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관광유람

실미도

21c-park 2015. 7. 27. 23:33

2015년 7월 17일 실미도에 다녀왔다.

<실미도 난동사건>이 일어났던 작은 섬인데  친지들과 함께 생전처음 실미도 땅을 밟아 봤다.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로 건너가 다시 배를 타고 무의도로 건너가서 갈라진 바다길을 타고 실미도에 들어갔다.

 

*월미도에서 영종도 가는 선박에 차량과 함께 탑승하였다. 

 

* 던져주는 과자를 먹으러 갈매기들이 선박을 애워싸며 날아들고 있다.  

 

 

*갑판 위에 과자를 뿌려 놓으니 갈매기들이 배에 올라타서 과자를 주워 먹는데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 영종도로 향하는 배 뒤로 월미도가 보인다.

 

* 바다에 과자를 던져 주니 갈매기들이 서로 먹으려고 경쟁이 치열하다.

 

* 과자를 먹기 위한해 갈매기들이 바다 한 가운데로 배를 따라오며 날개짓을 한다.   

 

* 뱃전을 빙빙 돌며 무도회를 하는 갈매기들의 모습은 장관이다.

 

 

* 10여분에 배는 영종도 구읍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 무의도 해수욕장에 가니 바다 건너편에 실미도가 보이고 실미도 난동사건을 사징하는 시설물이 서있다.   

 

*실미도 관광안내 판이다.

 

* 무의도에 딸린  해수욕장이다. 그런데 이름은 실미도 해수욕장이라 부른다.

 

* 실미도 해수욕장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좌측 무의도와  우측 실미도가 함께  보인다.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전경.

 

 

*실미도 서쪽 바닷가.

 

* 실미도 동쪽 바닷가.

 

*무의도에서 실미도 가는 길. 엄마와 아기 모습이 이채롭다.

 

* 무의도에서 실미도 가는길.

 

* 갯벌이 보이는 실미도, 실미도 방문객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줄이 쳐있다.

 

* 무의도에서 실미도 가는 징검다리. 만조 때는 이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실미도를 통행할 수가 없다.

 

* 실미도 쪽에서 무의도쪽으로 가까이 바라본 징검다리. 육지의 시냇물을 연상케 한다.

 

*징검다리 양쪽으로 설치된 말뚝과 밧줄에 굴이 서식하고 있다.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 무의도에서 실미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무의도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실미도 가는길.

 

 

 

* 무의도에서 실미도로 건너 오는 사람들.

 

*실미도 모래사장에서 바라본 무의도,

 

*무의도 하나개 해수욕장.

 

*하나개 해수욕장으로 켐핑온 피서객이 많다.

 

* 하나개 해수욕장 뒤에는 영화촬영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실미도사건'은 무엇인가?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명명된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언론은 그들이 정말 '북파부대'라면 건국 이래 최대의 파란을 몰고 올 사건이었기에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어느 매체도 성공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3일만에 정래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 정부와 군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살아남은 4명의 훈련병들도 바로 사형되었다. 그렇게 '실미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 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HID, AIU 등 국군 산하 첩보부대들의 존재와 인권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실미도사건' 에 대한 재조명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부대의 공식명칭은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리던 공군 제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 무산된 '1.21 김신조 사건'에 놀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보복조치로 창설되었다. 사형수, 무기수, 일반 제소자들이 포함된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섭, 작전성공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기록 말소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 받는 조건이었다. 1968년 4월에 만들어져서 '684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김신조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나 훈련도중 사고, 탈출, 처형 등으로 7명 사망, 결국 24명이 최후까지 살아 남는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실미도에 훈련은 없었다. 뛰고 또 뛰는 훈련병들 뒤엔 언제나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이 있었던 것. 그들은 인민군 말투에 인민군가, 인민군 제식훈련 등 철저하게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던 훈련병들은 발꿈치로 날아드는 실제사격과 단체구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단 3개월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섬 밖 육지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국제 데땅트와 함께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정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덧 '구 시대의 유물' 이자 '유령부대' 가 되어 버린 실미도 684부대,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실미도훈련병들에게 일반사병들이었던 담당 기간병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단 십여분만에 실미도를 접수한 훈련병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외곽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진압군과 교전 끝에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전원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히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왜 함께 청와대로 향했는가? 왜 전원자폭 했을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당시 훈련병들이 탈취한 버스에는 민간인 승객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묘한 증언을 해 왔다. 훈련병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는 것, 인질인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버스 안에서 훈련병들이 먼저 총을 쏘진 않았다는 것. 이는 반대로 인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사격을 가했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함께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왜 함께 전원 자폭의 최후를 선택했는가? 북파가능한 인간병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개별행동을 했다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무언가 '목숨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32년간 숨겨져 온 진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실미도 사건 일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24명의 훈련병 탈출 행동 개시

6시 15분 실미도-공군부대간 통신두절. 24명의 기간병 중 6명만이 생존. 교육대장 김순응 준위 외 12명 사살, 6명 익사. 총 18명 기간병 희생.

낮 12시 20분 탈출 훈련병 24인 인천 독배부리 해안 상륙

12시 53분 첫번째 버스탈취, 서울로 향하다, 인천 송도역 삼거리,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 2명 중상

13시 10분 1차교전 - 인천 옥련고개

13시 20분 두번째 버스탈취, 인천 주안사거리 - 간석동고개

13시 30분 인천 소사 삼거리 경찰관 사살

13시 38분 인천 신양촌 검문소 경찰관 사살

14시 15분 서울 진입,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버스운전사 탈출

14시 25분 마지막 교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확실히 안에서 먼저 쏘진 않았다. 밖에서 먼저 쐈다" - 사건당시 버스승객 증언

일부 수류탄 자폭, 4명 생존

8월 25일 정래혁 국방장관 경질

1972년 3월 10일 오전 10시경, 4명의 생존자 사형 집행

1972년 7월 4일 남북 7.4 공동성명 합의, 평화통일 협약, 남북 무장도발 금지 조약 체결

 

*영종대교를 지나 서울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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