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1부 종이밥상

아버지의 손을 읽다.

21c-park 2023. 12. 17. 12:30

*아버지의 손을 읽다.

삶은 아버지 손에서 몸을 키웠다. 때때로 색을 바꾸면

어르고 달래느라 아버지 두 손은 상처투성이다. 입구와 출

구를 변경하며 바람을 일으켜야 했던 가장의 생활. 엇박자

에 맞서 때로는 윽박지르고 구박도 했으리라. 조곤조곤 달

래도 보고 협상 제의도 했을 것이다. 충직한 손으로 과수

원 흙밭에 쓴 고단함을 확인하기 위해 새벽을 가르시던 아

버지. 그래서 흙은 아버지의 왼손과 오른손이 필요했다.

찌감치 험난한 삶에 익숙해진 손가락에는 마디마다 고단

한 세월이 새겨졌다. 팔십 평생 가시밭길 같은 생을 헤쳐

오느라 남몰래 눈물도 닦아냈을 것이다.

캄캄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지 곁을 지킨 두 손.

너덜너덜한 삶을 깁고 돌아보며 살피고 또 살피느라

지문은 얼마나 많은 결을 지웠을까.

이제 휴식해도 괜찮을 연세지만 부부로 살면서 어머니

앞에서 비켜서기만 했던 미안함이나 고마움을 대신하고

싶은 아버지. 치매 걸린 어머니 곁에서 애처롭고 딱한 아내

를 위해 호미 같은 손으로 아침 밥상을 차리신다. 때맞추어

약 먹어야 한다고 소리 지르다 속상한 마음 꾹꾹 누르며 볼

품없는 손으로 약봉지 들이밀 때 가장 화를 낸다. 그러면서

도 애틋한 눈길 주고받으며 새로 연둣빛 사랑 하나 키운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어머니의 천

진한 치매 세월을 꼼꼼히 읽어가는 중이다. 어머니의

옆 지기인 아버지는 네 어머니 덕분에 늦게 호강한다.”

그렁그렁 눈물을 보이며 볼멘소리로 가슴을 열어 보인다. 그런

아버지의 손에는 부지런함이 산다.

부러지지 않기 위해 가끔 흔들리고 휘어지던 아버지의

손은 절반이 바람과 흙으로 채워졌다. 수시로 흙의 내력을

파고들던 호미처럼 눈뜨면 논과 과수밭을 오가며 흙과 함

께 살았다. 고단한 삶의 밭을 일구고 골병든 몸을 위로할

수 있는 것도 굽힐 줄 모르는 손 덕분이다.

날마다 여섯 자식이 요일별로 다녀가는 서울 생활

그 속에서 아버지는 행복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행복이 달아날까 봐 노심초사하시는 아버지. 빈 병 하나

도 쉬이 버리지 못해 늘 가지런히 성을 쌓듯 모아두신다.

과수원처럼 다시 사용될 날이 올까 잔뜩 기대를 품고 있

는 빈 병들.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는지 버릴 때마

다 미안함이 앞선다. 눈 뜨면 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던 일

감들은 보이지 않고 빈 용기들로 탑 쌓는 일이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우리 육 남매가 대신하겠다고 나섰지

여전히 고집불통인 손은 엄마의 속옷 빨래를 손수 해

놓기도 하신다.

여든여덟 상처투성이 아버지의 손. 캄캄하고 환했을 시

간을 어루만지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던 손이다. 바람의 흔

적이 역력하다. 딱딱한 노동의 계급장을 달고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삶을 막아내던 아버지의 손이제야 찬찬히 읽어

본다.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삶이 쉴 새 없이 부름을 청해

도 거절하지 못했던 세월. 아버지는 오늘도 고향 집 안부

가 궁금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 슬그머니 내려놓느라 헛기

침이 잦으시다.

뚝딱뚝딱 망치 소리로 시골집 베뜰어진 것들이 바로 서

고 너덜거리던 모서리가 환해지던 지난날은 늙을 줄 모른

. 밤이면 척추 휘는 소리를 틀어막고 궂은일에 앞장서려

고 갈고리 같은 손을 앞세웠을 것이다. 고인 것을 흘러가게

물꼬를 터주고흘러가는 것을 잠시 비끄러매는 것도 아버

지의 손이었다. 호기심 많은 동생의 욕망을 가차 없이 잘라

낼 때도 엄격한 손이 앞장섰다. 손에도 녹는 점이 있다면

아마 아버지의 손끝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아버지 손의 안

목은 무한대여서 지칠 줄 모른다. 그 부지런함을 익힌 자

식들은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를 닮았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망

설이지 않았을 아버지. 빛나는 저 손에게 매일매일

감사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지금도 여섯 남매 손의 작

은 하트를 해독 중이신 아버지. 여섯 자식이 올리는 손의

다정한 말 언제쯤 풀어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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