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대중가요사

21c-park 2007. 6. 27. 10:25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리기 전 극장 쇼는 대중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수많은 스타가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진과 나훈아는 각각 윤복희, 김지미를 만나 결혼했다. 또한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했던 ‘천재가수’ 배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열창을 뿜어냈다.

지금이야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방송이지만 TV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1960~70년대 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극장 쇼였다.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던 ‘10대 가수 쇼’를 비롯, 스타의 이름을 내건 ‘리사이틀’이 전국 극장이나 야간업소에서 열려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시절 가수와 관객은 무대에서 직접 만났다. 어떤 측면에서 지금보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만큼 많은 일화를 쏟아냈다. 1960~70년대 극장 무대를 주름잡던 쇼단으로는 김영호 단장이 이끈 ‘AAA’와 최봉호 단장이 주도했던 ‘777’이 꼽힌다.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은 거의 이곳에서 배출됐고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TV로 진출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아무리 얼굴을 많이 내밀어도 결국 수입원은 극장 쇼였다. 그래서 트로트 가수든 포크 가수든 극장 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원로가수나 음악관계자들이 이때를 ‘가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쇼 무대 사회자들이 털어놓는 스타들의 비화(秘話)를 통해 그 시절 가요계로 돌아가 본다.


‘열대지방 펭귄’ 최희준

 

극장 쇼의 전성기를 이끈 가수로 먼저 묵직하면서도 안정된 저음으로 ‘하숙생’ ‘나는 곰이다’ ‘진고개 신사’ 등을 히트시킨 최희준이 있다. 그는 간혹 외국 쇼 단체가 내한공연을 가질 때마다 한국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던 ‘국가대표’ 가수였다. 학벌과는 인연이 멀었던 당시 가요계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간판은 그에게 누구도 갖지 못한 위세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가요계 신사’였고, 이러한 후광은 1990년대 들어 국회의원으로 그를 견인하는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최희준이 보여준 면모는 영락없는 ‘코미디언’이었다. 작은 키, ‘능글맞은’ 유머, 위트감각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들은 지금도 그가 TV에 나와 능숙한 말솜씨를 뽐내던 순간을 기억하겠지만, 무대 뒤에서도 그의 언변은 가요계가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1970년 그가 가수분과위원장이었을 당시 쇼 무대 유명 사회자였던 고(故) 최성일씨와 입씨름이 벌어졌다. 최성일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참, 너도 딱하다. 법대를 나왔다는 놈이 코에 땀내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냐? 지금쯤 재판소를 차렸어야지, 가수는 무슨 얼어죽을 가수냐? 참, 한심하다 야!”


그러자 최희준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반격했다. “성일아! 너는 그래 공대(工大)를 나와 가지고 공장을 짓거나 하다못해 ‘자전거포’나 차려야지. 사회자? 그거 순 이빨만 가지고 벌어먹는 거 아냐? 그래도 난 마이크나 들고 다니지만, 도대체 넌 가진 게 뭐 있냐?”


그러나 최성일씨는 사실 공대를 졸업하기는커녕 대학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최희준은 말하자면 최성일의 자존심을 한치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준급의 카운터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는 이처럼 약을 올리면서도 상대방의 기를 살려주는 유머에 능했다.


최희준에게는 별명도 많았다. ‘신사’ 외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찐빵’은 1969년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은방울 금방울’이란 코미디 쇼에서 아들역으로 나온 최희준을 보더니 대뜸 부른 뒤 히트를 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최희준은 때로 ‘웨이터’나 ‘열대지방의 펭귄’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자는 사시사철 검정 양복,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차림에다 조금만 열창해도 코에서 땀이 수돗물처럼 나오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실수가 없고 딱 부러지는 생활태도를 가진 최희준이 아무리 ‘짜다짜다’ 했어도 커피 인심은 넉넉했다. 누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 드세요”가 그의 인사였다.


‘잔소리의 여왕’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인정이 많았다. 경찰의 검문검색이 많았던 그 시절 행여 쇼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서에 끌려가면 부리나케 달려가 사정을 호소해 풀어주게 한 일도 있었다. 쇼 무대의 사회자였던 이대성이 나중에 텔레비전의 톱 코미디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자의 도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69년 장안의 화제였던 TBC 코미디 ‘웃음의 파노라마’의 연출자였던 고 김경태씨에게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며 이대성의 출연을 알선해준 사람이 바로 이미자였다.


