군이 내세운 Rolling Thunder 작전의 3 대 목표를 보자면 아래와 같지요.

(1) Strategic Persuation (전략적 설득)
- Hanoi 지도부가 남베트남 게릴라들을 지원하는 것을 포기토록 유도함. 그러한 지원을 계속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킴.

(2) Raising the Morale (사기 진작)
- 남베트남 정치인과 군인, 국민에게 미국의 군사력 과시와 함께 적극 개입을 알려 사기 진작효과를 거둠.

(3) Interdiction (후방차단)
- 유일한 실질적, 전술적 목표. 북베트남의 군사 및 산업시설, 사회 간접 자본 등을 공격 전쟁수행능력을 약화시킴.

제목만 봐도 계획은 거창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전해 오지요. 폭격 작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1) 과 (2) 목표는 별 효과가 없슴이 금방 입증되고, 목표는 (3) 하나로 집중되게 되지요. 그렇다고 (3) 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롤링 썬더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 중에는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각종 저작물과 인터뷰를 통해서 이 작전을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롤링 썬더 작전이요? 웃기는 작전이에요. 합참이 선정한 94 개의 리스트를 차례로 공격한다면서, 가장 중요한 1순위 목표부터 공격하는 게 아니라 끝 순위부터 위로 공격을 하더라고.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

실제로 94번째 목표물부터 위로 공격해 들어가지는 않았지요. 허나 그렇다고 (전쟁의 상식 중 상식처럼) 우선순위 1 번 목표물부터 차례로 공격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했느냐. 로또 자동번호 뽑듯이 무작위로(randomly)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은 “어디의 교량”, 내일은 “어디의 탄약 저장소” 이런 식으로.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 Lyndon B Johnson 대통령과 Robert S McNamara 국방장관이 엄명을 내린 “제한된 행위(Limited Action)"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1965년 작전이 시작될 당시, 폭격 금지(off-limits) 사항은 아래와 같았지요.

1) Hanoi 30 nautical mile 이내.
2) Haiphong 10 nautical mile 이내.
3) 중국 국경과 인접한 지역.
4) Factory & Power Plant. (공장 및 발전소)
5) Airfield. (비행장)

이러한 금지령은 군사적으로 명백한 넌센스입니다. 첫번째 공격목표가 되는 게 상식인 적의 비행장도 제외시켰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북베트남의 생명선인 하이퐁 항구까지 폭격대상에서 제외시켰지요. 하이퐁 항은 Richard M. Nixon 대통령 이 1972년 5월 기뢰부설 명령 때까지 그 기능을 유지했습니다. 애초 하이퐁 봉쇄를 강력 주장한 합참의 의견도 맥나마라 국방장관에 의해서 거부되었지요. 소련 선박에 폭탄이 떨어져서 행여나 3차 대전으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합니다.

금지 대상이 이렇게 많다보니 미 합참이 제시한 94의 목표물(최종적으로는 359개) 리스트는 중요도 순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지요. 가난한 농업 국가였던 베트남의 몇 안 되는 산업시설조차 하노이와 하이퐁에 몰려 있었으니까. 또한 하노이와 하이퐁 중심지를 폭격하지 못하다 보니, Hanoi doughnut 이니 Haiphong doughnut 이니 하는 유행어까지 생겼습니다. 가운데는 뻥 뚤린 도넛츠 처럼 폭격을 못하고 주변만 폭격이 집중 되서 특정지역 과열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러한 규제조항은 하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의 금지반경도 줄어들게 되지만, 애초에 롤링 썬더 작전 자체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비군사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되었는가를 반증하는 좋은 증거라 하겠습니다.

그런 측면은 Vietnam 전 실패의 전반적인 원인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Johnson 대통령이 국방, 국무 장관 그리고 보좌관과 합참, 각군 지휘부 장성들에게 남긴 아래의 메시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Our Goals in Vietnam were limited, and so were our actions. I wanted keep them that way."

“베트남전에 있어 우리의 목적은 제한적이며, 행동 또한 그렇다. 나는 그러한 사항이 준수되기를 원한다.”

존슨 대통령은 동부출신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가 남부 지역과 노년층 표를 의식하여 러닝 메니트로 지명했던 사람인데, 텍사스 토박이로 Southern populist 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던 정치인이었지요. 외교나 군사 분야에는 별다른 전문 지식이 없었던 관계로 주변 보좌진의 말에 많이 의존했는데, 노년의 신사들이 그렇듯,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끼어서 문제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보다는 오리지널 “중도”의 원칙만 강조했습니다. 결국 “전쟁을 한다, 그러나 제한적으로 한다” 이런 결론 밖에는 나올 게 없었지요.

