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원두막

배고픈 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라면 이야기

21c-park 2007. 6. 27. 09:25

배고픈 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라면 이야기

 

국내 라면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야 가벼운 한 끼 식사나 간식으로 라면을 먹지만 1963년 라면이 처음 선을 보일 때만 해도 국내는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현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은 당시 서울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던 중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줄을 서있던 사람들을 보게 되고 평소 일본을 드나들며 자주 보았던 편리하고 쉽게 먹을 수 있었던 라면 생산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1963년 9월 시판된 삼양라면은 국내 라면 1호가 된다.
당시만 해도 라면은 미곡 중심의 식생활에 익숙한 우리 국민들 입맛에는 맞지 않아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옷감의 일종인 라면(羅綿)으로 오해한 경우도 많았다고.
  판매실적이 오르지 않자 삼양식품은 직원들과 가족들까지 동원해 솥 단지를 들고 서울역, 남대문시장, 공원 등지에서 라면을 끓여 무료시식을 하는 등 집요한 판매전략을 펼쳤다.
  
  1960년대 꿀꿀이죽 5원, 라면 10원..대한민국 산업역군 '라면'
  1963년 첫 선을 보인 삼양라면은 10원이었다. 닭기름으로 튀긴 라면이었고 투명한 비닐 포장에 닭그림과 함께 "닭고기 국물로 맛을 냈다"는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당시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만큼 10원이면 그리 싼 가격이 아니었다. 그때 버스값이 10원, 자장면값은 30원이었다. 초반에는 생소한 이름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지만 곧 급성장세를 나타냈다. '누구라도 간편하게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서민들의 음식'이 당시 식생활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한동안 '라면=삼양라면'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70년대 초에는 삼양칼국수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요즘 시중에 나오는 인스턴트 칼국수에 비하면 맛이나 질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100g 한 봉지를 30원이라는 가격에 맛 볼 수 있어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70년대 후반 시판된 삼양 뉴면


  라면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생소해 꺼려하던 이들도 얼큰한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맛에 매력을 느끼면서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특히 소주에 찌든 속을 풀어주면서 인기는 급속도로 오르게 된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생활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라면이 급속하게 국민들의 식생활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었던 것은 보리 수확 철에 비가 내려 보리를 논에 두고 썩혔던 1963년 계묘년 보릿고개 때문이었다. 이 계묘년 보릿고개는 사상최악의 식량부족사태를 촉발시켰다. 
  식량위기에 몰린 정부는 1965년 혼분식 장려 정책을 냈고, 이 혼분식 바람을 타고 라면은 일반인들의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 든다. 삼양라면은 저소득층을 겨냥해 처음 라면의 가격을 정할 때 100g에 10원으로 출발했다. 
  라면은 물만 있으면 언제든 한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라면회사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싱겁고 느끼했던 초기 라면 스프를 얼큰한 맛 등 다양한 맛의 스프로 개발을 이어갔다. 
  국내 유일의 라면회사였던 삼양라면은 이후 롯데라면(현 농심), 해표라면(동방유량), 닭표라면(신한제분), 해랄라면(충국제면) 등 유사업체의 도전을 받게 된다.
  
 

△롯데라면 소고기(70년), 농심 된장라면(79년), 농심라면(75년)
    

     경제 성장을 통해 음식이 고급화되면서 라면도 다양한 맛을 선보여 1970년대 자장면-냉면-칼국수 등 다양한 맛을 가미한 라면들이 쏟아져나왔다.
     삼양에서 1970년 짜장면이 시판됐고 72년에는 국내 최초로 컵라면을 시판해 인기를 끌었다. 어릴 적 스케이트장에서 컵라면을 먹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그러나 라면도 몇 차례 '수난'을 당해야 했다. 1970년 11월 한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흰쥐를 상대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 라면 유해론에 대한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989년 '우지 파동'은 라면업계를 한때 위축시켰다.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삼양식품의 관련책임자가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1997년 8년여의 공방 끝에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논란은 종결됐다.
  