그는 연예인위문단 시절인 1962년, 그러니까 최숙자가 한창 인기 정상을 구가할 때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했다. 데뷔 무렵 그에 대한 팬들의 열화 같은 호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연에서 톱스타 최숙자가 앙코르로 한 곡을 부를 때 유망주에 불과하던 이미자는 2곡을 불렀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자는 ‘국가대표 여가수’로 부상한 이후에도 거의 지방공연을 다니지 않고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정이 많은 대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성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미자만큼 잔소리 많은 사람도 없었다고 당시 쇼 무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시절 이미자의 별명은 그래서 ‘쨍쨍이’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대놓고 말하기 무서워했지만, 최희준만은 가끔 ‘쨍쨍이’라고 부르며 이미자를 약올렸다. 그가 한참 공연을 다니던 1968년 연예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팔던 30대 아주머니가 있었다. 외상값을 받으려고 졸졸 따라다녀서 그 아주머니의 별명도 ‘쨍쨍이’였다. 최희준은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미자 들으라고 “쨍쨍이 아줌마 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때마다 이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했다.


1970년 서울 동대문극장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원맨쇼의 개척자’ 남보원은 본의 아닌 실수로 이미자의 원성을 산 적이 있다. “이미자!”라고 소개해야 되는데 그만 “조미자!”라고 해버린 것이다(당시 실제로 조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여가수가 있었다). 여기에 심사가 뒤틀린 이미자는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와 “아니, 저 놈 실성한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을 바꿔?” 하며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핀잔을 퍼부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어쩌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트곡이 많다 보니 이미자는 공연중에 객석으로부터 보통 20곡이 넘는 리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회자나 악단은 손님들이 많이 요청한 곡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이미자는 다른 곡을 부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는 악단이 판단한 곡보다 이미자가 선택한 곡이 항상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느 곡이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가를 예측할 줄 아는 ‘무대의 천재’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의 천부적인 센스에 대해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고봉산씨의 평. “이미자는 그날로 곡을 받아서 단숨에 가사를 외우고 취입에 임할 수 있는 가수다. 국내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는 이미자 한 사람밖에 없다!”


마지막 잎새처럼 떠나간 배호

 

이미자라면 모르지만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래방에서는 줄기차게 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가 불린다. 특히 그의 노래는 더러 저음 부분이 모창됐지만, 저음에서 급격히 고음으로 치솟는 ‘멀티 옥타브’라서 실은 완창이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 최고가수였던 최희준도 배호의 환상적 음역과 음색을 내심 크게 두려워했으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도 그의 사후 곧바로 이어진 독점적 라이벌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수 가운데 가장 먼저 금테안경을 끼고 언제나 단정한 싱글차림이었던 배호는 얼핏 말붙이기가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소탈하고, 장난기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9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이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를 흉내내자 배호는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의 툭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 문주란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당시 ‘안경 낀 사람은 깐깐하다’는 속설과 달리 그는 이것저것 가리는 법이 없었으며, 식사도 닥치는 대로 잘 먹는 그야말로 ‘천골’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호주머니에서 ‘소화제’를 꺼내 마치 디저트인 양 먹곤 했다. ‘하루 세 차례 소화제 복용’은 예외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배호는 1970년 12월 광주 태평시네마 공연에서 급기야 무대에 서기도 전에 쓰러졌다. 무대에는 10대 가수가 다 등장했으나 배호는 분장실에서 신음소리로 “노래할 수가 없다”며 누워버렸다. 사회자 이대성과 최성일은 객석에 양해를 구했으나 관객들은 막무가내로 “우린 배호를 보러왔다! 안 나오면 돈 물어내라!”며 아우성쳤다.


객석의 상황을 전해들은 배호는 “그럼 무대에 나가야지요” 하며 최성일씨에게 “좀 부축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배호는 최성일의 등에 업힌 채, 이대성이 들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관객들의 코끝이 찡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무렵 배호의 인기가 어땠는지는 이른바 ‘땅콩세례’가 잘 말해준다. 어디서나 그랬지만 극장손님 중에는 술집 아가씨가 많았으며 그들은 공연 구경을 와서 스타가 등장하면 상습적으로 땅콩을 무대로 던졌다. 어떤 가수는 그 땅콩에 눈을 정통으로 맞아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배호가 등장하면 마치 소나기가 퍼붓듯 땅콩이 무대 위로 뿌려졌다. 공연 뒤 빗자루로 쓸어보면 땅콩이 대두 한 말이나 됐다는 것이다. 요즘은 관객들이 꽃을 던지지만, 당시 쇼 스타를 위한 팡파르는 땅콩이었다.


