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1부 종이밥상 10

하루의 표정

*하루의 표정 하루가 도착했다. 허용된 시간은 오늘뿐. 눈을 떴을 때 는 이미 꿈속에서 5시간쯤 소진된 상태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24시간을 장전한 채 나를 이끌고 간다. 생명의 탄생처럼 반기지 않고 호들갑스럽게 기뻐하지도 않는데 소리 없이 내게 온다. 바쁘게 때로는 천천히 어떤 표정을 만들어갈지 생각이 많다. 그 행간에는 감정이 출렁 인다. 차 별과 편견이 없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의 옷을 입 힌다. 거스를 수 없어 간절함을 남기지만 게으름과 태만을 몰라 성실한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늘 새로운 하루 앞에 예민해진다. 나와 유기적으 행복한하루 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하루를 잘 보낸다는 것은 순 간순간들이 원만하게 흘러간다는 증거다. 그 하루 앞에 놓 인 시간을 세심하게 감정을 차별..

종이밥상

*종이 밥상 새벽이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잘 차려진 밥상을 기다린 다. 면면마다 특색 있는 재료로 차려진 상. 어제의 소란스 러운재료들이 부록처럼 첨가되어 있다. 몇 겹으로 접혀 있 어도 가벼워서 한 손으로 들 수 있다. 밤사이 느슨해진 시 선을 바로잡으며 네모의 표정에 숨겨진 얇거나 두꺼운 의 미를 찾아 나선다. 이 밥상을 혼자 차지하고 각가지 음식 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시간은 행복하다. 미처 아물지 않 은 아픔과 상처가 그대로 묻어 있는 재료와 교양 있는 새 로운 지식이 첨부된 열여덟 겹의 상이다. 밥상 안의 메뉴에는 밝고 어두운 재료와 싱싱하지 않은 부패된 재료가 섞여 있기도 해 섭취하고 나면 가슴이 답답 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한쪽 귀퉁이에 짠지 같 은 삶의 아우성이 지글거리는 메뉴도..

바닥이 시킨 일이다.

*바닥이 시킨 일이다. 바닥이 넌지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편안하게 주저앉 아도 될 만큼 내 마음자리는 안온하다. 가만히 있어도 멀 미처럼 다가오던 바닥이 그때의 내 체온을 기억이나 할까. 오래전 일이다. 아픔이라는 물살에 밀려 바닥에 부려졌 다. 나는 거기까진 닿고 싶지 않았는데,더 나아가고 싶었 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병마가 바닥과 한통속이 되라고 떠 밀지만,우린 서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마음은 딴 곳 에 두고 그를 침대 삼아 하루하루를 견뎠다. 지겹지도 않은지 바닥은 나를 송두리째 가지고 놀았다. 뒤척일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받아주었지만,판가 름 날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포기와 좌절이 온몸을 감쌌다. 바닥과의 줄다리기는 ..

*풍경소리

*풍경소리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낯익은 소리가 발목을 잡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선다. 2층은 식당이고 1층은 갤러리 형식을 갖춘 작은 미술관이다. 작가들의 작품과 함 께 꼼꼼한 설명이 있어서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복잡 한 도심 속에 이런 볼거리가 있다는 게 참 반갑다. 갤러리 앞 항아리와 나무 화기에는 야생화와 자잘한 꽃들이 옹기 종기 모여 웃고 있다. 가끔 마음이 복잡하거나 울적할 때 찾아간다. 어김 없이 풍경 소리가 달려와 반긴다. 시원스러운 물줄기처럼 가슴 에 스며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한꺼번에 사 라진다. 먼지 한 가닥도 말끔하게 씻어준다. 가득히 차오르는 청량함에 이끄려 기분마저 가벼워진다. 풍경 소리는 마치 먼 데서 온 편지 같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 보 ..

아버지의 손을 읽다.

