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2부 주인 없는 방 12

안녕, 낮선 사람

*안녕, 낮선 사람 ‘안녕,낯선 사람’ 참으로 독특한 이름에 이끌렸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눈으로 마음을 움직 이게 하는 카페 이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듯 편안하게 와서 느껴보라는 은밀함이 전해진다. 친밀하게 다가오는 인사가 싫지 않다. 집에서 꽤 거리가 있지만,꼭 가봐야겠다고 며칠을 벼 르다 집을 나섰다. 길 찾기에 소질이 없는 내가 어스름 무 렵에 도착했다. 어렵게 “안녕,낯선 사람” 드디어 만났다. 이름처럼 사람에게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연인 과 또는 친구와 같이 와서 느긋하게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 습이 편안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조급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살핀 뒤 천천히 키위 주스를 시켰다. 카 페 분위기를 ..

지워진다는 것은

*지워진다는 것은 핸드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삭제했다. 미움도 경계의 대상도 아닌 이름을 지운다는 게 하나의 의식처럼 간단해 서 슬프다. 평소에 다정하게 늘 보고파 그리워했던 사람은 아니지만,가끔 쓸쓸하고 외로운 바람 한 줄기 긋고 가는 계절풍 같은 사람이 었다. 남편의 친구인 그는 꿈을 먹고 사는 만년 소년이었다. 책,영화,술,여행이 전부였던 그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고 허전하고 쓸쓸할 땐 영화나 여행으로 빈 가슴을 채웠다. 가 까운 곳에 살면서도 삶의 무게가 다른 그는 자주 찾던 우리 집도 어느 날부터 멀리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자주들러 놀아주기도 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이들 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던 친구에게 남편은 유독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

가족사진

*가족사진 피 향이 빗소리에 스며든다. 사부작사부작 작은 리듬 이 차분함을 더해준다. 비의 가락과 향기가 섞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들어 올린다. 커피를 마시다 식탁 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올려다 본다. 세 남자와 한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부탁할 말이 라도 있는 듯 어색한 표정의 가족사진. 얼마나 벼르고 별 러 찍었던 사진이 었던가. 사관생도인 큰아이는 주말이어 야 하고 대학생인 작은아이는 목표를 찾느라 틈을 주지 않 았다. 진급 공부에 몰입된 남편은 언제나 부재중. 아주 특 별한 날만 가족에게 반짝 내주는 시간은 늘 허기처럼 고프 기만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어지러운 집 안을 쓸고 닦으 며 가족의 품위 유지에 힘을 벤다. 네 사람이 각자 어렵게 깜을 내서 찍은 사진은 우리 집 보물이 되었다. 가족사진..

주인 없는 방

*주인 없는 방 방 청소를 하기 위해 문을 연다. 가지런히 정돈된 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막이 반긴다. 주인 없는 방에 무단 침 입한 먼지를 뒤집어쓴 시간을 닦는다. 이 방의 주인이 떠 난 지 벌써 3주째다. 국방의무를 하기 위해 떠난 아들. 가 는 날까지도 크게 걱정 한번 들어보지 못한 아들은 서운했 는지 자꾸만 날을 헤아리곤 했다. ‘잘 해낼 수 있어요.’라고 말은 해도 입대할 날이 다가오자 걱정스러운 모습이 역력 했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게 은근히 서운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걱정 안 돼?” 가끔 의중을 묻던 녀석의 섭섭해하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걸레를 든 손에 힘이 보태진다. 매일 빈방을 청소한다. 주인은 자리를 비웠지만,아들은 금방이라도 돌아와 “엄마” 하고 부르며 들어설 ..

나의 눈에게

*나의 눈에게 안녕,내 사랑하는 눈! 시간이 흘러도 빛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해준 나의 눈에게 처음으로 마음 깊이 인사를 해본다. 나의 세상을 넓 혀주느라 더불어 힘들었을 눈아! 너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힘이며 위로였단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 한한용기로 버티게 해준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 었지. 겉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늙어가지만,오직 너를 향 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단다. 책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 만나 세상에 대해 진정한 눈 을 뜨게 해주고,컴퓨터 속 지혜의 바다를 건너며 세상 유 일의 특별함을 알게해 주었지. 4차혁명 시대를 함께 타면 서 가장 먼저 네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어. 감기몸살 을 앓으면서도 종일 책임량을 거뜬히 처리하게 도와주고 어깨가 백근하도록 견딤을..

