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
피 향이 빗소리에 스며든다. 사부작사부작 작은 리듬
이 차분함을 더해준다. 비의 가락과 향기가 섞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들어 올린다.
커피를 마시다 식탁 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올려다
본다. 세 남자와 한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부탁할 말이
라도 있는 듯 어색한 표정의 가족사진. 얼마나 벼르고 별
러 찍었던 사진이 었던가. 사관생도인 큰아이는 주말이어
야 하고 대학생인 작은아이는 목표를 찾느라 틈을 주지 않
았다. 진급 공부에 몰입된 남편은 언제나 부재중. 아주 특
별한 날만 가족에게 반짝 내주는 시간은 늘 허기처럼 고프
기만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어지러운 집 안을 쓸고 닦으
며 가족의 품위 유지에 힘을 벤다. 네 사람이 각자 어렵게
깜을 내서 찍은 사진은 우리 집 보물이 되었다.
가족사진은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다. 자주 누군가
의 빈자리가 생기면서 사진은 그 자리를 대신해 준다. 어
쩌다 색다른 반찬을 해놓고 네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빠
지면 으레 사진을 보며 “미안해.”라고 함께하지 못하는 아
쉬움을 달랜다.
아이들이 어릴 적 “우리 아빠는부재중” 언제나바쁜 업
무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빠를 향한 아이들의
불만은 일기장 속에 등지를 틀었다. 당혹스러워 어떻게 설
명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던 내 모습 또한 아린 기억이
다. 바쁜 업무와 공부를 병행하던 그는 늘 우리 세 식구에
게 기다림이며 그리움이었다. 여름마다 휴가 떠나는 이웃
을 바라보며 부러움만 안겨주던 가장이 었다. 언제쯤 우리
는 휴가를 떠나볼 수 있을까. 휴가는 세 모자의 가슴에 바
람으로만 꿈틀거 렸다.
아이들이 크면서 또 한 사람씩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한
다. 가족이지만 각자 맡은 소임 때문에 함께하기가 여간 어
려운 게 아니다. 네 식구가 오롯이 앉아 밥 한 끼 먹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 기다림의 연속이다. 커다란 가족
사진이 식탁 위에 걸린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가족
이라야 네 식구밖에 안 되지만 가족사진 한번 찍는 데 몇
년을 기다렸다.
요즘은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어렵다. 아이들
이 자라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족사진을 벽에 걸어 놓
은 뒤부터 가족 중 누군가 자리를 비워도 사진이 빈 자리를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 년 전,사진관을 경영하는
남편 친구가 날짜를 잡아주어 시간을 맞추게 되었다. 시험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진이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함께 살면서도 사진 한장 찍는 게 어려워서였
을까. 그만큼 기대가 컸다. 드디어 사진이 나오던 날, 어디
에 걸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식탁 위에 걸기로 결정하고
흐뭇함과 기쁨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 자랐는지 두 아
들의 늠름한 모습. 어색하다 못해 굳어버린 그이와 나, 더
욱이 부자연스럽게 미소 띤 내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그
러나 이 가족사진으로 인해 이제는 ‘부재중’이라는 말을 쓰
지 않아도 된다. 제복 입은큰아이의 의젓한모습과 체구는
형보다 크지만 어린 티가 나는 꼭 닮은꼴을 한 작은아이와
남편. 세 부자가 한곳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 한 사람 자리
를 비워도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사진을 보며 가족에 대
한 그리움을 채우기도 한다.
이십오 년을 무탈하게 살아온 세월이 사진 속에 앉아
있다. 남편보다 경찰이란 직업을 더 사랑해야 살 수 있었
던 시간,돌이켜보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꼬맹이였
던 아이들이 자라우리의 키를훌쩍 넘긴 세월,아빠는 ‘부
재중’이라고 늘 투정 부리던 아이들의 말이 이젠 우리 부
부 몫이 되어 버렸다. 가끔 “너무 오래 살았다.”라고 생뚱
맞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와 나란히 산책을 한다. 불만을
쏟아놓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 갈 길을 찾아가느라 비우는
시간이 더 많아진 자리. 아침 식사 때마다 반백의 희끗희
끗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빈 의자를 곁에 두고 그와 함
께 식탁에 앉는다. 두 아들의 빈 자리는 사진으로 대신하
며 하는 식사다.
달리는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사진. 순간순간의 긴장이
있고 서로에게 기대어 힘이 되던 희생과사랑이 깃들어 있
다. 서툰 걸음으로 시간의 품을 엮은 세월의 둥지이다. 아
이들의 옹알이가 들리고,낡고 오래된 감정들이 굴곡지던
시간의 언덕배기가 뜨겁게 만져진다. 아빠와 자리를 바꾸
겠다며 아이들이 으름장 놓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 여 린 나
는꼼짝없이 승낙해야한다. 이렇게 세월 쌓기 놀이에 동행
해준 가족이다.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을 그림자 없는 그리
움이 쓰다듬고 있다.
엄마,아빠의 적막한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 든든하다. 가슴에 숭숭구멍이 생길 때마다 색다른 음
식을 먹을 때마다,사진은 때때로 찾아오는 허기를 조절해
준다. 어디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
이 전해지길 기도해본다. 녀석들의 얼굴에 번진 엷은 미소
가 오늘따라 꽃처럼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