병든 배호는 오랫동안 땅콩 쇼의 환호를 누리지 못했다. 1971년 경기도 문산의 사흘 공연 중 마지막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배호는 끝내 무대에 서지 못했고, 서울로 급송되어 세브란스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무리하게 용산 성남극장 무대에 나서는 바람에 건강은 더 악화되었고, 사경을 헤매며 대기실에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럼에도 배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불굴의 집념으로 마이크만 잡으면 ‘기침 한번 없이, 음 하나 흔들림 없이’ 열창했다. 그의 마지막 공연에서 피날레 곡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지막 잎새’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7일 그는 병원에서 서울 삼양동 자택으로 옮기는 도중 차에서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31세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고,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신장염이었다.


배호는 정말 ‘신은 천재를 시기해 일찍 저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올해로 정확히 30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계의 어떤 추모 움직임도 없다. 가요사에 획을 그은 그를 생각할 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배호가 활약하던 시기의 10대 가수는 여자 이미자 최숙자 이금희 현미 문주란 조미미, 남자는 배호를 비롯해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이 단골이었다. 명단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가요는 트로트와 서양 재즈(스탠더드 팝)풍 가요가 겨루는 형국이었다. 여가수 가운데 후자를 대변했던 인물이 현미였다. 그가 우리 가요발전에 주춧돌 구실을 한 ‘미8군 무대’의 무용수 겸 싱어였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로는 격조가 높았던 ‘밤 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의 노래가 미8군 무대에서 공력을 다진 소산이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여걸’ 현미와 문주란

   

춤도 서양식으로 잘 추고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누구 못지않았기에 현미는 다른 가수들이나 악단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래서 가수가 악단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단이 현미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곧잘 오만함이 아닌 호탕함으로 나타났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누구든 상대하기가 편했고 웃음소리도 ‘호호호’가 아닌 ‘껄껄껄’이었다.


1970년 현미를 간판스타로 내세운 파월장병 위문공연 때의 일이다. 월남의 사이공, 나트랑, 다낭 지역을 순회한 대규모 공연에서 어느 날 현미가 숙소에 돌아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소지품이 없어졌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액세서리 등 귀중품과 현금은 그대로 있는데 팬티만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었다(현미는 남들보다 팬티를 많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현미는 “아니 지저분한 팬티를 대체 뭐 하러 훔쳐갔지?” 하며 흥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실된 팬티는 그 연대의 장병들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유를 캐보니 ‘전쟁터에서는 여자의 팬티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공연에 참가했던 여자단원들이 빨래를 해서 널어두기만 하면 유독 속옷만 도둑을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여자라면 더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현미의 반응은 ‘껄껄껄’이었다. 정말 현미는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장군감’이었을 인물이다.


배호가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매력적 저음의 가수 문주란도 현미에 못지않은 ‘여자 얼굴을 한 남자’였다. 우선 남자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선생님’이나 ‘오빠’가 아니라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형’이었다. 현미야 그래도 당당한(?) 몸집이었지만 문주란은 155㎝ 남짓한 왜소한 체구였기에 처음 대하는 사람들의 ‘문화충격’은 더했다. 당장 나오는 소리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였다. 사실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문주란을 옆에 놔두고도 “아직 문주란씨 안 왔어요?”라고 묻는 일이 허다했다.


문주란은 지나칠 정도로 남자다웠다. 스피드와 스릴 광(狂)이었다는 사실이 그 일면을 말해준다. 여가수 중 가장 먼저 자가운전을 한 그는 핸들만 잡으면 동승한 사람이 후회할 만큼 난폭한 운전으로 일관했다. 커브 길을 돌 때 삑 하는 마찰음을 스릴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이 탄 사람은 생명선이 끊기는 듯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았으니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1985년 ‘홀리데이 인 서울’ 공연에서는 급기야 얼굴을 완전히 ‘짜깁기’한 상태로 무대에 나섰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물으니 문주란은 넉살좋게도 “자가용의 차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82바늘이나 꿰맸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난폭 운전 때문이었다. 최성일씨는 그때 문주란을 이렇게 놀렸다. “얼굴 평수가 작았기에 망정이지 더 큰 얼굴이었다면 꿰맨 바늘 수가 더 많았겠지!”