  삼양-농심 '격돌'..라면 '사재기'를 기억하십니까?    
  1980년대 중반에 농심에서 안성탕면-너구리-신라면 등 새로운 라면을 선보이면서 라면 시장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농심이 삼양을 제치고 라면업계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것이다.
1983년 중공민항기의 서울 착륙이나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설 때는 가게에서 라면이 동이 나기도 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라면을 비상식량으로 사재기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1989년 우지 파동 이후 라면에서는 우지가 사라지고 팜유가 쓰였다.
  1990년대에는 고가의 고급 라면이 선보이면서 고가와 저가의 차별성을 나타냈다. 봉지면이 주류였던 라면 시장에 컵라면 형태의 용기면이 점점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최근 용기면의 비율이 30%에까지 이를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라면이 꼬불꼬불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곧게 만들면 좁은 공간에 긴 면발을 담을 수가 없어서였다고. 또 지방 등 영양가를 높이면서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서는 튀길 때 빠른 시간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나선형이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면을 끓일 때 꼬불꼬불한 면 사이로뜨거운 물이 쉽게 들어가 끓이는 시간을 보다 짧게 해주는 과학적 이유가 있다


때는 <은하철도 999>가 티비를 통해 디립다 방영되던 대한민국의 80년대. 매주 일요일 아침 8시마다 엠뷔씨에서 틀어대는 당 만화영화를 시청하려구, 전국의 국딩들은 엄마가 깨워주지 않아도 다덜 벌떡벌떡 일어나는 기염을 토했더랬다. 자발적 동기부여의 힘이 개인의 게으름 및 수면욕구를 어느 만큼이나 억제하고, 나아가 주변인들을 어느만치로 경악시킬 수 있는 보여주는 실례라 아니할 수 없었음이다.

 

당 작품에는 두 가지의 크나큰 미덕이 있었다. 가끔씩 납득하기 힘든 원인으로 입은 옷이 죄다 훌러덩 벗겨지던 메텔, 그리고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면 반드시 그 행성에서 파는 라면 식도락에 심취하던 철이.. 메텔에게 벌어지던 삽시간 의복유탈 메커니즘 분석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고, 작가가 라면공장 사장이라 일부러 더 자주 등장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철이의 그 라면 식도락, 요거 말이다.

광고도 끝나고 본편이 시작돼 999호가 새 행성에 도착할 무렵이면, 새벽부터 깨어나 TV 앞에 앉아있던 어린이 시청자들도 허기를 느끼기 시작할 때였다. 고때마다 반다시 등장하는 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운데, 젓가락으로 집어 후루룩 댕겨 먹는 철이의 그 라면이 어찌나 맛나게 보였던지. 휴일 아침 식전머리부터 라면 먹겠다고 땡깡 부리는 애녀석들 때문에 언성 높이는 부모들도 부쩍 많아지고..

안녕들 하셨는가? 간만에 찾아뵙는 <역사 속 라이벌>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라면, 그것도 인스턴트 라면의 대명사 삼양라면 vs 농심라면 되시것다.

   개 관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닛신식품(日淸食品)의 치킨라면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스턴트 라면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최소한 일본의 17세기까지는 올라가줘야 한댄다. 중국의 '라미엔(拉麵)'에서 유래했다는 일본 라면의 역사와 함께, 닛신사 창업자인 안도 모모후쿠가 와신상담 끝에 우연히 아이디어를 얻어 생면에 맛을 가미(아지스케면-味附麵)한 뒤 튀기고 어쩌고 하면서 개발했다는 둥, 이 바닥의 썰도 무진장하게 많더라.

다 필요 없고 간단히 말해, 전후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 저렴하게 배불릴 수 있는 대체식량을 어느 발명가가 개발해서 떼돈을 벌며 시장을 개척했고, 이러저러 하다가 오늘날까지 왔다는 이야기 되겠다. 기타, 면이 왜 꼬불꼬불한지, 전통 라멘과의 차이는 뭔지 등등은 가까운 검색 사이트나 스뽕지 등에 문의하실 것을 제안드리는 바다.

