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밥상
새벽이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잘 차려진 밥상을 기다린
다. 면면마다 특색 있는 재료로 차려진 상. 어제의 소란스
러운재료들이 부록처럼 첨가되어 있다. 몇 겹으로 접혀 있
어도 가벼워서 한 손으로 들 수 있다. 밤사이 느슨해진 시
선을 바로잡으며 네모의 표정에 숨겨진 얇거나 두꺼운 의
미를 찾아 나선다. 이 밥상을 혼자 차지하고 각가지 음식
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시간은 행복하다. 미처 아물지 않
은 아픔과 상처가 그대로 묻어 있는 재료와 교양 있는 새
로운 지식이 첨부된 열여덟 겹의 상이다.
밥상 안의 메뉴에는 밝고 어두운 재료와 싱싱하지 않은
부패된 재료가 섞여 있기도 해 섭취하고 나면 가슴이 답답
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한쪽 귀퉁이에 짠지 같
은 삶의 아우성이 지글거리는 메뉴도 있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음미해야 한다.
우선 굵직굵직한 메뉴를 훑어본다. 정치,경제,외교,사
회,광고,전국,국제,문화,스포츠 등 다양하다. 중병을 앓
고 있는 경제는 성장,고용 쇼크 등이 들어간 잡곡밥으로
서로 겉돌며 섞이지 않아 소화가 영 안 된다. 정치는 어울
리지 않는 섞어찌개처럼 너무 짜거나 매워 맛보기가 조심
스럽다. 국제면은낯설지만,처음처럼 설렘이 있어 다른세
상과 만나게 해주는 특별함이 들어 있다. 나에게 스포츠는
가끔 먹는 고기반찬이다. 고기는 단백질로 힘의 원천이 되
어 삶을 새롭게 하고 다시 띔박질할 힘을 넣어주는 영양바
같다. 어울리지 않는 재료로 만든 반찬은 맛이 없거나 식
욕을 떨어뜨리게 하지만 잘 숙성시킨 발효된 메뉴는 새로
운 활력을 심 어준다.
아침은 소화가 잘 되는 된장찌개 같은 문화면에서 가볍
게 시작한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된장찌개는 질리지 않
아 삶의 새로운 재료가 되기도 하고 생활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간이 넉넉지 않을 때는 전철이나 버스
에서 음미하기 위해 가위로 오려낸다. 손바닥만 한 조각이
지만 지니고 있으면 든든하다. 기다리며 시간 보내기에 안
성맞춤이다.
날마다 새롭게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배추에 소금이 배
어들 듯 IT처럼 스며들고 있어 따라가기 어려운 내겐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 같아 멀게 느껴진다. 기계에 빼앗긴 심
각해진 일자리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고
겉도는 취준생과 기성세대들의 가슴앓이를 만날 때는 입
맛을 잃고 며칠씩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넉넉한 저녁 시간에 찬찬히 맛을 음미하며 다시 밥상 앞
에 앉아본다. 미움과 원망 섞인 메뉴를 만나면 온몸이 떨
린다. 냉정한 직설화법은 즉석 개발된 메뉴 같아 깊은 맛
을 느낄 수 없어 아쉽다.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메뉴에 위
로의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금방 따라 할 수 있는 요리법
으로 공감이 될 때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품격이 있는가 하
면 처음부터 품위나 품격을 찾아볼 수 없는 메뉴도 있다.
어려움을 딛고 여러 차례 도전해 성공한 메뉴들의 경험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어 늘 기대가 크다. 세상의 온갖 새로
운 메뉴를 한곳에서 맛볼 수 있는 밥상에 대한 특별한 나
의 사랑법이다.
밥상에 빠져서는 안 될 밥과 국 같은 사설은,세상에 대
해 간을 볼 수 있고 맛을 느끼게 하는 한 상에 차려진 풍성
한 영양 식단이다. 사회 곳곳의 갈등과 분노가 사회면을 어
지럽히고 있지만,신문고는 그야말로 톡톡 쏘는 동치미처
럼 시원하다. 시위와 촛불집회는 힘없는 이들이 모여서 그
려내는 삶의 무늬 같아 눈길을 끈다. 작은 힘이 모여 그늘
진 곳과 연결해 소통의 통로가 되어주어 반갑다. 오래 보관
하기 어려운 채소를 간장이나 소금에 절인 장아찌처럼 그
힘은 구석구석에 미친다.
종이 밥상의 가장큰 매력은 다른 경험에서 오는 공감과
감동이 곁들여 있다. 밑반찬처럼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결핍과 넘침 사이를 넘나들며 행복의 간이역에 앉
아 있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시와 함께 해설이 곁들여 있는 문화면은 나의 단골 식단
이다. 짜고 매운 맛에 시달리다가뭉근하게 입을 정리해주
는 숭늉과 같아 마실 때마다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가 잘된
다. 다른 곳에서 맛볼수 없는 전문가들의 경험이나 지식으
로 차려진 메뉴는 결핍이 많은 나를 채우기에 좋다. 때때로
용기와 당당한 솜씨를 배우기도 하고 인내와 노력이 필요
함을 느낄 때도 있다. 다양한 메뉴의 밥상 앞에서 때론 분
노하고 기백하면서 나를 가다듬고 위로받는 시간이 좋다.
용기와 신념을 채워주고 잃었던 감정이나 정서를 만나
게 하는 밥상. 공유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왜곡된 것과
바로잡아야 할 것 등을 구별하는 힘을 준다. 故 정주영 회
장은 이 밥상을 하루에 5〜6번씩 받았다고 한다. 신문대학
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종이 밥상에 대한 겸허한 그의 마
음을 짐작하게 한다.
폭식해도 소화불량이나 살찔 염려가 없는 밥상은 화장
실에서 음미하고,쓰레기통에 버려도 제재를 받지 않아서
편리하다. 수백 명의 전문가가 나를 대신해 무슨 반찬이 새
로워졌는지 확인해서 집까지 배달해주는 친절한 밥상. 이
식단 속엔 진실과 거짓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섞여 있다.
손맛의 정성과 온기가 배어 있다. 삶의 간을 맞춰주는 아
주 특별한 식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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