‘눈물을 감추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와 같은 히트곡을 남긴 위키리는 현미나 문주란과 정반대였다. 현미와 같은 미8군 무대 출신으로 훤칠한 키에 늘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언제나 신사의 품위와 격조를 유지했다(나중에 KBS ‘전국노래자랑’ MC로 맹활약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신사’ 위키리, ‘악동’ 김상국


1974년 강원도 황지 공연 때 그는 탄광지역에 유난히 즐비했던 요정으로부터 거의 매일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들이 김샐 만큼 그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신사다운 매너를 지켰다.


덩달아 따라간 사람들은 호스티스들과 질탕 놀이를 즐기는데도 막상 주빈(主賓)인 그는 한치도 짓궂거나 추잡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술자리가 일찍 끝나버리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신사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서 ‘쇼 무대의 명물’로 통했던 가수 김상국은 위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대로 ‘악동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도를 넘어선 짓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골탕먹였지만, 때로는 ‘기행’으로 배꼽을 잡게 했다. 쇼 무대 사회자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김상국이야말로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람을 즐겁게 한 진정한 의미의 엔터테이너였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단원들 앞에서 놀다가 신이 나면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신체까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여자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물건’만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들이 대경실색하여 “어머나! 이게 뭐야?” 하며 괴성을 내질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에서 나타난 그의 악동기질은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히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실례를 했다.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이던 배영달씨는 격노해 그를 다그쳤으나 김상국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 거요” 하며 전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결국 김상국이 사과를 해서 말다툼은 끝났지만, 예의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김상국은 또 무대 뒤에서 소변을 봤고, 배영달씨도 마침내 두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숙명의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


남진과 나훈아는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초반 숙명의 라이벌로서 가요계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인물들이다. 아마도 국내 대중음악 사상 본인들이나 팬들이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하고 갈등했던 가수로는 이 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에서 행여 둘이 함께 소개되면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도 시큰둥한 채 서로 인사를 나눴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당시 야당 정치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DJ와 YS처럼 목포와 부산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남진과 나훈아의 격전에는 ‘지역성’마저 개입, 한층 팬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고지를 선점한 남진은 가히 1980년대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곳은 전지역 주민들이 술렁거렸고, 공연이 끝나면 극장 앞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연히 남진은 인파를 피해 별도의 여관에 투숙해야 했고 그 덕에 공연단 숙소에서는 엉뚱한 사람들이 ‘포식’을 했다. 여성 팬들이 남진이 머무는 줄 알고 정성 들여 만들어온 음식을 쉴새없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남진 하면 윤복희와의 열애와 결혼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 사랑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와 전화통화에 열을 올렸다. 통화가 얼마나 길었냐 하면 그날 공연에서 번 돈을 전화 통화료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다.


이 공연의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회고담. 하루는 미국에 있던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전남 완도에 잠입했다. 무대에서는 한창 코미디 ‘최진사댁 셋째 딸’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상대역 셋째 딸은 홍화숙이란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로 들어가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아 입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 연기를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갑자기 쇼는 3분이나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 있는 김태랑씨와 분장실 요원들은 낄낄 웃어댔지만, 관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쥐죽은듯 조용했고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신성한 공연까지 그르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나중에 갈라설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훈아의 경우는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로맨스가 걸작이다. 두 사람도 역시 공연 중에 그 관계의 실체를 드러냈다. 1974년 박종구씨가 단장이었던 ‘라이온스’ 쇼단 주최로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이 열렸을 때였다. 이 무대 사회자였던 최성일씨가 나중에 밝힌 이야기. 1회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와 있는데 갑자기 사과와 배 한 궤짝이 들어왔고 박단장은 나훈아가 사는 것이라며 많이들 먹으라고 했다. 단원들이 나훈아에게 감사표시를 하고 한참 먹고 있는 도중 난데없이 김지미씨가 나타났다.