합참과 공군은 베트남전에 대한 보다 많은 개입과 더불어 하이퐁항 봉쇄, 하노이 및 군사 산업시설에 대한 예외 없는 전면적인 공습을 주장하였고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Dean Rusk 와 국무성, 의회는 소련 및 중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우려하여 협상이나 제한적인 군사작전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국무성은 북베트남을 너무 누를 경우 소련의 반동 곧, 중동이나 베를린 등 소련이 원조 중인 국가를 동원하여 국지전을 전 세계로 확대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고 하지요.

어쨌든 그렇게 제한적으로 전쟁을 한다는 정치적 결정은,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작전에 나서는 군인들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런 결정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러한 전쟁에는 군사적 상식이 통하지가 않았던 거지요. 베트남전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나약한 의지의 정치인들(weak-willed politicians)"에 대한 군부의 비난은 롤링 썬더 작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겠습니다.


반면에 Rolling Thunder 작전의 결과를 놓고 미 공군 지휘부와 합참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는데, 어차피 군부가 모시는 민간인 지도자가 제한적인 전쟁을 결정했다면, 거기에 맞는 합리적인 군사적 솔류션을 제공했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지요.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이 남쪽 베트콩에 대한 북베트남의 원조를 차단하고, 하노이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은 미 공군 지휘부였고, 결국 작전이 진행되어도 그 같은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데 대한 책임도 역시 미 공군 지휘부가 져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베트남은 가난한 농업국가로 미국이 이전 전쟁에서 승리했던 독일이나 일본과는 너무도 다른 상대였습니다. Interdiction (후방차단)이라는 거창한 군사적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나라였지요. 파괴할 별반 산업시설도 없었고 철도나 교량을 파괴한다 해도 차단될 만한 물동량 자체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포장된 도로도 없었고 폭탄이 도로에 떨어지면, 인근 마을 사람 동원해서 흙으로 메우면 금방 복구가 되었습니다. 다리를 폭파해도 나룻배나 임시부교, 더 나아가서 자전거나 사람이 이동할 정도의 수중교로 만들어 위장하면 되었고 원유는 드럼통으로 정글에 분산시키면 되었으며 탄약과 무기는 소련과 중국의 원조, 그리고 가내 수공업으로 자체조달이 되었고, 의약품은 식물의 잎이나 뿌리로 대신했고, 남베트남으로의 물자 수송은 사람들이 등에 지거나 자전거에 싣고 수천 km 를 이동하면 그 뿐이었지요.

무엇보다 없이 살아오는데 익숙한 사람들인 베트남인들은, 그들의 군대나 전술도 없이 싸우는데 철저하게 적응시켰습니다. 베트콩들은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의 장비나 탄약을 훔치거나 또는 부패한 관리를 매수하여 구매하거나 또는 암시장에서 많은 양을 자체 조달하였고, 북베트남 군대도 최소한의 보급으로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훈련되어 있었지요. 결국 미국이나 서방국가의 병참 시스템 같은 것이 불필요한 군대였습니다.

북 베트남의 전쟁 영웅인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 국방장관은 병참 수요를 최소화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하루 100 톤 정도의 보급품으로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전투력이 유지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루 100 톤, 2톤 트럭 50 대 분량은 미국 같으면 1개 연대 전투단 정도가 사용할 수준으로 공중 폭격으로 차단하기에는 너무도 적은 양이지요. 한 마디로 병참선 차단을 위한 공중폭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북베트남 지도부의 확고한 전쟁의지를 과소평가한 잘못, 독일이나 일본을 꺾었던 전술이라면 베트남 정도는 당연히 제압된다는 잘못된 논리, 상대가 전혀 다른 데도 과거의 전쟁교훈을 무리하게 적용시킨 과오, Curtis Lemay 장군이하 미 공군 지휘부의 strategic bombing 에 대한 맹신이 Rolling Thunder 작전을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받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Rolling Thunder 작전 종료 1개월 전인 1968년 10월에 다음과 같은 평가도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단순 비교하자면 10 배 밑진 장사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이지요.

“롤링 썬더 작전으로 인한 북베트남의 군사 산업 시설 손실액은 6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나 미 공군 및 해군 해병 조종사 800 명 이상이 전사 또는 생포되었고 990 대에 달하는 손실된 항공기를 모두 새 기체로 대체하는데 드는 비용만 60 억 달러로 추산된다.”

