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2부 주인 없는 방

말 못

21c-park 2023. 12. 17. 20:45

*말 못

 

이사를 하고 못 박을 자리를 탐색한다. 되도록 같은 곳

을 활용하려는데 쉽지 않다. 새로운 곳을 찾아 못질을 시작

해본다. 한 번에 박히지 않고 못이 자꾸 튕겨 나간다. 몇 군

데 흠집을 내고 나서야 겨우 못이 자리를 잡는다.

적당한 깊이로 박힌 못을 흔들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

는다. 단단히 자리 잡은 모양이다. 곳곳에 못을 박고 액자

도 걸고 시계를 걸어둔다. 하지만 이사 가고 없는 옛 주인

의 못 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상상

만해볼 뿐이다.

 

20년 전형제끼리 새로운 계를 만들고 계원을 채우기

위해 옛 동료였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결혼 전 나와 함

께 근무하던 직장 동료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린 서로 그

다름을 인정해 주는 편이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이 달라졌

다 해도 서로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나도 그녀도 두 아

이의 엄마이고 남편의 직업이 공무원인 우리는 간단한 안

부로 그동안 궁금증을 풀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상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나는 억

척스러운 계주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계원이 될 것

을 청했다. 대뜸 그녀는 계가 끝날 때까지 절대 죽으면 안

.”라며 조건부 계약을 선언했다. 물음표를 던진 그녀의

말에 난 마침표로 확신을 주어야 했다. 그녀는 간편하지만

명료함을 택했고 난 견딤을 선택해야 했다.

죽음이라는 말이 빛의 속도로 다녀간 뒤대책 없이 가

슴이 두근거렸다. 갈 곳 없는 벼랑까지 밀린 기분이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더듬어 보았다. 무모한 도전은 하

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은 빡빡한 현실 앞에서 못이 되어

내게 파고들었다.

뻘 수도 다시 수정할 수도 없는 못이다. 말랑말랑하지만

만질 수 없고 형체가 없어 소리로만 존재한다. 이해의 폭과

공감 능력 이 필요해 같은 말도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

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녀의 농 같은 말은 뜨거운 숙제로 남겨졌다. 그녀가

계원이 되면 2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야 했

.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그녀와의 약속에 흠집을 남기

고 싶지 않았다.

 

말못에 걸린 난 한참 동안 많은 생각을 키웠다. 일탈을

꿈꾸는 시간이 다가와도 무심히 흘려보냈다. 그녀의 말못

에 언제까지 나를 걸어둘 수 없어 여러 번 계획을 수정하

기도 했다. 못 자국을 지우기 위해 욕망과 갈등도 훌훌 벗

어던졌다.

무사히 2년이란 계약이 끝났다.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사히 책임을

완수했다는 홀가분함으로 완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데 이게 웬일인가. 책임져야 할 어려움은 무사히 넘겼는데

가슴속 말못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부

정을 긍정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했는데 떠날 채

비를 하지 않고 가슴에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매일매일 아

파야 하는 자기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성장의 조

건이라도 되었는지 자국은 조금 헐거워져 있었다. 내 가슴

에 박혔던 못이 늘 긴장하며 살라는 경고였던 모양이다.

 

그녀의 한마디는 말과 행동을 조절하고 멈추게 하는 역

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지독한 삶이라도 쉽게 포기하거나

달아나려는 마음을 먹지 말라는 일침도 들어 있었다. 20

이 지난 지금도 따끔하다. 죽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은

내 속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죽음을 지우며 견뎠다.

나아감과 멈춤이 한몸처럼 닿아 있어 나아가다 숨이 차면

쉬 어가는 지혜도 찾아주었다.

지금도 그녀와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말

못에 걸렸던 그때가 떠올라 혼자 미소 짓게 된다. 그녀는

나의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나의 공간에 그녀의 언어가 살았던 지난 시간은 속도보

다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힘이었다. 풋감처럼 떫은 내 삶

을 새로운 활기로 채워준 친구의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뜻

밖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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