약간의 부언을 하자면, 당해 업체는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컵라면이 나오는 바람에, 인스턴트 라면은 조리를 해서 먹는 봉지면과 물만 부으면 바로 먹는 용기면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또한 이후 시장에서는 고온의 공기로 말려 버린 건면과 웬만큼 익혀서 진공포장한 생면도 나옴에 따라 제조과정적으루다가 보면, 기름으로 튀겨 버린 기존의 유탕면과 건면 그리고 (인스턴트)생면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아무튼지간에 굶주리던 것은 한국이 더하면 더했다. 군용지프 들이대며 군부정권이 세워진 60년대에도 식량난은 여전해서, 군부는 국가의 주식인 쌀 수확을 높이기 위해 벼라별 장려책들을 내놓는다. 어쩌면 지구의 중위도권에서는 쌀 부족이 태생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후덥지근한 저위도 지방이 원산지인데다가 거기서 일년에 두 세 번 이상 수확 가능한 벼는, 사계절 뚜렷했다고 전해지는 한반도에서 암만 신석기 시대 때부터 경작을 했어도 그 수요공급 곡선이 이상적으로 매치될 수는 없었다.

소출 자체가 적으니 병충해라도 들면 그야말로 아작난다. 해서 농약 살포의 강력한 장려와 동시에, 병충해에 튼튼하고 쌀 알갱이가 많이 붙는 벼품종을 새로이 보급하기도 했다. 이거 사다가 농사지으라고 농가에는 대출도 팍팍 해줬다. 그 덕에 8,90년대 농가부채가 천문학적 규모로 치솟는 단초를 제공했지만서도.. 이러한 소출 신장 운동과 함께 쌀 수요를 그나마 줄이기 위한 혼분식 장려운동 등도 생겨났다. 각종 잡곡 및 밀가루 베이스 음식들을 한 끼 이상은 먹어줘야 하는 시기의 도래 되겠다. 그리고 이런 시점에서 이웃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 시장 확대를 간과하지 않았던 한 기업인의 혜안이 돋보이게 된다.
 

  라면의 원조, 삼양라면

1963년 9월 15일, <삼양식품>이 일본의 또다른 라면생산업체 명성식품(明星食品)으로부터 기술이전 받으며 <삼양라면>을 국내 최초로 출시한다.

이 기념비적인 첫 출발은 그러나 고된 시장개척을 알리는 서막에 다름 아니었다. 잘 안 팔렸던 거다. 업체의 설명에 의하면, 라면이라는 이름이 소비자에게 일종의 섬유면사로 오인됐던 때문이라더라. 그러나..

당시 출시가격이 10원이었다는데 초기 설비투자 비용을 감안하면 낮은 가격임에는 틀림이 없다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반드시 싼 가격도 아니었다. 이는 구매력 있는 소비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농업기반 문화의 전통 속에서 웬만한 식재료들을 자급하며 직접 조리하던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공산품인 라면은, 기호품인 동시에 낭비로 인식될 수 있었다. 해서 소비자와 제품간 발생하는 심리적 거리는 크고도 깊었을 거란 유추가 가능하다.

명칭의 오해에서 온 거든, 생활문화적 갭에서 온 거든 간에 당 업체는 3년 여를 고생하면서 공격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 시장을 조성해 나갔다. '66년에 이르러 안정적인 판매고를 확보하는데 '69년에는 <풍년라면>, <닭표라면>, <아리랑라면> 등 신흥 업체들까지 생겨나면서 라면시장이 확대일로에 들어선다. 그러나 비교적 일찍 뛰어든 업체('65) 하나를 빼고는, 저 당시 뛰어든 어떤 업체도 삼양의 아성을 깨지 못하고 사업을 철수해야 했음이다.

