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 28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꽃도 사춘기를 앓는다. 맑은 눈망울이 아젤리아 꽃봉오리에서 반짝인다. 햇살이 아젤리아 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꽃잎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초겨울인데 어쩌자고 꽃대를 밀어 올렸느냐고 나무라는 듯 바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봄소식이 왁자하게 깔리면 어김없이 아젤리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 봉긋 거리던 몽우리가 자줏빛 입술을 열어, 가지마다 주먹만 한 겹꽃이 다투어 핀다. 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넉넉해진다. 일 년 치 토정비결에 좋은 소식만 받아들고 온 것 같은 설렘이 있다. 피고 지고 머무는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짧게 느껴져 아쉬움 을 더한다. 우리 집에 온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나무는 단독주택에 살 때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우아하게 봄소식을 전해주던 전령사였다. ..

결핍의 방

결핍의 방 그곳에는 외로움이 삽니다.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일상을 멈추고 그 방으로 들어갑니다. 고요함 속에서 외로움을 즐기려고 합니다. 한때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방에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 방에는 말 없는 말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인생의 중반을 넘기면서 나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은 결핍이 결핍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실에 맞는 맞춤형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가기도 합니다. 반대로 풍요로움이라는 말이 맞서고 있습니다. 정보, 말, 물질의 풍요로움이지요. 넘침이 주는 장애입니다. 채우기에 바쁜 사회를 보면서 결핍의 방에 응크린 나를 돌아봅니다. 배움에 대한 갈증과 내세울..

푸른 너울

*푸른 너울 서로 품고 있다. 아파트는 바다를, 바다는 아파트를. 품 는다는 건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 수줍은 듯 해무에 가려진 바다는 수평선의 황홀함을 은근히 과시한다. 누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을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어찌 이렇게 큰 품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내 공간, 내 취향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드라마 같은 특별한 조화로움이다. 부산 해운대 시누이의 아파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아파트와 바다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을 맞추며 서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품을 펼치며 무언가를 썼다 지우 느라 쉴 틈이 없는 바다. 진정한 사랑은 말보다 더 뜨거운 진실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바다는 하늘의 감정을 실시간 전송하겠다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을..

위험을 모시다

*위험을 모시다 나긋나긋하게 감기기도 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날을 세우고 몸을 숨길 줄 아는 감정의 혀. 혀는 도끼다. 오늘도 그를 모시고 외출을 한다. 지인을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부드럽고 친절하다. 말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의 끈을 자연스 립게 이어주어 편안하다. 어떤 날은 팽팽한 긴장을주기도 하는데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상대가 누 군가에 따라 끈을 당기고 늦추기를 반복하는 도끼. 생각지 않은 말을 쏟아내고 돌아와 후회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함부로 말을 뱉지 않기 위해 감정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말이 좋아하는 것은 입. 혀는 생각이나 감정을 읽는데 촉을 세우고 있다가 혀를 굴려 뱉으면 소리로 전해진..

안녕, 낮선 사람

*안녕, 낮선 사람 ‘안녕,낯선 사람’ 참으로 독특한 이름에 이끌렸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눈으로 마음을 움직 이게 하는 카페 이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듯 편안하게 와서 느껴보라는 은밀함이 전해진다. 친밀하게 다가오는 인사가 싫지 않다. 집에서 꽤 거리가 있지만,꼭 가봐야겠다고 며칠을 벼 르다 집을 나섰다. 길 찾기에 소질이 없는 내가 어스름 무 렵에 도착했다. 어렵게 “안녕,낯선 사람” 드디어 만났다. 이름처럼 사람에게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연인 과 또는 친구와 같이 와서 느긋하게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 습이 편안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조급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살핀 뒤 천천히 키위 주스를 시켰다. 카 페 분위기를 ..