김지미씨가 “수고들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나훈아는 “뭘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은 바쁘고 위세 높은 대스타가 남의 쇼에 와서 먹을 것까지 사온 것에 의아해했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눈빛이 여느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뒤 매스컴에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열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마침내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를 목격한 최성일씨의 한마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고, 연기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


전성기 시절 남진은 특유의 장난기로, 나훈아는 ‘소도둑’이란 별명과는 다르게 스스럼없는 인정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남진은 공연이 끝나면 자가용도 보내버리고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이유는 사람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19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방이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남진 특유의 악동기질이 발동했다. 대뜸 ‘물이야!’를 ‘불이야!’로 바꿔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왔다.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던 단원들은 한바탕 대소동을 벌였다. 구석에서 남진은 신난다며 낄낄거렸다. 그는 “공동체랄까, 너도 나도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며 상대적으로 낭만이 메마른 지금의 가요 풍토를 꼬집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괴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나훈아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1983년 그가 서울 천호동 은성카바레를 경영했을 때 과거에는 같이 자리하기조차 꺼렸던 남진을 출연가수로 섭외, 함께 무대에서 정답게 노래했다. ‘당사자 해결’ 차원에서 관계개선의 기회를 나훈아가 마련하고 남진이 선뜻 응한 것은 ‘휴머니즘’을 체험한 그 시절 스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장면인 듯하다.


김세레나의 피날레 욕심

 

공연관계자들은 김세레나 하면 ‘신민요의 여왕’이란 사실에 앞서 가히 국보급이라 할 무대 욕심을 꼽는다. 신인 때부터 그의 의상 가방은 컸다. 쌀가마니만한 크기의 궤짝을, 그것도 두 보따리씩이나 들고 다녔다.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려는 의욕, 남들을 꼭 이기려는 욕심 때문에 무대에 임하기도 전에 주변사람들은 백기를 들었다.


1969년 부산극장에서의 에피소드.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김추자와 함께 공연(共演)했던 이 쇼에서 주최측은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나서는 피날레의 주인공으로 김추자를 결정했다. 김세레나와 김추자의 인기는 막상막하였지만 김세레나가 민요가수였기 때문에 현대적인 김추자를 마지막 순서로 택했던 것이다.


그러자 분장실에서는 김세레나의 언성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피날레 아니면 안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짐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겠다!” 그의 고집에 김추자가 양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김추자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결국 김세레나가 ‘승리의 피날레’를 장식한 셈이었다.


그 무렵 대구 만경관 극장공연에서는 바로 앞 순서였던 펄 시스터스가 사정이 생겨 펑크를 내자 김세레나는 그 시간을 자신이 메우겠다고 자청했다. 그리고는 무대에 올라가 단 1분도 쉬지 않고 논스톱으로 열아홉 곡이나 노래를 부른 일도 있다. ‘무대는 나 없이 안 된다. 내가 다 책임진다!’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같이 누가 노래하든 꼭 자신이 마지막 순서를 장식해야 한다는 고집과 철칙은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했다. 1987년 일본에서 열린 ‘동경가요제’에서도 그는 제일 끝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김세레나의 무대 욕심은 ‘국제적’이었다. 1980년대 그러니까 그의 인기가 상당히 퇴조했을 무렵에도 그의 고집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 장안평의 스탠드바 ‘스카이’에 출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출연을 알리는 그의 선전포스터가 이주일 조영남 뒤에 걸려 있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계약금 800만원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포기를 선언해버렸다. 한창 이런 말이 돌았다.


‘만약 포스터에 김세레나가 두 번째나 세 번째에 걸려 있으면 그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일 크게 그의 사진이 붙어 있는 업소가 있다면 그곳에는 김세레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온다!(물론 맨 마지막에)’


그는 욕심이 많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인정미로도 명성을 날렸다. 1983년 서울 ‘카네기’에 출연했을 당시 그가 무명가수들과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문영주라는 무명가수가 있었고 그의 눈에 김세레나의 화려한 무대의상이 탐날 정도로 멋지게 비쳤다. 그가 김세레나 옆으로 다가가 재롱피우듯 “언니 드레스는 참 예뻐요! 언니하고 너무나 잘 어울려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그 옷을 벗더니 “그래? 그럼 너 가져!” 하며 즉석에서 그 비싼 드레스를 문영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평상복을 입고 올라갔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틀림없이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을 것이다(엘비스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자동차고 현금이고 마구 주는 큰 통으로 유명했다). 김세레나는 실제로 노인정, 나환자촌, 학교 등에 아낌없이 위문품을 전달하는 ‘숨은’ 자선사업가였다. 김세레나의 격의 없는 이웃돕기는 근래 톱 가수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미디어를 통한 선전용 자선사업과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차이가 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김세레나가 무대 욕심의 여왕이라면 김추자는 ‘무대장치 욕심의 여왕’이었다. 노래는 기본이고 조명, 마이크 상태 그리고 무대배경 등 장치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했다.


