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1부 종이밥상

별난 휴가

21c-park 2023. 12. 17. 11:31

 

*별난 휴가

21산부인과 병실에 입원했다. 병실은 밤늦도록 산모들의

산통이 이어진다. 이른 새벽, 한 생명이 태어나자 산모는

고통을 잊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가족들은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보

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의사는 산모에게 잘 견뎌줘 고맙

다 하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하

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는 눈부시다. 새 생명을 안고

기쁨과 환희로 고통은 순식간에 지워진다. 어떤 고통은 기

쁨으로 어떤 고통은 슬픔과 절망이 될 수 있는 증거다. 생

과사의 극적인 갈림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은근히 시작되는 통증이

외출을 막았다. 한기와 고열이 번갈아 가며 변덕을 부렸다.

뭔가 무거운 것이 배를 짓누르는 느낌이 다른 날과 달라 진통제를

몇 번씩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외출을 서두르는 작은아이를 붙잡았다. 혼자 남는 게 두렵고

겁이 났다. 아들은 내게 병원에 갈 것을 권했지만 미루다

보니 오후가 훌쩍 넘어갔다. 진통제라도 맞겠다고 준비하는데 당직이었던

남편이 들어선다. 앉을 틈도 없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오래전부터 입원하려던 산부인과에 접수하고 담당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혹이 보통 사람의 여덟 배의 크기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생활이 어려웠을 텐데 잘 버텼다.”

라고 의사는 칭찬인지 꾸지람인지 의아해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아픔에 대한 응

징이라도 하듯, 그 순간 소나기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입원에 빈 병실이 없어 산부인과 병동으로

오게 되었다.

주사 한 방에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편안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잠이 쏟아진다. 수술에 대한 검사가 진행

되고 통증이 사라진 고요한 시간.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열린다. 시간에 맞춰 아침밥이 배달되고, 내

가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이어진다. 나만을 위한 시

간이 꿈결 같다. 숨 가쁘게 달려온 길들이 다투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진다. 순탄치 않아 늘 수런거렸던 길이 울퉁

불퉁 눈을 맞춘다. 의사와 간호사의 회진만 끼어들지 않는

다면 혼자만 누리는 호사다.

오롯이 내 안부만 챙겨주는 전화가 반갑고 달려와 주는

지인들의 발길이 고맙다. 궁금해 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목

소리가 곁에 머무는 관심이 낯설지만 싫지 않다. 이기적이

고 타산적인 내 속의 나를 만나면서 당연하다는 지론을 거

두기 싫어진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맞는지 행복이 느껴지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빡빡한 숨 막히는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실감

이 안 난다. 집에 있는 책들이 한 권 한 권 문병을 온다.

차분한 마음으로 책과 은밀한 시간을 갖는다. 행복하다.

미뤄두고 읽지 못했던 책을 호명해가며 전해 받을 수 있어서

좋다. 고분고분 다 들어주는 남편의 모습이 생경하지만 싫

지 않다. 접어두었던 독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어 기쁘다.

책이 있는 하루는 지루하지 않다. 책과의 은밀한 새벽

은 마치 비싼 돈을 지급하고 산 소중한 보석같이 반짝인

다. 새벽 상큼한 공기가 목을 길게 늘이고 기다리고 있다.

놀란 휴게실! 일찍 깨어난 나의 이 특별한 휴가를 자기 일

처럼 기배해 주는 것 같다. 순간을 함께 즐긴다. 천하를 얻

은 듯 날아갈 것 같다. 책은 나무의 숨소리까지 아낌없이

전해준다.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 이는 하

루가 짧다. 혼자가 아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일

들을 색다른 방법으로 제시하고 결론을 내려준다. 유쾌하고

통쾌한 즐김이며 자유다.

그렇게 나의 황홀한 휴가가 시작되었다. 눈이 즐거우니

귀가 기쁘고 마음에는 여유와 행복으로 그득하다. 특별한

선물은 당분간 직진이다. 모두가 내 걱정에 귀를 모으고,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애써준다. 뭐

가 부족한지 물어주는 안부가 따뜻하고 푸근하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니 이렇게 홀가분

한 것을. 오랜만에 아픔이 나에게 안겨준 별난 휴가며 선

물이다. 군식구들이 떠나고 난 뒤 난 이렇게 혹독하게 15

일간의 휴가를 병원에서 보냈다. 허무와 공허함이 종종

밀려오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자궁근종은 나의 완벽하고자 하는 성격이 빚어낸 몸의

아우성이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 내지 않는 주인에 대

한 채찍이자 호소였다. 아픔과 고통의 시간은 내게 아주 특

별한 휴가를 만들어 주었다. 아픔으로 변장하고 찾아온 여

유. 방해자 없이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되어 주었던 병실

은 아직도 내 안에서 휴가 중이다.

검사가 끝나고 600g이나 되는 혹은 수술을 거쳐 제거

되었다. 지인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하는 예방 효과를 톡톡

히 한 채 신나는 휴가는 막을 내렸다. 몰라보게 가벼워진

몸은 다시 생활에 활기를 찾아 움직여준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휴가였다. 혼자 떠나고 싶었던 휴가에 대한

갈증은 그렇게 해소되었다. 아직 남겨진 욕구가 꿈틀대기

도 하지만 그때처럼 황홀한 휴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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