소소한 것에게 말 걸기

*소소한 것에게 말 걸기 나른함이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데 풋풋한 향이 손짓한 다. 냄새의 근원지를 따라 걸음을 옮겨본다. 허공을 타고 4 층까지 올라와 자극한 것은 풀과 잔디. 막 이발을 마친 잔 디는 오종종히 앉아 있는데 잘려나간 마디는 온몸의 푸른 향기를 들고 아파트를 돌아 나온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풀 향은 그리움을 끌어들인다. 이렇 게 시원스러운 향기를 몸속에 키우느라 키를 늘리지 못했 을까.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지키기 위해 키 작음을 탓하지 않고 온몸에 푸름을 채웠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만지다가 코에 대자 고향 집 동산이 걸어온다. 잔디는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5월에 다갈색의 수상화가 총상 꽃차례로 줄기 끝에 피고 열매는 영과를 맺 는다. 무덤,언덕,정원,재방..

손편지 이야기

*손편지 이야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5시 반. 집을 나서자 찬바람 이 옷깃을 파고든다. 달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으면서 가끔 불이 켜진 아파트를 바라본다. 몇 번의 신호등을 건너 도착 한 경의선 전철은 그날도 여지없이 빈자리가 없다. 잠이 덜 깬 사람들은 못다 이룬 잠을 청하기도 하고 열 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밀린 숙제를 하듯 소통하는 사 람도 눈에 띈다. 뜨개질하는 여인의 손이 매혹적이다. 화 장할 시간이 없었는지 젊은 아가씨는 부지런한 손놀림으 로 얼굴을 다듬고 있다.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 이 유난히 돋보이는 새벽이다. 오늘은 전철 안에서 2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용문에 있 는 탄약대대 두 번째 강좌로 군부대는 기 밀문제 때문에 컴 ​ 퓨터를 준비해야 한다. 대상에 따라 요즘 쟁점..

지워진다는 것은

*지워진다는 것은 핸드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삭제했다. 미움도 경계의 대상도 아닌 이름을 지운다는 게 하나의 의식처럼 간단해 서 슬프다. 평소에 다정하게 늘 보고파 그리워했던 사람은 아니지만,가끔 쓸쓸하고 외로운 바람 한 줄기 긋고 가는 계절풍 같은 사람이 었다. 남편의 친구인 그는 꿈을 먹고 사는 만년 소년이었다. 책,영화,술,여행이 전부였던 그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고 허전하고 쓸쓸할 땐 영화나 여행으로 빈 가슴을 채웠다. 가 까운 곳에 살면서도 삶의 무게가 다른 그는 자주 찾던 우리 집도 어느 날부터 멀리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자주들러 놀아주기도 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이들 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던 친구에게 남편은 유독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

가족사진

*가족사진 피 향이 빗소리에 스며든다. 사부작사부작 작은 리듬 이 차분함을 더해준다. 비의 가락과 향기가 섞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들어 올린다. 커피를 마시다 식탁 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올려다 본다. 세 남자와 한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부탁할 말이 라도 있는 듯 어색한 표정의 가족사진. 얼마나 벼르고 별 러 찍었던 사진이 었던가. 사관생도인 큰아이는 주말이어 야 하고 대학생인 작은아이는 목표를 찾느라 틈을 주지 않 았다. 진급 공부에 몰입된 남편은 언제나 부재중. 아주 특 별한 날만 가족에게 반짝 내주는 시간은 늘 허기처럼 고프 기만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어지러운 집 안을 쓸고 닦으 며 가족의 품위 유지에 힘을 벤다. 네 사람이 각자 어렵게 깜을 내서 찍은 사진은 우리 집 보물이 되었다. 가족사진..

주인 없는 방

*주인 없는 방 방 청소를 하기 위해 문을 연다. 가지런히 정돈된 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막이 반긴다. 주인 없는 방에 무단 침 입한 먼지를 뒤집어쓴 시간을 닦는다. 이 방의 주인이 떠 난 지 벌써 3주째다. 국방의무를 하기 위해 떠난 아들. 가 는 날까지도 크게 걱정 한번 들어보지 못한 아들은 서운했 는지 자꾸만 날을 헤아리곤 했다. ‘잘 해낼 수 있어요.’라고 말은 해도 입대할 날이 다가오자 걱정스러운 모습이 역력 했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게 은근히 서운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걱정 안 돼?” 가끔 의중을 묻던 녀석의 섭섭해하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걸레를 든 손에 힘이 보태진다. 매일 빈방을 청소한다. 주인은 자리를 비웠지만,아들은 금방이라도 돌아와 “엄마” 하고 부르며 들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