(Book Source : Alain C. Enthoven and Wayne K. Smith - How Much Is Enough : Shaping the defense program 1961 - 1969)

(* 1968년 5월에는 미국과 북베트남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협상을 시작하고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1월에 폭격이 중단되었지요. 1968년 말 선거에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Vietnamization 정책이라고, 한때 50 만까지 증강되었던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무기를 대거 남베트남군에 이양하고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대로 폭격중단 후 북베트남은 파리 협상을 질질 끌면서 빠르게 시설을 복구하고 소련과 중국의 원조로 군사력을 키워서 대대적인 공세로 나오게 되지요.)

3. F-100 Super Sabre.

1. Wild Weasel 의 탄생.

Rolling Thunder 작전이 시작되고 4 개월 쯤 지난 1965년 7월 24일, 북 베트남 Hanoi 서북방 55 마일 지점에서 MIGCAP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15th TFW 소속 F-4C 팬텀 4 대에 EB-66C 전자전기로부터 긴급 교신이 날아옵니다. 이 항공기는 Jamming 도 하지만 주로 전자정보 수집(ELINT) 임무를 수행했는데, 교신 내용은 Fan Song 레이다 신호가 포착되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잠시 후 3 발의 SA-2 미사일이 편대를 향해 발사되었고 2 발은 편대 후방에서 폭발했지만 남은 한 발이 유효반경 범위에서 폭발하여 1대의 팬텀기가 추락하고 3 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요. 미 공군 역사상 U-2 와 같은 정찰기가 아닌 전투용 기체의 최초 손실로 기록됩니다.

Rolling Thunder 작전이 시작될 때만 해도 북베트남의 방공전력은 아주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약간의 Mig-15 와 Mig-17 그리고 레이더 혹은 육안으로 조준하는 구식 대공포가 전부였는데, 롤링 썬더 작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지요.

소련의 북베트남 원조가 대폭 증가합니다. SA-2 지대공 미사일과 MIG-21 을 지원하고 23mm 37mm 등, 많은 수의 각종 대공포를 북베트남으로 보냈지요. 소련의 기술자와 군사고문단은 기본적인 무기의 조작법 교육 외에 구체적인 활용 전술까지 교육시켰는데 대공포의 경우 화망을 구성하는 요령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도 일일이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1965년 4월 5일, 미공군 정찰기들이 Hanoi 와 Haiphong 근처에서 몇몇 공사현장을 촬영하고 돌아왔는데, 정보분석팀의 분석결과, 독특한 Star Formation 의 형태로 SA-2 SAM 사이트를 공사 중인 것으로 판명되었지요. 이들 사이트는 7월 초부터 작전태세에 들어갔고 1965년 말까지 60 개의 사이트가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

미 합참은 SA-2 사이트 건설 중(가동 전)에 폭격하자고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이를 거부합니다. 하노이 주변에만 있어서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고, 또 소련 기술자들이 있을지 모르는데 폭격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전쟁이 세계 도처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고 합니다.

결국 SA-2 사이트 가동전 폭격은 실패하고 팬텀 격추 3일 후인 1965년 7월 27일 46 대의 F-105D Thunderchief 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습이 SAM 사이트에 대해 행해집니다. 이날부터 11월 27일까지 4개월간, 8 개의 SAM 사이트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지만 3 대의 F-105 와 2대의 F-8, 2 대의 F-4, 1대의 A-4 를 상실하고 더 많은 기체들이 손상을 입게 되지요.

미 공군은 SAM 의 위협을 분석하고 대처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K C Dempster 준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를 긴급히 구성하게 됩니다. 8월 3일에는 Task Force 팀이 구성되어 Hunter 임무(SAM 사이트 위치 파악)를 하는 새로운 항공기를 도입하여 기존 항공기와 Hunter - Killer 팀을 구성, 적의 SAM 사이트를 격파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정하지요.

Dempster 준장이 이끄는 task force 팀은 Bedix 사와 ATI(Applied Technology INC) 등 다른 여러 전자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몇 가지 장비를 기존 전술기에 장착키로 하고 F-100F Super Sabre 를 대상 기체로 선택합니다.

바로 이 프로젝트 이름이 바로 오늘날까지 SAM 제압부대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Wild Weasel” 이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야생 족제비”란 뜻이지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애초 이름은 "Project Ferret" 이었다고 합니다. Ferret은 유럽에서 토끼 사냥에 이용되던 하얀 족제비를 가리킵니다. 헌대 Ferret 이 이미 2 차 대전 때 존재했던 프로젝트 이름이었음을 알고 Mongoose 로 바꿀까 고민도 하다가 최종적으로 Weasel (족제비)로 귀착이 되었지요.
족제비란 동물은 영리하고 날쌔면서도 겁이 없는 동물이라, “적 SAM site 를 찾아 Weaseling 을 해라(먹이감을 찾는 족제비처럼 행동해라)” 하는 바램에서 정했다고 합니다. F-100F 이후에도 여러 기종에 걸쳐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F-100F 를 이용한 최초 계획을 Wild Weasel 1 이라고 부릅니다.