당 업체는 <삼양라면> 말고도, 건면제품들인 <삼양칼국수('69)> <삼양뉴-면('70)> <궁중탕면('71)>, 일본시장에서 벤치마킹한 <치킨라면('70)>, <카레라면('71)> 등을 새롭게 출시하며 호황기를 이어갔다. 또한 짜짜로니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삼양짜장면('70)>도 일찌감치 구비하고 있었더랬다. 거기다가 국내 최초의 용기면인 <삼양컵라면(72)>을 만들어 판 것도 당 업체다. 가만 보면, 라면의 레퍼토리는 이미 6,70년대에 죄다 나와있었던 셈이다.

암튼지 이로써 삼양식품은 선발사로서의 앞선 기술, 유통망 선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개척자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에 기반하여 80년대 중후반까지 라면하면 삼양이라는 등식의 위상을 유지하게 된다.
 

  농부의 마음, 농심

혹시 <롯데라면>을 출시했던 <롯데공업>을 기억하시는가?

삼양의 시장 개척 후 2년 뒤인 1965년에 라면사업을 시작한 당 업체는 현 시장 지배자 <농심>의 전신이다. 사주가 <롯데제과>의 신격호 회장과 형제간이라는데, 75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문구로 유명한 <농심라면('75)>이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자, 78년 사명을 아예 <농심>으로 교체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당업체가 롯데공업 시절에 출시한 아래의 상품이다. 광고 먼저 보시겠다.

<야자라면>.. 그렇다. 현재 업계의 대세인 팜유로 튀겨낸 라면 되겠다. 당 광고가 72년의 기록이고 보면, 당 업체의 팜유 사용 역사도 꽤 되는 셈이다. '79년부터 농심은 모든 생산 제품에 팜유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 업체는 이때부터 시작해 업계 모두가 팜유를 사용할 때까지 '식물성 기름 사용'을 계속적으로 부각시킨다. 튀김기름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은 좀더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당 업체가 생산하는 <새우깡>이나 <양파깡>, <포테이토?> 등 제과류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농심은 튀겨 파는 것들에는 일가견이 있어보인다. 농심은 유탕처리에 남다른 스킬을 축적하는 것 말고도, 어떤 분야건 성공한 후발업체라면 반드시 해 왔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담은 신제품 개발에도 열심이었다.

사명마저 바꾸게 한 <농심라면>은 라면의 주소비층인 도시인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던 제품이다. 개발독재의 이 시대에는 정든 고향 떠나 상경한 도시 이주민이 많았었다. 이들에게 농촌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죄다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 강력한 향수의 동질감이 맞물리면서 생겨나는 긍정적 소구 효과에 힘입어, 이전에 출시된 <소고기('70)>에 비해 <농심라면>은 상대적으로 성공한 제품이자 농심의 인지도를 확 끌어올린 제품이다.

그러나 선발업체에 2년 늦게 진출한 덕에 농심은 실로 20년 이상을 고군분투해야 했다.
 

  삼양라면 vs 농심라면

삼양라면의 확고한 나와바리에 끈질기게 도전해 온 농심의 투지가 80년대 들어 빛을 보기 시작한다. 70% 이상을 점유하던 삼양의 마켓쉐어가 서서히 균열되어 간 것이다. 이런 변화의 계기는 '81년에 출시한 농심의 <사발면> 이다. 용기면의 대명사가 된 당 제품의 성공은 10여 년 전 삼양이 출시해서 실패한 <컵라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신제품의 성공 여부는 시장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일본 라면 시장이 주력제품을 봉지면에서 용기면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70년대였다. 동 기간에 이를 무작정 한국 시장에 대입했던 삼양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했다. 아직 대한민국은 돈 더 내고 라면을 초간편하게 먹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는 달랐다. 6,70년대의 전국민적 무한 고생이 어느 정도는 결실을 보려던 차였고, 그래서 요렇게 재미와 실용성이 함께 갖춰진 신제품에 소비자들은 충분한 관심을 보일 수 있었던 거다.

