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향군 “살아있는 전쟁영웅인 백선엽 장군 모욕마라”

21c-park 2020. 7. 17. 00:19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4분께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그는
최근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간도특설대 복무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있는 반면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 승리와 평양 선두 입성 등의 성과를 이룬 명장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해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백씨는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조만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당시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1953년 박정희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백선엽은 강행했다.
백선엽은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이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 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 대장 자리에 올랐다.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7대)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대)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대)에 부임했다.이후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했다.
한편 백선엽은 부동산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으기도 했다.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강남역 5번 출구 앞의 덕흥빌딩이 있다. 이 건물은 땅값만 공시지가 기준으로 350억원이 넘고, 건물 전체 시세는 최소 2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태원의 자택만 해도 시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선엽의 사촌누나는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백 할머니'로 이름을 떨친 백희엽이기도 했다. 전설의 '백 할머니' 백희엽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한편, 백선엽 장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오는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현행법에 따라 안장될 예정이다.

 


백선엽 유족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대전도 대한민국"
고(故)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의 유족은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논란에 대해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 장군 장남인 백남혁(67) 씨는 12일 백 장군 빈소 접견실에서 연합뉴스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백 장군은 국립묘지법에 따라 현충원 안장이 결정됐으며, 서울현충원에 장군 묘역이 만장돼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15일 안장된다.
그런데도 일부 예비역 장성과 야당을 중심으로 백 장군을 국립대전현충원이 아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장군의 6·25전쟁 공적을 고려하면 예우를 다하기 위해 서울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백씨는 "아버지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아버지도 생전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서울이나 대전이나 다 대한민국 땅이고 둘 다 현충원"이라며 "아버지가 지난해 건강했을 때 이미 대전에 안장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유족이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치며 "명백히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에 꼭 안장해야 하냐'에 대해 확실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가족들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 국가보훈처장,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백씨는 "아버지는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분이다. 만약 지금 서울 가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야'라고 할 분"이라며 "물론 가족들은 안장 논란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고 말했다.
과거 백 장군에게 서울현충원 안장을 정부 관계자가 제안한 것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고 한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서 대전에 안장되는 것이고 다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백씨는 "아버지는 평생 대한민국을 위해 살았다.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기를 언제나 기원했다"며 "많은 분이 조문을 와서 대단히 감사하다. 감사의 뜻으로 큰절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백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에 대해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전날 페이스북에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고 밝혔다.
사단법인 대한민국 육군협회도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 백 장군이 전우 곁인 서울현충원에서 영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반면 정의당과 독립운동가 선양단체 등은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에 복무했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