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김지석
|
|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고, 왜군이 제해권을 장악한다. 며칠 뒤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1545∼98)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이제 육전에 힘쓰라’고 명한다. 수군이 살아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자 이순신은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고(尙有十二) …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微臣不死)”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미신(微臣)은 ‘미천한 신하’라는 뜻이다. 그는 이 12척으로 두달 뒤 330여척의 왜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둔다(명량대첩).
이순신의 영광과 고난의 뒤에는 항상 유성룡(1542∼1607)이 있었다. 31살에 무과에 급제한 뒤 하급직을 떠돌던 이순신은 1591년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정3품)가 된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시작돼 두 사람이 공을 세우자 정적들의 모함 또한 거세지고, 선조도 두 사람을 제거하는 쪽에 서게 된다. 이순신이 왜란이 거의 끝난 1598년 11월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숨진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가 주인에게 삶아먹히듯이(토사구팽) 난이 끝난 뒤 당쟁의 희생물이 되기보다 장엄하게 전사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은 같은 날 관직을 삭탈당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해 말 강연에서 ‘상유십이 순신불사’(‘순신’은 ‘미신’의 잘못임)라는 문구를 떠올릴 때마다 전율 같은 감동을 느낀다며 대선 출마 뜻을 내비친 바 있다. 그는 이후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결국 말을 뒤집었다. 이순신은 국난과 당파싸움이 심각하던 시기에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죽음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불멸의 영웅이 됐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말을 사용(私用)한 것에 얼마나 공감할까. |
|
|
'유레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사표-제갈공명 (0) | 2007.12.05 |
---|---|
한 마리 참새의 가치 (0) | 2007.12.01 |
갓 하나 주운 어르신 (0) | 2007.11.15 |
필독을 권합니다 - 개벽실제상황 (0) | 2006.11.17 |
여기는 하바드 도서관. 새벽 4시 (0) | 2006.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