2. F-100F Pathfinder Aircraft.

사실 Bendix 사는 1965년 초에 벌써 Radar Homing And Warning System (RHAW)을 F-100 Super Sabre 기에 장착하자고 미 공군에 제안서를 냈었는데, 불과 몇 달 앞을 내다보지 못한 미 공군은 그런 시스템은 필요 없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도 있었지요.

New Mexico 주의 Cannon 공군기지에서 비행시간이 얼마 안 된 4대의 F-100F 전투기가 California Inglewood 로 보내졌습니다. (F-100F 는 총 10 대가 개조됨). 이들 기체에는 아래와 같은 장비들이 새로 장착되었지요. 개조 비용은 (당시 가치로) 1 대당 10 만불 정도였다고 합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첫 번째 기체의 테스트가 California Edwards 공군기지에서 실시됨과 동시에 2,3,4 번 기체의 인스톨도 함께 시행되었는데. 전 기체가 완성된 후 모두 Florida 의 Eglin 공군기지로 이동되었습니다. 1965년 9월 4일 40명의 지상 지원요원들과 민간인 기술자들이 합류하였고, 곧 이 항공기에 탑승할 승무원 선발에 들어갑니다.

3. Suicide Mission.

조종사들은 기존의 F-100 계열기의 조종사 중 기량이 뛰어난 Pilot 을 선발했고 EWO(Electronic Warfare officer)는 SAC 소속 B-52 나 TAC 소속 EB-66 기종에서 전자전 장비를 운용하던 사람 중에서 선발되었지요.

선발된 사람 전원은 지원자(volunteer) 들로 모두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자원했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선발된 Pilot 이었던 Al Lamb 의 회고를 옮겨봅니다. (영어 원문이 긴 관계로 아래 따로 첨부하였으니, 필요한 분은 참고 바랍니다).

“Charlie Joseph 대령님이 어떤 임무가 있는데 한 번 지원해보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헌대 그게 어떤 임무인지는 말을 안 해주더군요. 내가 와일드 위젤 팀에 합류하게 된 이유였지요. 대령님은 Myrtle Beach 공군기지의 Tactical Air Command Coordinator 였는데, 내가 그곳에 머물렀던 1965년 9월 15일에 함께 점심을 하자더니 어떤 일이 있다면서 내게 지원을 한 번 해보라고 했어요. 나는 대령님이 일본 Misawa 기지에 근무했던 걸 알았기 때문에 ‘예스’라고 했습니다. 대령님은 나에게 Florida 주 Eglin 공군기지의 30 일 임시근무허가서를 내밀었고 결국 내가 베트남으로 끌려간 계기가 되었지요.” (Text 1)

당시 Florida 의 Eglin 공군기지에는 미 공군 전술 항공전 센터(Tactical Air Warfare Center) 가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 커티스 르메이 공군 참모총장이 참관한 가운데 미 공군 화력 시범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던 곳이지요. 이곳에서 Wild Weasel 1 승무원들의 훈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위 글을 보면 Al Lamb 은 (잔머리 좀 써서) 일본 미사와 기지로 가서 좀 편하게 지내보자고 "Yes" 라고 대답을 한 듯합니다. 분명한 건 전혀 어떤 임무인지 모르고 상관의 권유에 의해서 그냥 자원서류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지요. 그렇게 해서 모두 10 명의 승무원이 선발되었습니다.

Pilot 5 명 (계급은 captain 대위)
Maurice Fricke, George Kerr, Al Lamb, Leslie Lindenmuth, John Pitchford

EWO 5 명 (계급은 captain 대위)
Jack Donovan, Walt Lifsey, Donald Madden, Ed Sandelius, Robert Trier.
(Ed White 대위, Bob Schwartz 소령은 얼마 후에 합류)

나중에 자신들의 임무가 적의 SAM 사이트를 격파하는 일이라는 설명을 듣고서 모두들 불평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건 Suicide mission (자살 임무)라면서. 그러나 지원을 철회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성실하게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훈련은 1965년 10월 11일부터 Garry Williard 소령의 주관 아래 시작되었는데, 2 명이 짝을 지어 한 팀을 구성하다 보니 생각치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졌다고 합니다. 우선 조종사들은 순수한 비행기량만 익힌 사람들로 전자전이나 전자장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였고, 반대로 EWO 들은 모두 SAC 소속 폭격기나 TAC 소속의 EB-66 같은 편하고 안락한 대형 기체의 승무원 출신이라 좁은 조종석의 단발 전투기는 처음 탑승해보았고 더구나 높은 G 의 고기동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했었지요.