특히 ‘부분조명’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얼굴만 비추고 이 대목에서는 가슴만 비추어달라’ 등등 세세하게 조건을 따졌다. 김추자의 무대철학은 “조명, 마이크와 같은 노래 외적인 요소의 뒷받침이 완전해야 노래가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대장치 욕심과는 달리 타이틀이나 위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74년 서울시민회관의 김추자 리사이틀 때, 많은 외국인들이 벌떼처럼 그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청했다(김추자는 유독 국내거주 외국인 팬이 많았다).


그 무렵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추자의 전성시대’였다. 내국인 팬들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스타의 당연한 자세였지만, 그는 미소도 짓지 않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냉정하게 외국인들에게만 사인 해주었다. 그래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관계자들이 도리어 민망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남진 나훈아에 뒤지지 않는 폭발적 인기를 누려 능히 ‘방송 10대 가수상’을 받고도 남을 가수였지만, 김추자는 단 한 번도 10대 가수에 들지 못했다. 그런 상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늘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주변의 지원도 내켜하질 않았다. 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혼자 개척해서 최고 가수가 되겠노라”고 스스로 되뇌곤 했다.


그의 ‘나 홀로’ 버릇은 가히 미스터리였다.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채 언제나 혼자서 조용하게 처신했다. 심지어 분장실도 별도로 썼다. 분장실에는 당연히 거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김추자 공연을 준비한 극장측은 극장 사장의 거울을 떼다가 그의 전용분장실에 달아주기도 했다. 터질 듯한 율동과 내지르는 가창이 그의 상표임을 감안할 때 그런 무대 뒤의 ‘폐쇄성’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노래도 절창이었지만 신들린 요정과도 같은 그의 춤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마치 무척추 동물처럼 휘면서 추는 춤, 그리고 하체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만큼 몸에 딱 달라붙는 판타롱 바지는 한때 ‘노 팬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을 정도로 전국의 화제였다.


1973년 부산 보림극장에서 열린 김추자 리사이틀에서는 한 남자 관객이 느닷없이 ‘와! 노 팬티다!’ 하고 소리쳐 객석이 크게 술렁인 적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추자 공연 때는 평소 뒷자리에 앉는 남자들이 ‘뭘 보려 했는지’ 무대 앞으로 대거 몰려나오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면 김추자는 이 시대를 수놓고 있는 이른바 ‘비주얼 댄스가수’의 선구자였다. 지금 가수들은 모든 게 요즘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뿌리와 계보가 있는 법이다.


보여주는 댄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더욱이 ‘님은 먼 곳에’를 비롯한 그의 히트곡이 잇따라 재조명되는 시점에서, ‘비주얼의 원조’인 김추자의 컴백소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세심하게 신경 쓴 무대장치와 함께 보여줄 그의 환상적 열창무대가 기대된다.


김추자를 말하면서 같은 ‘신중현 사단’이며 댄스음악 붐을 일으켰던 배인순 배인숙 자매, 바로 ‘펄 시스터스’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듀엣이었던 이들은 다른 가수들과 달리 극장 쇼의 인기를 업고 방송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 반대로 텔레비전의 인기를 가지고 무대로 뻗어간 예였다. 이것은 그들이 요즘 말로 ‘오디오 비디오 겸용가수’이며 나아가 ‘비주얼 시대’의 효시임을 말해주는 단서다.


그리운 세기의 듀엣 진주자매

 

TBC 쇼프로 ‘쇼쇼쇼’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펄 시스터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의 가창력 율동 그리고 미모라는 3박자가 던진 충격파는 컸다. 고(故)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사석에서는 물론 방송현장에서도 곧잘 입에 올린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펄 시스터스는 정말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재목이다!”


1969년 발표돼 그들을 최고 스타로 만들어준 ‘님아’에 대한 MBC 라디오 김기덕 국장의 말도 되새길 만하다.


“내가 관찰한 우리 가요사에 사람들이 일제히 노래의 주요 부분을 길거리에서 소리 높여 따라 부르며 유행시킨 곡은 세 곡밖에 없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그랬으며 그보다 앞선 곡이 펄 시스터스의 ‘님아’였다.”


