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4부 애인있어요. 3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맑은 눈망울이 아젤리아 꽃봉오리에서 반짝인다. 햇살이 아젤리아 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꽃잎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초겨울인데 어쩌자고 꽃대를 밀어 올렸느냐고 나무라는 듯 바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봄소식이 왁자하게 깔리면 어김없이 아젤리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 봉긋 거리던 몽우리가 자줏빛 입술을 열어, 가지마다 주먹만 한 겹꽃이 다투어 핀다. 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넉넉해진다. 일 년 치 토정비결에 좋은 소식만 받아들고 온 것 같은 설렘이 있다. 피고 지고 머무는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짧게 느껴져 아쉬움 을 더한다. 우리 집에 온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나무는 단독주택에 살 때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우아하게 봄소식을 전해주던 전령사였다. ..

결핍의 방

결핍의 방 그곳에는 외로움이 삽니다.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일상을 멈추고 그 방으로 들어갑니다. 고요함 속에서 외로움을 즐기려고 합니다. 한때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방에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 방에는 말 없는 말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인생의 중반을 넘기면서 나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은 결핍이 결핍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실에 맞는 맞춤형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가기도 합니다. 반대로 풍요로움이라는 말이 맞서고 있습니다. 정보, 말, 물질의 풍요로움이지요. 넘침이 주는 장애입니다. 채우기에 바쁜 사회를 보면서 결핍의 방에 응크린 나를 돌아봅니다. 배움에 대한 갈증과 내세울..

푸른 너울

*푸른 너울 서로 품고 있다. 아파트는 바다를, 바다는 아파트를. 품 는다는 건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 수줍은 듯 해무에 가려진 바다는 수평선의 황홀함을 은근히 과시한다. 누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을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어찌 이렇게 큰 품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내 공간, 내 취향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드라마 같은 특별한 조화로움이다. 부산 해운대 시누이의 아파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아파트와 바다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을 맞추며 서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품을 펼치며 무언가를 썼다 지우 느라 쉴 틈이 없는 바다. 진정한 사랑은 말보다 더 뜨거운 진실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바다는 하늘의 감정을 실시간 전송하겠다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