처음엔 장비 설명과 작동 원리를 교육받고 그 다음부터는 실제 비행기를 타고 Eglin 공군기지에 있는 SADS 라는 특별 시설을 통해 소련 레이다(특히 Fan Song)의 주파수, 신호특성 등을 익히며 각종 전술을 학습합니다. SADS 는 Soviet Air Defense Simulator 의 약자로, 원래 Eglin 기지의 beacon 레이더였는데, 특별히 소련 레이더의 주파수에 맞게 재조정되어 장비된 시설이었지요. Wild Weasel 훈련 중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이 훈련이 실시될 때는 Eglin 기지의 모든 다른 활동이 일시 정지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훈련 방식은 기지 근방을 선회하다 SADS site 의 레이더 신호를 EWO 가 포착하면 조종사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조종사는 그 방향으로 비행해서 육안으로 시설을 확인한 다음 통상적인 기관포/로켓/폭탄 투하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기체를 Pull Up 해서 반대방행에서 다시 공격 하는 훈련도 실시되었지요. 애초 훈련예정기간은 30일 이었는데, 6일이 늘어나서 모두 36일간 훈련을 받게 됩니다.

4. Wild Weasel 1-A.

사안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Wild Weasel 1 팀이 F-100F 기체를 가지고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F-105D Thunderchief 일인승 전투기를 플랫폼으로 하는 또 다른 기체 개조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Wild Weasel 1-A 라고 합니다.

같은 Bendix 사의 RHAW 장비도 장착되었고, AZ/EL System이라고 해서 1인승 승무원의 SA(상황인식)을 위해서 CRT 대신에 (오늘날의 HUD 처럼 시선을 전방에 둘 수 있도록), Optical Gun Sight 에 위협이 되는 레이더의 방향을 투영해주는 새로운 장비도 장착하였지요.

그러나 1인승 전투기에 대한 여러 실험은 끝내 실패로 끝났고, 대신 확실한 교훈을 하나 얻었는데, Wild Weasel 기체는 절대적으로 2인승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지요. 조종사는 기체를 조종하면서 전방시야를 확보하고 SAM 사이트나 날아오는 미사일을 육안으로 확인해야 하고, 뒷좌석의 EWO 는 각종 전자장비를 항상 모니터링 해야만 한다는 거지요.

결국 Wild Weasel 1-A 계획은 중단되었고 대신 복좌형 기체인 F-105F Thunderchief 를 개조하는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Wild Weasel 2 입니다. 이 얘기는 다음번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5. Operation Iron Hand.

모두 1,000 시간의 훈련비행을 마친 다음인 1965년 11월 21일, 4 대의 F-100F Wild Weasel 은 Eglin 공군기지를 떠나서 Thailand 의 Korat 공군기지로 출발합니다. 임무 자체가 워낙 극비여서 무선 교신 주파수도 전용 주파수로 하고 전용 공중급유기도 함께 동행하였지요. 하와이와 괌, 필리핀의 Clark 비행장을 거쳐 1965년 11월 25일, 태국 Korat 공군기지에 착륙합니다.

지상 지원요원과 (장비를 설치한) 업체의 민간인 기술자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Korat 기지에서 실전 작전 능력을 획득할 때 까지 걸린 시간은 첫 기체의 개조가 시작된 날로부터 불과 84일 만이었습니다. 군산복합체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으로 미 공군과 이를 지원하는 방산업체의 대처가 대단히 빨랐지요.

공식적으로는 태평양공군(PACAF) 휘하 6234 TFW(Wild Weasel Detachment) 소속이었지만, 작전 통제는 388 TFW로부터 받았습니다. 11월 28일 북베트남이 가까운 태국 국경 근처에서 오리엔테이션 실시하였는데, 이륙해서 공중급유 받고 (참고로 미 공군 조종사들은 공중급유를 hit the tanker 라고 함), 국경을 따라 비행하면서, 원거리에서도 신호를 포착할 수 있는 공군 EB-66 전자전기의 유도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발생하는 각종 레이더 신호를 모니터링하는 훈련을 합니다.