펄 시스터스는 방송으로 데뷔해 스타덤에 올라 곧바로 쇼 무대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리사이틀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고 주로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만 섰다.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70년과 이듬해에 20차례 공연이 열렸는데 그들이 18회 출연했을 정도였다.


그들이 쇼 무대에 나왔을 때는 어렸고 순진했던 탓에 누가 뭘 물어봐도 이구동성이었다. 화장실을 가도 함께 가야 했을 만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공연 관계자들은 다정한 자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꾀를 부렸다.


“인숙아. 네 언니가 그러는데 무대에서 제스처하면서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남들 앞에서 흉보더라. 왜 그랬니? 좀 잘하지, 언니한테!”(이 말을 들은 동생 인숙은 한번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슬피 운 적도 있다)


“인순아. 넌 화면이 안 되겠더라. 어쩌면 동생하고 그렇게 얼굴이 차이가 나냐, 그래? 인숙이보다 얼굴이 너무 커!”(이 말에 언니 인순은 ‘미모의 평등화’를 위해 어머니와 상의해 성형수술을 할까 고민했다는 뒷얘기까지 나왔다)


자매 사이는 돈독했음에도 공연 관계자들간에는 자매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본인들은 다정한 자매요, 남들에겐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특히 ‘누가 더 예쁘냐? 누가 더 마음씨가 고운가? 누가 시집을 더 잘 갈까?’가 주요 화제였다.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결론.


“동생이 마스크는 더 낫고 성격은 언니가 더 원만하다. 언니는 동양적이고 동생은 서양적이다.”


펄 시스터스는 늘 모범이었다. 직접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분장실을 청소했고 꽃병과 화분을 갖다놓기도 했다. 또 누가 풀이 죽어 있으면 마치 자기 일처럼 ‘어디 아프세요?’ 하며 함께 걱정했다. 실력은 물론 인간미 때문에 진주자매를 지금도 그리워하는 가요계 원로가 많다.


최성일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펄 시스터스는 스타가 되어 돈을 벌겠다 해서, 또는 연예인 끼가 있어서 가요계에 뛰어든 유형의 가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노래하는 게 좋아서 가수가 된 사람들이었다.”


‘양아치 클럽’의 검문 비화


펄 시스터스와 후라이보이도 그랬지만, 과거 연예인 가운데는 유난히도 영어로 예명을 지은 사람이 많았다. 신카나리아 쓰리보이 패티김 자니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고 1960년대 초반부터 극장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청바지의 대명사 트위스트김(金)도 있다. 당시 유명한 쇼 단장이었던 박영태씨는 트위스트김과 한패거리였던 ‘뜨거운 안녕’으로 유명한 가수 자니리(李), ‘땅벌’의 이태신, ‘허무한 마음’의 정원을 한데 묶어 ‘양아치클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양아치클럽 사이에 발생한 재미난 사건이 있었다. 1969년 마산 제일극장 공연을 마치고 동네 유지로부터 초대를 받아 크게 한잔 걸친 양아치클럽은 술자리를 마친 후 부산으로 향하다 김해 검문소에서 통행금지에 걸렸다. 그런데 그들을 검문했던 경찰은 하필 연예인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하고 오로지 경찰직무에만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경찰=(트위스트김에게) 이름이 뭐죠?


트위스트김=트위스트김입니다. 


경찰=뭐요? 토스트김? (이번에는 쓰리보이를 보고) 당신 이름은?


쓰리보이=전 쓰리보이예요.


경찰=예? 쓰리꾼이요? 지금 당신들 장난치는 겁니까? (이번에는 자니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름은 뭐예요?


자니리=자니립니다! 