꿈꾸는 아지트

*꿈꾸는 아지트 머리가 복잡할 때 구석방에 오래 머문다. 넋 놓고 멍하 니 지친 몸을 놓으면 품속에 꼬옥 안긴 듯 편안하다. 몇 날 며칠 게으름을 부려도 잔소리 없이 지켜봐 주는 곳.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나만의 색깔이 필요할 때 구석 방의 힘을 빌린다. 가끔 그곳에 널브러진 자신과 마주할 때 가 있다. 구석구석 물건으로 가득차 있지만 아늑하고 편안 한 모습으로 그윽하게 눈을 맞춰 준다. 많은 말을 쏟아내도 무릎을 낮추고 온몸으로 경청해 준다. 삶에 지쳐 돌아누우 면 새로운 온기를 채워주고,혼돈으로 방황하고 고독이나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의지를 안겨준다.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을 발효시키기 좋은 온도를 가지 고 있다. 복잡한 생각이 종횡무진 질주해도 행간이 짧아 정 리하기 좋은 곳이다. 묵언 수..

경청하는 소나무

*경청하는 소나무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보며 문득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졌다. ‘경청하는 소나무’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듯 자분하게 기운 허 리가 다소곳하다. 금방 숙인 게 아닌 긴 세월 동안 조금씩 공손하게 몸을 낮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기울어짐이 염 려되어 나무기둥으로 지팡이를 쥐여 준 사람은 누굴까. 마 치 연로하신 어른을 지극하게 모시고 가는 든든한 어깨가 연상된다. 가슴 한쪽에 싸한 울림이 지나간다. 모진 풍파 를 겪으면서 익힌 깨달음이 숨어있는 자세다. 땅을 향한 것 도 아닌 누군가의 말을 듣기 위해 자세를 바꾼 겸허한 배 려가 느껴진다. 그 큰 몸체를 지탱하자니 도움 없이는 버틸 수 없었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햇살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고 달려드는 거센 태풍과 사나운..

이름 값

*이름 값 ‘정열’ 예쁘지도 여성스럽지도 않다. 어떤 사람은 이름에서 건 강함과 열정이 느껴진다고 하지만 나는 마뜩잖았다. 얼굴 과 어울리는 이름,이미지와 잘 맞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정열이란 이름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 으며 살았다. 어떤 이름이 나와 어울릴까? 곧을 정 매울열은 곧고 매운 사내아이처럼 되라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있었다. ‘정 순’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르던 이름이다. 중학교 에 들어가면서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평상시 이름과 다르 게 등록되어 있었다. 손자를 기다린 할아버지께서 결정하 신 이름이라고 하니 첫 손자를 무척이나 기대하셨던 할아 버지의 바람이 느껴진다. 남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다음 에 남..

말 못

*말 못 이사를 하고 못 박을 자리를 탐색한다. 되도록 같은 곳 을 활용하려는데 쉽지 않다. 새로운 곳을 찾아 못질을 시작 해본다. 한 번에 박히지 않고 못이 자꾸 튕겨 나간다. 몇 군 데 흠집을 내고 나서야 겨우 못이 자리를 잡는다. 적당한 깊이로 박힌 못을 흔들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 는다. 단단히 자리 잡은 모양이다. 곳곳에 못을 박고 액자 도 걸고 시계를 걸어둔다. 하지만 이사 가고 없는 옛 주인 의 못 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상상 만해볼 뿐이다. 20년 전,형제끼리 새로운 계를 만들고 계원을 채우기 위해 옛 동료였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결혼 전 나와 함 께 근무하던 직장 동료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린 서로 그 다름을 인정해 주는 편이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이 달라졌 ..

처음

*처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 었다. 서류가 필요하고 심사를 통 한 결정이 통보된다. 새로운 것의 처음은 망망대해처럼 아 득하다. 두근두근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떨림인지 설렘인 지 모를 수상한 걸음이 아슴아슴 다가온다. 한 번도 가보 지 않은 길을 걸어보는 일이라고 생소한 목소리의 울림이 너무 크다. 관계가 형성되자 기다렸다는 듯 팽팽한 긴장이 밀고 당기기 시작한다. 호기심이 달려오고 걱정이 밤낮없 이 따라 다닌다. 부풀어진 두려움이 만삭이다. 첫날. 처음 만나 마주치는 사람과 일,알 수 없는 분위 기,모두가 낯설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샐까 봐 옷깃을 여 며본다. 대책 없이 마른침만 삼키게 된다. 무조건 부딪혀 야 한다고 등을 떠미는 처음은 막무가내다. 거침이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올라가야 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