오리엔테이션 결과 Vector Sytem 과 IR-133 system 은 잘 작동하였는데,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인 WR-300 LWR 은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되어 공격받기 전에는 확인이 불가능한 문제도 있었지요. (허나 실전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작동). 모든 항공기와 승무원들은 최소한 한 번 이상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1965년 12월 3일 첫 실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Rolling Thunder 작전이 가장 상위 작전이라면 그 밑에는 여러 하부 작전들이 함께 진행되었는데, “Operation Iron Hand” 는 SAM 사이트 제압 작전의 미 해공군 공통 작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SAM 사이트 제압을 뜻하는 용어로 “Wild Weasel” 과 함께 “Iron Hand” 도 자주 사용되지요.

미 공군의 경우 보통 F-100F 와일드 위젤기 1 대가 F-105D Thunderchief 1인승 기체 1 개 편대(4대)를 선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요. 또 가끔씩 RF-101 정찰기(후에 RF-4C 로 대체)가 함께 비행하여 폭격 전과 후의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였지요. 무장 내용만 정리해보면,

(1) F-100F 무장
LAU-3 24발 로켓 캐니스터(Canister) 2 Set
355 갤런 drop tank 2
20 mm 기관포(full loaded)

(2) F-105D 무장. (기관포, 로켓, 폭탄 등 다양한 지상공격 무기로 무장했지만, 보통은)
LAU-3 24발 로켓 캐니스터(Canister) 4 Set
20mm 발칸포 (full loaded)

Smoke(발연기능)이 있는 F-100F 의 로켓은 그냥 표적을 표시하는 용도이고 killing 은 F-105D 가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로켓이 화력이 좋기 때문에 표적을 연막으로 표시함과 동시에 SAM 사이트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되지요. 그 다음엔 뒤 따르던 F-105D 가 마무리를 하여 SAM 진지를 완파하는 과정이 작전의 내용입니다.

로켓은 화력은 좋으나 탄도성이 떨어져서 명중률은 낮았다고 합니다. 반면 20 mm 기관포는 탄도성도 좋고 탑재 탄수도 많아 대단히 효과적인 화력이었는데, 탱크 같은 장갑차량이 아닌 SAM 사이트의 목표물(미사일과 통제용 VAN 차량)은 몇 발만 맞아도 폭발을 일으켰다고 하지요. (당시에는 없었지만 반년 정도 후인 1966년 5월경부터는 최초의 ARM인 AGM-45 Shrike 미사일을 F-100F 에 탑재, 사용하기 시작).

12월 20일 까지 하루에 2 쏘티씩 출격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위험한 임무를 증명이나 하듯이 와일드 위젤 팀 최초의 피해가 기록됩니다. Hanoi 서북방 30 마일 지점의 Kep 비행장을 공습하는 임무였는데, F-100F 와일드 위즐 2대와 F-105D 20 대(F-105D 는 Strike 편대 포함)가 참가한 작전이었습니다.

John Pitchfold & Bob Trier +12 대
Bob Schwartz & Jack Donovan + 8 대

이 작전에서 John Pitchfold & Bob Trier 탑승기가 격추되어 최초의 손실 및 전사자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Kep 상공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당시 상황은 조종사 Pitchfold 의 회고로 대신합니다.

“Trier 가 Fan Song 레이더 시그널과 대공포의 사통 레이더 시그널을 포착해냈다. 우리가 뭘 해야 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커다란 충격이 온몸에 전해졌고 계기판의 화재경고등이 미친 듯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Apple 1! 우리가 맞은 거 같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Radar 근처에 로켓을 발사하고 180 도 턴하여 그 지옥 같은 곳으로부터 빠져나왔다.” (Text 2)

(SA-2 SAM 진지 주변에는 기관포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통. Apple 1 은 call signal, 피격된 기체는 불길에 휩싸인 채 날아가고 있었고)

“해안으로부터 40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속도는 450 마일을 유지했다. 유압장치만이라도 조금만 더 버텨준다면.... . Trier 가 해드셋을 통해 말을 건내왔다. [John! 나를 Korat 까지만 데려가라구! 그려면 자네가 사달라는 맥주 다 사줄께!]” (Text 3)

Trier 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비행기는 곧 통제 불능이 되어 추락했고 둘은 비상 탈출을 하였는데 John Pitchfold 는 곧바로 북베트남군에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John 과 수백 미터 떨어져 착지한 Trier 는 항복을 하지 않고 도망치려다 쫓아온 북베트남군에 사살되었습니다. 월남전 기간 동안 적진에 남겨진 조종사가 구조될 확률은 6명 중 1명 꼴 이었다고 합니다. 6명 중 5명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는 얘기지요.