1972년 출시된 삼양컵라면

<사발면> 시리즈가 3분 시대를 열며 쾌속질주하자, 국내 최초로 용기면을 내놨던 업체 답게 삼양에서는 1분만에 조리 가능한 컵라면을 재출시하기에 이르는데.. 이미 대세는 조리 시간 2분 차이로 어쩔 수 없었음이다. 시장 방어를 위해 내놓은 삼양의 벤치마킹 제품 <대접면>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때를 계기로 농심의 자식들이 시장에서 계속 성공한다. <너구리('82)> <안성탕면('83)>의 쌍끌이로 당 업체의 마켓쉐어는 40%에 육박한다. 또한 자장류 라면인 <짜파게티('84)>도 경쟁사의 <짜짜로니>와 막상막하의 시장앙탈을 부릴 정도가 됐으며, 무엇보다 <신라면('86)>이 출시되면서 그 누구도 예상못한 대역전의 승부가 드라마틱하게 마악 펼쳐질라구 하고 있었음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면이 20년 가까이 장수할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라나.

그럼 삼양은 가만히 있었냐 하면 꼭 그렇진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 곧 재앙이 될 그 어떤 사건만 없었어도, 이 치열한 응전기에 내놨던 제품들 중 몇몇은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재앙이 오기 전까지 당 업체는 대표브랜드인 <삼양라면>을 계속 리뉴얼하는 동시에, <라면 1번지>, <라또마니>, <청춘> 등 젊은 감각의 라면들을 대거 출시했다.

바로 요 부분이 양 업체의 컬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라 하겠다. 농심은 수더분한 어머니 이미지를 가진 강부자 여사를 모델로 하여, 가족애에 근거한 광고전략을 구사한다. 반면 삼양의 경우, 당대 최고 인기 연예인들을 기용하여 늘 젊은 삘을 유지하는 전략을 써왔다. 자장류 광고를 함 비교해 보까?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며 온가족이 죄다 모이자는 농심의 슬로건에 비해, 삼양 짜짜로니는 당시 뜨던 신인개그맨 이홍렬, 이경규를 기용, 짜연스럽게 짜파게티를 먹으면 그만이었다. 삼양이 젊은 세대를 타겟그룹으로 설정한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긍정적인 전략이었으리라 판단된다. 라면의 주 소비층은 이들 세대이고, 비록 구매자는 엄마덜일 망정 구매과정의 오피니언 리더는 자식덜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삼양의 전략이 주효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전국을 분노의 도가니로 빠뜨림과 동시에 40여년 전통의 라면 명가를 순식간에 몰락시킨 우지 파동 말이다. 

'89년 익명의 제보를 접하고 한껏 흥분한 대한민국 검사들이 신나게 보도자료 배포하며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 공업용 우지 사건은 오해와 무지, 선정성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식품파동사에 독보적인 이그잼플을 제시하게 되겠다.

이미 유명한 사건이므로 혹시 모를 독자들을 위해 초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에서는 소한테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기름만 식용(edible)으로 분류한단다. 그 밖의 소 부산품에는 지덜이 안먹으니까 'edible'을 붙이지 않는다. 이 부산품에서 추출 정제한 '식용' 우지를 삼양에서는 관련법에 적법하게 수입해서 라면 튀기는 데 사용했단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쌩깐 채, 원료가 'edible'이 아님에 주목한 검찰과 언론은, 비누나 각종 공업생산물에 관여하는 우지를 보여주고 이런 걸로 라면을 튀겼다며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간 것. 8년 뒤인 97년에 대법원의 무죄확정판결로 결국 애꿎은 기업 하나만 쫄딱 망한 사건이 우지 파동 되겠다.

