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써
나는 ‘키우다’라는 동사를 좋아한다. 삶은 간단하지 않아
가끔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온전하
지 않은 날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야 할 때가 종종 찾아온다. 떨칠 수 없는 고통의 유효기간
이 길어질 때 ‘키우다’에 기대어 견디기도 한다.
예기치 않은 복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마다 감
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슬픔이나
아픔은 때때로 모든 생활을 지배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해 아찔한 감정은 엉망이 되어버려 한참을 어
루만져야 할 때도 있다. 감정의 흐름을 잠시 천천히 하며
마음길을 따라 흘러갈 때 글을 쓴다.
가끔 슬픔과 마주할 때 길목을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던져 놓는다. 마음껏 슬퍼할 수 있
을 때 가장 솔직한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
가는 일,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시기를 몇
번씩 지나다 보면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키우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故 임영조
시인이시다. 오래전 몇 차례의 수강이 끝나고 새벽에 줄을
서서 재등록을 해가며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때는 새
벽에 줄을 서지 않으면 강의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수강생
이 많았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특별한 재주도 없이 ‘시’
라는 도깨비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제대로 시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늘 무너지고만 있으니 선생님께 죄송한 마
음이 크다.
같은 시기에 선생님은 서울에,나는 부천에 입원해 있
었다. 마지막 나온 책 “『시 인의 모자』를 가지고 병문안 가
려고 했는데 그날 중요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인편
에 보내겠다.”라고 하셨다.
난 수술을 하고 퇴원한 뒤 회복을 기다리면서 두어 번 선생님께 문병을 갔었다.
몇 사람을특별히 지도하고 계셨던 터라 퇴원하면 꼭 시인이 되게
키우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췌장암 말기라는 소식
에 모두가 휘청거렸다.
약속은 허공에 맴돌고 선생님은 치료를 거두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부음을 들었다. 제자
들에게 많은 여정餘»만 두고 떠나셨다. 다른 제자들은 시
에 대해 꿈을 놓지 않고 꾸준히 공부해,지금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통해 훌륭한시인이 되어 있다. 심리상담사의 길
을 택한 나는 아직 시인의 모자를 쓰지 못했다. 그래서 지
금도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해 '키우다’라는 동사에 갇혀 산
다. 문학은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노력의 결과라며 선생님
은 늘 남의 詩도 많이 읽고 열심히 쓰라고 하셨다.
몇 명의 문우들과 선생님을 모시고 석모도로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날 밤은 유난히 두꺼비 울음소
리가 끊이지 않았다.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잡힌 일정에 모두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
나보니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배로 섬을 떠나신 뒤
였다. 모두 허탈한 기분으로 일정 따라 움직이고 돌아오긴
했지만 지금도 석모도를 생각하면 빠지지 않는 후일담으
로 남아 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첫배를 타고 먼저 가셔야
만 했던 사정이 무엇이 었을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헛
헛한 기분이 따라온다. 그 뒤 석모도를 생각하며 쓴 이 시
를 읽을 때마다 선생님과의 시간들이 새록새록 이어진다.
이젠 돌아가지 않으리라/ 저무는 석모도 입구에 시린
자물쇠를 채운다/ 포구 옆 공터엔 늙은 버스 한 대 졸
고/ 달려온 길도/ 비린 하루를 덮고 숨을 멈춘다
뱃길 따라/ 새우깡에 길든 갈매기들도 잠이 들었나/ 불
빛들이 휘청휘청 불기둥을 품고 파도를 넘어온다/ 물새
처럼 왔다 간 사람들의 발자국 지우는/ 파도의 바느질
소리가 내 불안한 꿈을 한 자락 덧대는 밤/ 새 떼의 목
소리로 바다가 운다
염전에서 익어가던 새하얀 얼굴이 해풍에 밀려온다/
/ 어느 순간 내 삶의 바다에/ 짜거나 싱겁게 스며든 저 몸
짓의 배후/ 의사의 처방보다 눈에 넣은 바다가 약이 되
는 시간/ 밤새 뒤척이는 파도의 짜디짠 방언을 해독 중
이다
싱거운 날보다 짭짤한 날의 호흡이/ 부풀어 오르는 호
기심으로 열중하는 밤/ 헐렁한 기억 너머/ 석모도 눈치
살피는 내가 서 있다
밤을 밝히는 건 너의 기억과 저 바다의 예민해진 나뿐이다
-「석모도의 밤」전문
그때는 열정이 있어 무모한 도전에도 지치지 않았다. 계
속 무언가를 이어가게 하는 힘, 시를 생각하면 절로 미소
짓게 되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끌림이 있었다. 그 끌림
의 힘은 선생님만이 줄 수 있는 희망이었다.
추억은 과거에 살고 있지만,현실을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다. 허술
한 현실이란 반찬에 깨소금 같은 추억을 고명으로 얹을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선생님과의 추억은 늘 현재형이다.
흔들리는 시선을 바로잡고 몰입하며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
의 목소리가 들린다.
책장에 꽂힌 시집을 읽게 하고 무조건 쓰게 하여 마음 온도를 높여준다.
‘소재 거리도 많아 열심히 하면 잘쓸 거야.’라고 하시던 말씀이
곁에 계신 듯살아 있다. 아직도 선생님께서는 시를 쓰면서도
완벽하게 시인의 모자를 쓰지 못한 나를 키우고 계신다.
시어 한 마디에 밤을 꼬박 새우던 날들. 그때의 나를 이
끌어주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되살아나 나를 움직이게 한다.
“무조건 써.”
#무조건써 #석모도 #선생님 #시인 #문예지 #시인의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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