Pitchfold 는 하노이 힐튼(미군들이 Hanoi Hilton 이라고 불렀던 포로수용소)에 7년 여 간 수감되어 있다가 1973년에야 석방되었고 Trier 의 유해는 1982년 11월 미국 유해발굴단에 의해 발굴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1 대 손실 이후, 와일드 위즐팀은 전술(Tactics)을 바꿉니다. Terrain Masking 이라는 전술인데, Fan Song 레이더에 탐지될 확률을 낮추기 위해 낮은 고로도 내려가서 지형 뒤로 숨거나 아니면 지형을 뒤로 깔면서 비행하는 전술이지요. 당시의 Fan Song 레이다는 지형 난반사를 filtering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목표물 탐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6. First SAM site kill.

1965년 12월 22일 Al Lamb & Jack Donovan 이 탄 F-100F 기는 북베트남 Hanoi 서북쪽 75 마일 떨어진 (Red River 가 지나는) Yen Bai 근처의 Rail Yard(철도 하치장)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4 대의 F-105D 를 이끌고 출격합니다. 이 둘은 그날 와일즈 위즐 팀 최초의 SAM site kill 기록하게 되지요.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둘의 회고를 그냥 인용합니다.

Jack Donovan (Text 4)
- 우리는 Laos 상공에서 공중급유를 하고 북베트남을 향해 똑바로 비행해갔다. F-105 기들은 우리의 뒤쪽과 아래쪽에 2 대씩 짝 지어서 비행했다. 국경을 넘자마자 Vector 시스템이 Fan Song 레이다 신호를 포착했다. 우린 북베트남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Lamb 은 지형을 이용하여 우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기체를 하강시켰고 속도도 높혔다. 언덕을 오르내릴 때 마다 Fan Song 신호가 잡혔다 끊어졌다를 반복했다. [12 시 방향!] [2시 방향!]

5분정도 그렇게 비행을 하고 나서 홍강(Red River) 근처의 길게 펼쳐진 낮은 계곡에 다다랐다. Vecter 스코우프엔 2 1/2 원형 strobe 가 표시되어 있었다. Fan Song 레이다가 Hi PRF 상태란 의미로 곧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Lock on 했다는 뜻이다. Lamb 이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망할 놈의 신호가 계속 발신된다면, 손톱으로 놈들의 엉덩이에 십자 표시를 해주겠다!]

우리와 Fan Song 레이더 사이에는 기다란 언덕이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 Lamb 은 기체를 상승시키는 대신에 언덕 뒤로 숨어서 길게 선회하면서 접근했다. 우리가 언덕을 다 돌았을 때 Vector 스코프에는 링 3 개가 번쩍거렸다. 그러나 6시 방향이었다. [6시 방향! 6시 방향!] 내가 소리쳤다. Lamb 은 300 피트에서 1300 피트로 기체를 �구치면서 SAM 사이트를 육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과 논, 들판 이외에는 아무것 도 없었다. Oops! 그 순간 우리 오른쪽에서 2 번째 Fan Song 레이더 신호가 잡혔고 알맞은 거리에서 우리를 조준중인 대공포의 사통 레이더 신호도 잡혔다. Vector 스코우프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 처럼 보였다.

(Lamb 은 마을을 보다 좋은 각도에서 보기 위해 2500 feet 로 기체를 끌어올렸고 바로 SAM 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Al Lamb (Text 5)
- 마을을 지나면서 기체를 75 도 기울여서 살펴보니, 마을 중앙의 초가집 옆에 주차된 Fan Song 레이더 콘트롤 VAN 차량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을 및 주변 배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를 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었다. 계속 선회하면서 초가집 지붕을 엮고 그 밑에 숨이 있는 VAN 차량을 향해 로켓을 조준했다. [I've got it! I've got it! Spruce!] (Spruce 는 편대 Call Sign, Lamb 이 탄 기체는 Spruce 5) 기체를 약간 들어 올리면서 양쪽 캐니스터의 로켓을 모두 발사했다. 북베트남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고, 로켓은 거리가 짧아서 명중하지 못했지만 다시 기관포를 조준하고 Site 를 향해 발사했다.

* Jack Donovan (Text 6)
- 로켓은 짧아서 명중되지 못했지만, 20 mm 기관포탄은 미사일에 정확히 명중하여 폭발시켜 버렸다. F-105 편대가 연기를 발견하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Spuce 1 번기의 로켓 역시 짧아서 명중되지 못했지만 20 mm 기관포탄은 콘트롤 VAN 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Spuce 2 번기의 로켓은 Fan Song 레이더 차량에 명중하여 레이더를 하늘로 날려 보냈고 Spuce 3 번기는 침착하게 한 번에 한 캐니스터씩 조준하여 발사, 런처 위에 올려져 있는 SA-2 미사일들을 명중시켰다. 마지막으로 Spuce 4 번기는 로켓을 마을 구석구석에 뿌렸다.