암튼지 당 사건으로 인해 삼양이 개박살 난 것도 있지만, 대한미국의 라면 소비자들은 우지로 튀겨낸 특유의 라면발 맛을 잃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원래 팜유를 써오던 농심을 좇아 모든 라면제품들이 팜유로 튀겨졌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이 많아서 우지가 건강에 나쁘다고는 하는데, 글쎄다. 건강 따지자면 원래 라면도 먹으면 안되는 거 아닌가 싶거덩.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법부가 웰빙을 강요하는 거는 좀 너무 하지 않나 싶다. 더구나 팜유는 많이 알려진대로 우지보다 단가도 싸고, 산화도 더 잘된다고 한다. 암튼 이래저래 라면업계는 삼양의 희생으로 제품 단가가 의도와 상관 엄씨 낮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더랬다.

암튼지 이 일을 계기로 두 라이벌사는 전세가 역전, 신라면 쾌속질주가 이어지면서, 시장점유율 60%의 명실상부한 1위 업체 농심의 등극이 이루어진다. 반면 삼양은 우지파동 직후 MS가 10% 수준까지 떨어지고 100억원 대의 제품이 반품됐으며, 97년 외환위기 이후 화의에 들어갔다가 올 3월에 화의 만료되면서 재도약을 다짐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인간사 한치 앞을 모르는 거다.


  삼양과 농심만 있었다면 섭했겠지

1983년 <한국야쿠르트유업>이 라면시장에 뛰어들어 <팔도라면> 시리즈를 런칭했다. 당 업체는 삼양과 농심 양 메이저 업체가 지배하는 유통망을 타개하고자 고심하던 차,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기들이 어느 곳보다 더 확실한 유통망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거다. 바로 야쿠르트 배달 직원들 말이다. 이처럼 정확하고 충성도 높은 유통구조가 어디 있으랴.

노란 야쿠르트 가방에서 라면이 튀어나오는 반전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면서 유통망도 해결됐겠다, 보다 차별적인 마케팅을 위해서 신제품을 개발했는데 <팔도라면 크로렐라면>이다. 당 업체는 용기면 제품도 출시했다. 전국에 산재한 롤라장 및 학교 매점계에 돌풍을 일으킨 <도시락면('87)>, 역시 라면은 뚜껑에다 먹는 게 최고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왕뚜껑면('90)> 등 주옥같은 제품들이 그것이다.

현재 전체 시장에서 봉지면과 용기면은 약 7대3 정도의 비율을 가지고 있는데, 당 업체는 봉지면과 용기면 매출이 역전되어 되려 3대7로 용기면이 우세하다. 용기면 시장의 16% 이상을 당 업체가 점하고 있다니, <팔도비빔면>의 성공사례와 더불어, 메이저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후발 마이너 업체가 어떻게 살아남아 나름의 틈새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심혜진 언니의 상큼한 미소가 돋보이는 최근 광고 하나 감상하시자.

팔도라면 런칭과 비슷한 시기에 라면시장에 진출한 업체가 <청보식품>이다. 당시 마이너 식품업계에서 나름의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던 청보식품의 제품들은 문방구에서 많이 볼 수 있었지 아마. 박리다매적 성격이 엿보이는 <곱배기라면('85)>이 유명한데, 84년에는 신라면보다도 더 일찍 매운 맛 컨셉트의 <열라면>을 출시하기도 했다. '87년 라면사업부문이 <오뚜기>에 매각되는데, 열라면은 96년에 오뚜기에서 재런칭하기도 했다.

70년대부터 라면시장 진출을 염두에 뒀었다고 전해지는 오뚜기는, 야심작 <진라면('87)> 시리즈로 당시에 정말 면발이 차별적인 라면을 생산하기도 했다. 당 업체 역시 89년 우지파동의 간접적 영향권에 있기도 했는데 모체가 워낙에 조미식품 시장 패권자였던 지라, 라면에 올인한 삼양만큼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해당 업체가 생산하는 <스낵면>의 고운 면발도 인상적이었지, 왜.

한편, 일본 닛신식품과의 기술협력을 배경으로 라면사업에 진출한 업체('84)가 있었으니 <빙그레>다. 당 업체의 시작은 창대했더랬다. "이 라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다가 걍 '이라면'이 되어 버린 빙그레 <이라면('84)> 광고를 함 감상하시자.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주현미 여사를 기용했더랬다. '맛이라면 이~라며여언'..

