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2부 주인 없는 방

경청하는 소나무

21c-park 2023. 12. 18. 01:29

*경청하는 소나무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보며 문득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졌다.

경청하는 소나무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듯 자분하게 기운 허

리가 다소곳하다. 금방 숙인 게 아닌 긴 세월 동안 조금씩

공손하게 몸을 낮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기울어짐이 염

려되어 나무기둥으로 지팡이를 쥐여 준 사람은 누굴까.

치 연로하신 어른을 지극하게 모시고 가는 든든한 어깨가

연상된다. 가슴 한쪽에 싸한 울림이 지나간다. 모진 풍파

를 겪으면서 익힌 깨달음이 숨어있는 자세다. 땅을 향한 것

도 아닌 누군가의 말을 듣기 위해 자세를 바꾼 겸허한 배

려가 느껴진다.

 

그 큰 몸체를 지탱하자니 도움 없이는 버틸 수 없었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햇살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고 달려드는 거센 태풍과 사나운 폭우를 마주할 때마

다 조금씩 몸을 낮추었을 것이다.

여름과 가을을 잇는 바람이 지나면 흔들어 화답하고 자

연과 호톱하며 몸의 기울기를 조율했을 나무는 눈

람을 안정된 품으로 맞이했을 터.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귀

를 열고 자세를 낮추었을 게다. 그 모습에서 아름다운 경

청의 자세를 본다.

나는 경청이 주는 의미를 좋아한다. 소나무는 알고 있었

던 것일까. 말하는 상대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여 들어주는

. 눈을 맞추며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공감이라는 것을. 그런 자세로 자연스럽게 오가는 비

바람의 푸념도 조건 없이 들어주었을 것 같다.

경청은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말의 내용과

의도 상대방의 정신까지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불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서로의 관계를 이어

준다.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 내 말을 하기에 바쁘다.

10%만 말하고 90%를 들어주는 데 쓰라고 했다. 내가 가

진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어 말로 에너 지를 소진할 때가 얼

마나 많은가. 그것도 부족해 명령과 지시하기를 좋아한다.

강의를 하다 보면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 여

주며 맞아! 그래.” 하면서 추임새까지 넣어줄 때 신이

난다.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있구나!” 그런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면 교감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음 선이 닿

아있는 것 같아 행복하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순간의 생각

을 공유한다는 긍정의 표현이며 가장 부드러운 소통이다.

서로가 마음속에 들어오는 과정이며 좋은 관계로 이어지

는 인연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강연자에게는 에너지를 주

는 묘약이기도 하다.

자연의 순리대로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소나무

도 순응하는 법을 익히고 그 대상이 의미하는 것을 알기까

지 꽤 많은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다. 역행하거나 거스를 때

가지가 부러지거나 몸 일부를 내놓아야 하는 아픔을 피할

수 없었을 터.

말을 배우는 데는 몇 개월이면 되지만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평생을 소비해도 안 된다.”라는 아라비

아 속담이 떠오른다.

<제천 의림지>

소통의 전문가처럼 내 눈길을 잡고 한참을 머물게 했던

소나무. 스스럼없는 자세는 친절하기까지 하다. 마음이 흔

들리던 날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래 힘들었지 '라고

하며 마음을 읽어주던 속 깊은 친구처럼 반가웠다.

그리움은 마음으로 만지는 것. 지금도 답답한 발소리에

귀를 열어놓고 기다릴 나무. 제천 의림지에서 만난 소나무

한 그루가 마음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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