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의 향기
상서로운 향기가 가득하다.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집 안
가득 화원처럼 꽃을 가꾸시던 이모가 엄마를통해 꽃을 좋
아하는 내게 보내준 천리향이다.
천리향은 해마다 베란다에서 제일 먼저 꽃과 향기를 선
물한다. 장소가 여의치 않아 몇 번은 실내에 둔 적이 있는
데 한겨울에 꽃을 피워 망령든 꽃이라 부른 적도 있다. 올
해는 정확히 삼월 중순에 집 안 가득 향기로 반겨주니 더
욱 이모 생각이 난다.
천리향이 필 무렵이었다. 이모의 입원 소식을 듣고 병
원을 찾은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이모의 생을 예감했다.
복수가 차고 곡기를 끊은 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고 했
다. 그러다 좋아져서 퇴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모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건 아닐까. 한 가닥 희망을 품었었는
데…
. 이모의 재입원은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한순
간인들 어찌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마흔을 바라
보는 짝 없는 두 딸을 두고 눈 감을 수 있을지 생각만 해
도 가슴이 답답해 온다.
“저 자식들 어쩌면 좋겠냐? 하지 만 이것도 다 자기들 운명이겄지.
” 또랑또랑하던 말씨가
흐려지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던 이모. 저것들 때문에 드
러내 놓고 아파하지도 못했다는 이모는 사촌 동생들이 눈
에 밟혔을 것이다. 좀처럼 울지 않던 이모가 이번에는 의
사에게 “아들 올 때까지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단다. 언젠
가 한 번은 가야 할 길,조금 먼저 갈 뿐이라고,스스로 자
신을 위로하던 이모.
체중이 10kg이나 줄었다. 배는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다리는 통통 부어서 누르면 올라오지 않는다. 주름투성이
입가에 소리 없이 열린 미소는 슬픔이었다. 씩씩하고 밝던
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나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다.” 살면서 울컥 먹고 싶었던 음식,
아까워서 미뤘던 것,맵고 짜고 시원하고 얼큰한 음식들,모두 이모가 마지
막으로 그리워한 것들이었다. 이젠 먹고 싶은 것 먹고, 준
비하라는 의사의 말,그 말밖에 해줄 수 없었던 의사의 심
정은 어땠을까. 의사도,가족도 환자가 하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이승의 마지막을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생떼 같은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지병이 있던 이모부를
평생 간호하며 살다가 2년 전 이모부를 먼저 보내셨다. 그
뒤 암 발병 사실을 알고 이모부에 대해 이모는 ‘복 많은 사
람’이라고 했다. 직장암 수술 후 전이된 간 수술까지 덤덤
하게 받아내던 이모가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치료의 고통
을 호소했다. 까맣게 변해가는 손톱과 발톱을 보면서 진짜
암을 앓고 있는 환자구나! 느껴졌다. 매사에 긍정적이며 밝
은 이모였다. 스물두 살의 늦둥이 아들 앞으로 몇 가지 재
산을 넘기면서 발길마다 묻었을 회한으로 얼마나 질척였
을까. 가끔 보는 이모는 걱정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걱
정과 근심을 품고 사신 셈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사람들은 백 년 살기를 꿈꾸지
만,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죽음엔 순서가 없어 이모의 나
이 예순하나,할 일이 태산 같다는 이모에게 죽음이 먼저
손을 내민 걸까. 이모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
는 또 다른 생의 길목이 두렵다. 그 길은 함께할수 없어 안
타까움이 더 크다. 우리는 눈물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모
를 보내드릴 준비를 하지만 이모는 피눈물을 감추고 계시
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생이란 참으로 화려했
던 순간을 접는꽃의 마지막모습이지 않을까. 한순간의 화
려함을 위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버무려 한 송이 꽃이 되는
건 아닌지. 화려함 속에 가려진 아픔이나 고통,기쁨과 행
복 당당했던 순간들이 때를 알고 날개를 접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부질없음을 느끼게 하는 생의 시간이 다녀간다.
이모가 보낸 천리향은 줄기는 곧게 서고 가지가 많이 갈
라지며 잎은 어긋나고 타원 모양의 바소꼴이다. 바깥쪽은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이며 안쪽은 흰색을 띠고 있다. 무성
했던 꽃잎을 거두면서 까맣게 변색한 모습으로 수그린 채
떨어지던 꽃처럼,어느 날 이모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이모
의 향기와 흡사한 꽃. 누구에게나 한 생에서 가장 화려하
고 찬란한 순간이 있었으리라. 그 기간이 얼마간이 었는지
그만큼의 화려함에 가려진 그늘진 시간 또한 이모의 생이
었으리라.
열흘을 견디지 못하고 지는 꽃이지만 피어 있는 시간만
큼은 최선을 다해 향기를 머물게 하고 아름다움을 쁨낸다.
이모는 가고 안 계시지만 해마다 가장 진한 향에 취하게
하고 꽃을 피워 봄이 오고 있다고 알려준다. 조카들에게까
지 환희와 기쁨 주고 부지 런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까지 일깨워주고 가신 이모. 사촌 동생들도 열심히 살다간
엄마의 향기로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천리향은 꽃을 지우고 새순을 밀어 올려 건강했을 때의
이모를 떠올리게 한다. 잘 자란 천리향을 볼 때마다,물을
줄 때마다,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상서로운 일들만
생길 거라는 이모의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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