기억에 이라면은 정말 불고기맛이 났었다. 국물 자작자작하게 해서 먹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분말스프가 두 개란 점이 참신했었다. 그런데 고가였다. 다른 라면들 150원 할 적에 300원 이었던 것. 그래서 빙그레는 보다 저렴한 <우리집라면>을 대표브랜드로 키워야 했다. 이후 당 업체는 98년 <메운콩라면>을 출시, 팜유 대신 콩기름을 쓴다며 신상품을 내놓는다.

요 콩기름에 대한 논란이 한참 일었는데, 걍 콩기름이랑 빙그레가 쓰는 대두경화유는 다른 건데 니네 거짓말 한 거 아니냐며, 외부 공청회에서 업체들로부터 다구리도 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타 업체들도 하나 둘 콩기름 라면이라며 내놓다가 유야무야 사라지고 말았다. 자연스런 도태인지 아님 업계의 암묵적 카르텔이 작용했는지는 또 모를 일이다. 팜유처럼 싼 기름은 아직 없고 이 바닥에서 튀김기름만큼 민감한 것이 또 없잖나 말이다.

아무튼지 그러다가 빙그레가 최근 라면사업 부문을 철수함으로써 현재는 농심과 삼양/오뚜기, 한국야쿠르트가 남아서 열심히 라면을 팔고 있음이다.
 

2004년 현재 대한민국 라면시장은 연 1조 4천억 원의 매출을 자랑하는 거대시장으로 성장했다. 60년대 보릿고개를 구원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거창한 모토와는 달리 라면은 한때 사람들의 기호품이었고 그 시점을 지나가서야 빈자의 주식이자 부자의 별식이 됐었다. 이제 라면은 소비자의 다양한 조리법 변주와 함께 다시 기호식의 아우라 마저 챙기고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라면만큼 계급을 초월하는 단일공산품도 없는 듯 하다.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 시장이 수많은 지역 업체들의 종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반면, 대한민국의 라면시장은 저 거대한 매출의 70% 이상을 기업 하나가 점유하고 있다. 물론 인스턴트 생면과 용기면 중심으로 시장이 변화됐고, 또 땅땡이 위치 및 기후 조건에서 비롯되는 식성 차이 등이 반영된 일본시장을 국내시장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렇지, 라면 하나가 20년 가까이 패권을 휘둘러 온 상황은 좀 우낀 상황이지 싶다.

옛날, 라면은 삼양이 젤루 쎄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만년 2위 업체였던 농심의 너구리를 사랑했었다. 절대 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삼양의 나와바리는, 글쎄다, 반드시 우지파동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균열이 갈 그것이었음에 틀림없다. 87년 당시 어느 조사연구서에 따르면 소비자선호도에 있어 농심이 50% 이상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절대권력이 없다는 것은 이렇듯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게다.

아무래도 소비자의 입장에서 대한민국 라면시장은 좀더 다양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외부요인으로 인해 너무 빨리 몰락했던 삼양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길 바란다. 절대 강자에게 도전하는 약자에 대한 지지이자,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우뚝 서 있는 당 업체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시장 1위 업체가 들으면 펄쩍 뛰겠으나, 맘 같아서는 현재의 네 업체 모두 엇비슷한 세를 형성해서 알콩달콩한 시장 전쟁을 했으면 좋겠다만..

금번 <역사 속 라이벌>은 소재가 소재인지라 꽤나 길어졌으나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제품들만이 시대를 풍미한 것은 당연히 절대 아니다. 지난 40여 년간 명멸했으나 수많은 라면 명작들이 존재했듯이, 앞으로도 쭈욱 그럴 거라 생각하메 입맛이 아니 다셔질 수 엄씀이다. 아, 퇴근 하기 전에 라면 한 그릇 때리고 가야게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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