*아버지의 손을 읽다. 삶은 아버지 손에서 몸을 키웠다. 때때로 색을 바꾸면 어르고 달래느라 아버지 두 손은 상처투성이다. 입구와 출 구를 변경하며 바람을 일으켜야 했던 가장의 생활. 엇박자 에 맞서 때로는 윽박지르고 구박도 했으리라. 조곤조곤 달 래도 보고 협상 제의도 했을 것이다. 충직한 손으로 과수 원 흙밭에 쓴 고단함을 확인하기 위해 새벽을 가르시던 아 버지. 그래서 흙은 아버지의 왼손과 오른손이 필요했다. 일 찌감치 험난한 삶에 익숙해진 손가락에는 마디마다 고단 한 세월이 새겨졌다. 팔십 평생 가시밭길 같은 생을 헤쳐 오느라 남몰래 눈물도 닦아냈을 것이다. 캄캄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지 곁을 지킨 두 손. 너덜너덜한 삶을 깁고 돌아보며 살피고 또 살피느라 지문은 얼마나 많은 결을 지웠을까...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첫사랑처럼 다가오는 섬. 임자도와 처음 만났을 때의 실망감과 감동은 아직도 나를 웃음 짓게 한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게 스며드는 섬에 대한 그리움. 찬바람이 불면 맥을 못 추는 뱀처럼 일상이 나른해지면 몸 안에서 출렁이는 파 도 소리를 듣는다. 시퍼런 바다가 파도의 허연 속살을 껴 안고 소녀처럼 뒹구는 꿈을 꾼다. 승진과 함께 남편의 발령지로 따라 나섰던 임자도 바닷 길. 이삿날 그 바다는 낯선 이방인에게 쉽게 길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파도가 높았다. 짐을 실은 차가 모래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떡가루같이 고운 모래가 어떻게 저런 힘을 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오래 다니던 길이 아니 라는 이유로 우리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했던 바다. 몇 번 을 다시 시도 했지만,자동차는..

이모의 향기

*이모의 향기 상서로운 향기가 가득하다.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집 안 가득 화원처럼 꽃을 가꾸시던 이모가 엄마를통해 꽃을 좋 아하는 내게 보내준 천리향이다. 천리향은 해마다 베란다에서 제일 먼저 꽃과 향기를 선 물한다. 장소가 여의치 않아 몇 번은 실내에 둔 적이 있는 데 한겨울에 꽃을 피워 망령든 꽃이라 부른 적도 있다. 올 해는 정확히 삼월 중순에 집 안 가득 향기로 반겨주니 더 욱 이모 생각이 난다. ​ 천리향이 필 무렵이었다. 이모의 입원 소식을 듣고 병 원을 찾은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이모의 생을 예감했다. 복수가 차고 곡기를 끊은 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고 했 다. 그러다 좋아져서 퇴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모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건 아닐까. 한 가닥 희망을 품었었는 데… . 이모의 재입원..

별난 휴가

*별난 휴가 21산부인과 병실에 입원했다. 병실은 밤늦도록 산모들의 산통이 이어진다. 이른 새벽, 한 생명이 태어나자 산모는 고통을 잊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가족들은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보 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의사는 산모에게 잘 견뎌줘 고맙 다 하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하 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는 눈부시다. 새 생명을 안고 기쁨과 환희로 고통은 순식간에 지워진다. 어떤 고통은 기 쁨으로 어떤 고통은 슬픔과 절망이 될 수 있는 증거다. 생 과사의 극적인 갈림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은근히 시작되는 통증이 외출을 막았다. 한기와 고열이 번갈아 가며 변덕을 부렸다. 뭔가 무거운 것이 배를 짓누르는 느낌이..

무조건 써

*무조건 써 나는 ‘키우다’라는 동사를 좋아한다. 삶은 간단하지 않아 가끔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온전하 지 않은 날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야 할 때가 종종 찾아온다. 떨칠 수 없는 고통의 유효기간 이 길어질 때 ‘키우다’에 기대어 견디기도 한다. 예기치 않은 복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마다 감 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슬픔이나 아픔은 때때로 모든 생활을 지배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해 아찔한 감정은 엉망이 되어버려 한참을 어 루만져야 할 때도 있다. 감정의 흐름을 잠시 천천히 하며 마음길을 따라 흘러갈 때 글을 쓴다. 가끔 슬픔과 마주할 때 길목을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던져 놓는다. 마음껏 슬퍼..

책을 내며 ㅡ "안녕, 낮선 사람"

I 책을 내며 I 갈대는 푸르른 기쁨의 시절을 모르고 새싹으로 솟아오 르면서 바로 풍화를 시작한다고 한다. 곤충을 부르지 않고 봄꽃처럼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의 일상 또 한 자랑스럽거나 빛나지 않고 넘치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바람과 더불어 피고 지는 갈대처럼 내 글쓰기도 수시로 불어닥친 바람에 리듬을 놓친 적이 많다. 삶의 길목에서 만 난작은 생의 조각들,아무리 뒤엎고 다듬어도 부족하기만 해 섣불리 내놓겠다는 마음이 서지 않았다. 빗장을 걸고 있 는 망설임을 달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삶이란 이름으로 끼어든 오르막과 내리막을 풍화시켜 나만의 색을 입혀 보았다. 그래서 결핍의 구멍을 메우느라 애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 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앞으로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