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열수필집/1부 종이밥상

그 섬에 가고 싶다.

21c-park 2023. 12. 17. 12:05

*그 섬에 가고 싶다.

첫사랑처럼 다가오는 섬. 임자도와 처음 만났을 때의

실망감과 감동은 아직도 나를 웃음 짓게 한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게 스며드는 섬에 대한 그리움. 찬바람이 불면 맥을

못 추는 뱀처럼 일상이 나른해지면 몸 안에서 출렁이는 파

도 소리를 듣는다. 시퍼런 바다가 파도의 허연 속살을 껴

안고 소녀처럼 뒹구는 꿈을 꾼다.

승진과 함께 남편의 발령지로 따라 나섰던 임자도 바닷

. 이삿날 그 바다는 낯선 이방인에게 쉽게 길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파도가 높았다. 짐을 실은 차가 모래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떡가루같이 고운 모래가 어떻게 저런

힘을 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오래 다니던 길이 아니

라는 이유로 우리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했던 바다. 몇 번

을 다시 시도 했지만자동차는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지 않고 달려드는 밀물을 보며 할 수 없이 바닷가에 짐을

내리고 차를 돌려보냈다. 보드랍고 순하게 보이던 바다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느꼈을 때 섬뜩한 무섬증이 들었

. 한번 밀려올 때마다 칠만여 개를 몰고 온다는 파도.

물은 우리와 첫인사를 하겠다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아름

다운 섬 생활의 환상은 이렇게 미리 깨지고 말았다.

 

짐을 하나하나 옮긴 뒤부터 순탄치 않은 일들이 기다리

고 있었다. 바가지와 두레박을 사용하는 우물은 육지에서

생각지도 못한 현실로 펼쳐졌다. 검불과 쓰레기를 뒤집어

쓰고 비 오면 넘치고 가물면 쉽게 바닥을 드러냈다. 물은

그렇게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짠물은 흰 빨

랫감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색을 낼 수 없었다. 누런 흰

옷들을 청색 잉크와 섞어 삶아서 하얀색에는 늘 하늘빛이

감돌았다.

 

산과 가까운 집은 지네와 쥐들의 터전이었다. 밤마다 쥐

들은 새 주인을 맞이하는 환영 행사라도 하는지 천장에서

야단법석이었다. 사각사각 커다란 지네는 벽 등반을 하다

가 소리 때문에 들키곤 했다. 해치울 방법을 몰라 뜬 눈으로

앉아 있거나 약을 부려 두었다가 거꾸러진 지네를 잡

아내야 했다. 꿈속에서 지네를 만나 물리기도 여러 번

는 점점 밤이 무서워졌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은 풀

잎 흔들리는 소리에도 놀라게 했다. 길목엔 실뱀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나들이가 잦았다. 뱀에 물리면 응급처치로 양

귀비를 사용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살다 보면 모든 것

이 익숙하게 되나 보다. 아름답게 치장한 꽃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조차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섬사람이 되

어 가고 있었다.

꼭 나쁜 기억과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가한

날은 아이를 데리고 뒤꼍의 솔밭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 큰아이의 눈에 비친 바다와 섬

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습우화나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

며 좋은 엄마 노릇을 하던 그때가 몹시 그리워진다. 햇볕

이 쨍쨍한 날, 파도의 종긋한 입들이 수다를 떨다 가고 바

람은 바다의 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개구쟁이 같

은 어린 파도는 심심하면 허연 거품으로 달궈진 모래의 등

을 엄마의 젖가슴처럼 더듬었다. 모자의 즐거운 한때처럼

보였다. 즐거운 바다 가족의 행복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산길과 이어진 바다의 통로는 짧다. 조금만 꼬부라져 내려오면

대광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길게 누워 있다. 가늘

고 보드라운 모래로 이루어진 19km나 되는 모래사장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특이하게도 그 모래는 유리의 재료로

쓰인다. 어린아이처럼 앉아서 만지고 주무르면 질리지 않

는 장난감이다. 손안에서 잔별들이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따가운

햇볕의 따끈따끈함이 마냥 좋다.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이 찾아들고

임자도 바닷가가 시끄러워지면 물이 부족해 사람들은 투정을 부린다.

내년에 오지 않으면 어쩌나! 나는 어느새 그곳주민이 되어 임자도

경제를 염려하는 주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을 중심으로 빙 둘러 바다다. 모두 십

여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고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마을은

적막에 싸여 있다. 마치 무릉도원이 이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생솔가지로 군불 때다 확 당겨오는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웃던 날. 군고구마 꺼내

다 눈썹까지 타버린 모습으로 다섯 살배기 아들과 마주 보

며 서로 닦아주던 숯 검댕이 손도 보인다. 둘째를 가져 만

삭이 된 몸으로 산에 나무하러 가 비탈길에서 뒹굴어 나무

는 팽개치고 몸만 돌아와 한숨 돌리던 날도 어제처럼 생

생하다.

유일한 가게 해변상회는 임자도 하우리의 만물상회였다.

텁텁한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고 세상을 안주 삼아 나

갔다 들어온 바다 소식으로 작은 역사를 새로 만들어주곤 했다.

상비약과 생필품은 그곳에서만 급한 대로 구할

수 있었다.

이십 년이 흘렀다. 갓난아기였던 둘째 녀석이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기고 있다. 서툴고 시행착오 많았던 임자도에

서의 생활은 언제나 내 삶에서 그리움의 창고이다. 보고 싶

을 때마다 꼭 해내야 하는 숙제처럼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아이가 자라듯이 섬도 부쩍 자라 있을 것만 같아 그냥 달려가고 싶은 곳.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처럼 섬도 늙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기우로 오늘도 그리움만 커진다. 아직도

내 삶 어귀에서 군불을 때고 있는 따끈따끈한 기억들이 세

월의 등에 앉아 있다.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떠나올 때 주민들이 배웅 하던 부둣가.

눈물 흘리며 이별의 손을 흔들어 주던 마을 주민들

은 아직도 건재하신지. 서걱서걱한 세상에서 훈기를 느낄

수 있는 추억이 있어 따스하다. 따끈한 고구마가 식을까

봐 구부정한 허리로 종종거리며 오시던 할머니들은 지금

도 살아계실까? 주부 초년생 딱지를 확실하게 떼고 온 곳.

첫사랑처럼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렌다. 어설픈 초년생 주부

의 듬성듬성 꿰맨 자리가 아직도 낯설게 남아 있는 임자도.

인정 많고 따뜻했던 사람들이 목마르게 보고 싶다. 그리운

이웃처럼 그 섬도 그립다. 해마다 임자도행을 계획해 보지

만 늘 그 자리다. 언젠가 꼭 만나러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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