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시킨 일이다.
바닥이 넌지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편안하게 주저앉
아도 될 만큼 내 마음자리는 안온하다. 가만히 있어도 멀
미처럼 다가오던 바닥이 그때의 내 체온을 기억이나 할까.
오래전 일이다. 아픔이라는 물살에 밀려 바닥에 부려졌
다. 나는 거기까진 닿고 싶지 않았는데,더 나아가고 싶었
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병마가 바닥과 한통속이 되라고 떠
밀지만,우린 서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마음은 딴 곳
에 두고 그를 침대 삼아 하루하루를 견뎠다.
지겹지도 않은지 바닥은 나를 송두리째 가지고 놀았다.
뒤척일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받아주었지만,판가
름 날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포기와 좌절이 온몸을 감쌌다.
바닥과의 줄다리기는 하루,이틀 아니 몇 년 동안 계속
되었다.
“그렇게 함께 가는 거야.” 날마다 무엇에 홀린 듯
조금씩 바닥의 유혹에 젖어들었다. 한없이 받아주는 그의
등이 어느새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좋아하
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고,안개 지
역으로 기운 몸은 긴 밤을 헤매다 지친 사람처럼 기진맥진
해져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류머티즘 관절염! 내 삶을 바닥에 머물게 한 원인 제공
자다. 한창 젊은 나이에 병명도 생소하고 낯선 병을 얻으면
서 난 바닥과 한몸이 되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단
단하던 자존감도 내팽개쳤다.
가족들이 즐겁게 먹어주던 맛있는 음식도,일곱 개의 도
시락을 싸며 억척을 떨던 엄마도,아내의 자리도,나의 손
에서 멀어져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바닥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써보기도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폈다가 접으며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내가 했던 일들,내 손을 거쳐서 건너갔던 것
들이 이제는 내 손을 떠나 의지하고 부탁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참을 수 없
는 날들이었다.
그 많던 군식구들도 제자리 찾아 떠나고 아무도 나의 아
픔에 동참할 수 없음을 실감할 때 가장 힘들었다. 몸과 마
음이 함께 무너졌다. 삶이란 그렇게 발버둥친다고 마음대
로 되는 게 아니라고 비웃기라도 하듯 황금시간을 날려 보
내며 얼마나 흘렀을까. 외부와 단절된 두께가 점점 두꺼워
질수록 나는 더 간절하게 냉기 가득한 바닥 깊숙이 찾아
들었다.
거만하고 꼿꼿하던 그의 등에서 어느 날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왔
다. 고요한 정적에는 세심하게 마음 가닥이 정리되어 있었
다. 부정보다 긍정의 힘이 느껴졌다. 차가운 것을 싫어하
는 것을 알아차리고 등의 온도를 높여 따뜻함으로 일관성
있게 대했다. 한결같은 그의 무표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무 때나 나를 눕혀도 외면하지 않는 그의 등이 편안했
다. 바닥과 한몸이 되면서 그곳에서 아늑함을 느낄 즈음.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애처로운 나의 처지를 다독여주었
다. 본인이 미치도록 하고 싶은 것을 잡아보라는 간절한 당
부도 잊지 않았다.
학교 마치고 온 아들이 서툰 손으로 쌓아 놓은 설거 지를
하고 서둘러 학원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지켜봐야만 했
던 엄마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닥
의 부름을 거절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저 아이들에게 희
망의 씨앗이 될 뭔가를 찾아주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허무
하고 부질없이 느껴지던 삶. 새싹 하나가 바닥의 틈새를 뚫
고 나오며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때부터다. 바닥도 서서히 나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자신에게 의지하던 나의 변심에도 말없이 무거운
나를 일으켜 주었다. 한없이 다정다감한 엄마처럼,아무생
각도 하지 말라고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바닥은 나를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 현실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쥔 내 의지를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것도 바닥이었다.
“조금이라도 힘과 용기가 될 수 있다면.” 하고 작은 희망의 불씨에
용기가 싹 텄다. 해보는 거다. 그리고 맞서는 거다. 언제까지라도 해
보자. 혼자서 하는 속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내
겐 호소에 가까운 다짐이 었다.
체온을 기억하는 바닥은 엎드려 토해내던 나의 낙서를
보았을까. 꿈처럼 간절한 나의 희망을 조용히 지켜보았던
걸까. 집요하게 밀어붙이듯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난 문학이라는 끈을 붙잡고 서서히 걸음마를 시작했다. 바
닥에서 견딘 고통의 시간이 선물처럼 나의 꿈에 다가서게
해주었다.
등단은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바닥이 없었다면 난 어
디서 아픔을 견뎠을까. 생각해보니 아득하다. 바닥은 어머
니처럼 포근하게 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일어나라고 등을
민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도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건 없이 받아주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
게 하는 것도 바닥이다.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때가되면 알아서 일어나라고손을잡아준다. 바
닥의 특권이다. 모두 바닥이 시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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