편대는 손실 없이 Korat 기지로 귀환했고 곧 합참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보내졌다고 합니다.

- “Wild Weasel sighted SAM, Destroyed same!"

임무는 대성공이었는데, 나중에 F-105 기를 보내 확인한 결과 레이더와 콘트롤 VAN,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Site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슴이 밝혀졌지요. Al Lamb 과 Jack Donovan 은 공식적으로 와일드 위즐 부대의 SAM 사이트 첫 번째 kill 을 기록한 것을 인정받았고 Distinguished Flying Cross 훈장이 수여 되었습니다.

Wild Weasel 1 팀은 Texas Instrument (TI) 사제 AGM-45 Shrike ARM (이 미사일도 해군이 개발을 주도)을 1966년 3월 말 지급받았고 4월 18일부터 실전에 투입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Hard Kill 과 Soft Kill (적의 레이다 가동 중단)을 모두 수행할 수 있게 되었지요. 임무 성공률은 더욱 높아집니다. 당시엔 SAM 사이트를 완전히 파괴하든 아니면 Radar 작동을 중단시키든 그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Srike 편대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결과는 같았으니까.

손실된 3 대도 새로운 F-100F 기체로 보충을 받았는데, 1 대는 앞서 말한 Pitchfold/Trier 의 58-1231 기체, 1966년 3월 13일 훈련 중 상실한 58-1221 기체, 그리고 3월 23일 대공포에 의해 격추된 58-1212 기체(Clyde Dawson/Donald Clark, 막 전입되어 온 신참들로 모두 전사)가 모두 대체되었지요.

(1966년 1월 8일, Dempster 준장과 참모들은 성능이 보다 뛰어난 F-105F Thunderchief 복좌기를 새로운 기체로 선정하는데 바로 Wild Weasel 2 입니다. WW I-2 승무원(D형) 들을 F-105F 로 전환하여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지요. 다음번 글에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F-105F 와일드 위즐 기체는 1966년 5월 28일 최초 도착했지만, F-100F 기체는 7월 11일까지 임무수행을 계속합니다. 약 8개월간 작전한 와일드 위즐 I 팀은 전사 3 명, 포로 1명의 인명피해와 50 % 가까운 손실율을 기록하여 이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었지만, 9 개의 SAM site 를 완파하여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Wild Weasel 1 이야기를 마치면서, 미 공군의 대응이 아주 빨랐다는 점은 우선 평가해줄만 합니다. 새로운 기체로의 개조나 대응 전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는데 지체됨이 없었지요. 또한 불과 몇 달 만에 팀을 꾸려서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던 과정에는 군과 산업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또한 큰 몫을 했습니다. 대단하고 복잡한 장비는 아니지만, SA-2 를 잡는데 필요한 3 대 시스템 역시 실용적이고 전술 적합성이 높았던 데다 빠르게 실용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평가해줄만 하지요.

Rolling Thunder 작전 기간 중 Hanoi 에 출격한 40 대 중 1 대꼴로 귀환을 하지 못했지만, SA-2 를 상대하는 요령을 터득하면서 그로 인한 손실은 빠르게 줄어듭니다. 1965년에는 SA-2 13 발 당 1대가 격추되었지만, 1966년에는 SA-2 33 발 당 1 대 꼴로 격추율이 크게 떨어졌지요.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도 와일드 위즐 팀이 기여한 공로가 컸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SEAD 임무에 있어서 미 공군과 해군의 차이점을 좀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설명을 했지만,

Wild Weasel - 미 공군의 Project code name
Iron Hand - 미 공군/해군 공통의 (베트남전 실제 작전) SAM killing Operation Code name.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의 기록이나 다큐멘터리의 증언을 보면, 해군 해병 항공대의 pilot 들은 결코 “Wild Weasel” 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Iron Hand” 란 용어를 쓰지요. 다시 말해 와일드 위즐은 미 공군만 쓰는 용어입니다.

아울러 해군은 Jamming 과 같은 Soft Kill 작전도 선호하지만, 미공군은 SAM 사이트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와일드 위즐의 목적을 둡니다. 다시 말해 철저한 Hard Kill 이지요. 몇 년전 EA-6B 기체를 대체하는 솔루션의 미해공군 공통적용 문제를 놓고 미 공군 지휘부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해군은 항공기나 장비 같은 Hardware 만 관심 있지, 정작 중요한 SAM Kill 전술 개발에는 무관심하다” 고 비꼰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