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표정
하루가 도착했다. 허용된 시간은 오늘뿐. 눈을 떴을 때
는 이미 꿈속에서 5시간쯤 소진된 상태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24시간을 장전한 채 나를 이끌고 간다.
생명의 탄생처럼 반기지 않고 호들갑스럽게 기뻐하지도 않는데
소리 없이 내게 온다. 바쁘게 때로는 천천히 어떤 표정을
만들어갈지 생각이 많다. 그 행간에는 감정이 출렁 인다. 차
별과 편견이 없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의 옷을 입
힌다. 거스를 수 없어 간절함을 남기지만 게으름과 태만을
몰라 성실한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늘 새로운 하루 앞에 예민해진다. 나와 유기적으 행복한하루
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하루를 잘 보낸다는 것은 순
간순간들이 원만하게 흘러간다는 증거다. 그 하루 앞에 놓
인 시간을 세심하게 감정을 차별화시키고 후회 없는 결정
을 위해 신중한 선택은 필수다. 소중한 것과 소소한 것, 간
직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해 특별한 것보다는 편
안함을 얻기 위한 쪽을 택한다.
매일 같거나 다르게 몇 등분한다. 크거나 작게,빠르고
느리게 나눈다. 좋은 날 또는 기억하기 싫은 하루는 행보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행복한 하루에 신경을 쓰지만,마음
과 달리 그저 그런 하루도 다반사다. 꼭 오늘이어야 하는
일부터 행동 개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진행한다. 머뭇거
리다 뜻하지 않은 고민이나 걱정이라는 불청객에게 밀리
지 않기 위해서다. 단 몇 분 몇 초라도 얕잡아보면 안 된다.
삶의 방식에 따라 받는 사람의 몫으로 시간의 표정은 달
라진다. 하루 치 햇살과 그늘이 나누어지고 누구에게는 넉
넉하고 누구에게는 빠듯하다. 흘러간 경험은 시간을 적절
하게 나눠 쓰는 데 용이하다. 싱겁거나 짜지 않은 하루는
달콤하거나 짭짤해 같은 맛일 수 없어 종종 아쉬움과 허탈
함을 느끼게 한다.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면 금방 표정을 일
그러뜨린다. 그때의 표정은 극도로 예민하다. 소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이다.
인생에는 순류와 역류의 흐름이 있다. 누구나 순류의 길
이기를 원하지만,역류의 길을 가다가 심한 회오리바람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도 하고,가던
길을 더욱 힘차게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등 뒤에 수많은 생각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하루. 그 시
간을 어찌 고운 무늬로만 남길 수 있을까. 내게도 아픔과
고통의 날이 수시로 찾아들기도 했다. 좌절과 절망으로 얼
룩지기도 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수놓은 날도 있었다. 하루
가 전쟁 같은 날. 그런 날은 무척 길고 지루해 다시 돌이
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돌아보니 그 하루하루가 삶의 터
널이 었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도 나고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도 자신인데 시간을 탓하고 원망한다. 하지만 막막한 일
이 생길 때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는 위로를 한다.
나도 그 위로의 말로 잠을 청하기도 했고 안도의 숨을 몰
아쉬 었다. 그렇게 하루는 같은 형태로 왔다가 다른 모습으
로 사라진다.
세월이 흐른 뒤 생의 주춧돌이 되어주는 하루하루는 그
래서 소중하다. 살아가면서 얼굴에 책임을 지듯 하루를 잘
보내야 밝은 내일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신경
을 모은다. 하루는 그냥이라는 가벼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가 없이 기쁨을 주지 않고 수고와노력에 대한 화답은 표
정 속에 저장해둔다. 심오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역류는
상처와 결핍으로 무늬를 만들고 근육을 단련시키는 데 일
조를 한다. 그래서 하루는 삶을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되기
도 한다. 삶과 죽음,존재와 부재를 일깨우느라 꺾이고 휘
어지는 날을 관조하는 하루. 시험에 들게 하고 처처에 숨겨
진 경계를 넘나들면서 내면을 단련시 킨다.
하루는 과묵하다. 실수와 실패,시행착오의 소리 가득해
도 불평불만이 없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책임지고 싶다.
하루하루 근엄한 표정을 환하게 바꿔주고 싶다.
해가 기울고 있다. 저물어가는 해에 예의를 갖춰 묵도를
한다. 나와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허정열수필집 > 1부 종이밥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이밥상 (0) | 2023.12.17 |
---|---|
바닥이 시킨 일이다. (0) | 2023.12.17 |
*풍경소리 (0) | 2023.12.17 |
아버지의 손을 읽다. (0) | 2023.12.17 |
그 섬에 가고 싶다. (0) | 2023.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