경찰=뭐? 자○리? (입에서 남성 심벌의 명칭이 툭 튀어나왔다)


공연 관계자가 정황을 설명해 이들은 곧 풀려났지만 그래도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여러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국적이 다릅니까? 생긴 건 다 국산(國産)인데 왜 이름은 다 꼬부랑 말씨가 섞인 겁니까?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요즘 그룹과 가수들은 그 이상으로 하나같이 영어이름을 내걸어 때로 어른들과 여론의 지적을 받곤 한다. 양아치클럽 사건이 말해주듯 과거에도 그랬으니 신세대 연예인이 영어를 남발한다고 그리 나무랄 건 없을 것 같다.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쇼 무대에만 널리 퍼져 있던 에피소드나 유머가 많았다. 1966년과 67년 내리 ‘경상도 청년’ ‘대머리 총각’을 히트시키며 ‘국제적 지성의 가수’로 통했던 가수 김상희와 관련된 얘기. 고려대 법대 출신으로 뭐니뭐니 해도 가요계 여자학사 가수 제1호(남자가수는 물론 최희준)인 그는 보기 드문 교양의 소유자로 말이 없고 감정절제가 두드러진 가수였다. 하지만 뜻밖에 쇼 무대에서 통한 별명은 ‘다섯째 첩의 딸’이었다. 무슨 영문이었을까?


농담하는 것을 좀처럼 보기 힘든 그였지만 야간업소 사회자로서 쌓은 되받아치기의 저력을 발휘, 한번 공연 관계자들은 크게 웃겼던 적이 있었다. 1972년 전남 여수의 ‘10대 가수 쇼’를 위해 당대 최고 스타들이 기차를 타고 한 칸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들은 서로 본명을 공개했다.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었으며 동성(同姓)이었던 사회자 최성일씨는 즉각 “어디 최씨냐?”고 물었고 김상희는 해주 최씨라고 답했다. 최성일은 머릿속으로 족보를 따져 농으로 “흥! 다섯째 첩의 딸이구먼!” 하고 시비를 걸었다. 그랬더니 김상희도 “최성일씨는 어디 최씨죠?” 하고 물었다. 최성일이 수원이 본(本)이라고 하자 김상희는 수원 최씨가 파벌 중 세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는 숨도 쉬지 않은 채 “흥! 열셋째 첩의 아들이군!” 하고 응수했다.


김상희가 다섯째 첩의 딸?

 

발군의 카운터 펀치. 동료가수들은 김상희의 KO승으로 판정했고 이 사건 이후 김상희에게 최성일은 ‘열셋째 첩의 아들’이 되었고 최성일에게 김상희는 무조건 ‘다섯째 첩의 딸’로 통했다. 그리고 이 별명은 당시 공연 관계자 사이에 꽤나 유행했다고 한다.


가수 조영남과 코미디언 이주일, 두 사람의 미남(?) 경쟁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말 받아치는데 아마 이 두 ‘걸작품’을 능가할 연예인은 없을 것이다. 조영남이 지난 1987년 서울 장안 최고 인기 야간업소인 ‘홀리데이 인 서울’에 출연했을 때 가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어 객석의 폭소를 자아내곤 했는데 한번은 어린애가 울어버려 뜻대로 못한 때가 있었다. ‘못생기기도 했지만 더 큰 비극은 험악하게 생긴 것’이라는 세인의 말대로 아이가 조영남의 무서운(?) 얼굴에 그만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다음 순서에 출연한 당대 ‘추남계의 정상’ 이주일은 굳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애가 울어버리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내 생김새가 아무리 엉망이지만 조영남이보단 잘생겼습니다. 날 깔보지 마십시오. 난 정말 조영남이 하나 바라보고 삽니다.”


재미는 덜하지만 조영남의 멋진 반격. “못생긴 것만 가지고 무대에서 떠드는지 정말 속상합니다. 주일이 형과 내가 못생겼지만 우리보다 더 못난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못생긴 것을 좋다고 보러 왔으니까요!”(그가 90년대에도 TV 토크쇼의 사회자로 명성을 날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주일도 안심했던 추남 조영남


조영남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역사적 해프닝’이 있다. 지난 1975년 고 박정희 대통령과 많은 외국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연예인 위문공연이 열려 김상희 현미 김세레나 조영남 등 당대 최상급 가수들이 참여했다. 조영남은 노래 1절을 마치고 간주 부분에서 갑자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쇠붙이 같은 것을 꺼내려 했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경호원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즉각 조영남을 가로막았다.


참석한 귀빈은 물론, 이를 지켜보던 대통령까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조영남이 꺼내든 것은 권총이 아니라 그가 가끔 노래 도중 부는 연주용 소도구 바로 하모니카였다. 경호실 전체가 ‘휴’ 하는 안도와 더불어 곧 평온이 회복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싸늘함이 감돌았다. 노래하다가 콧물이 나와도 손수건을 못 꺼내는 것이 가수가 지켜야 할 덕목이라면 사전에 귀띔없이(더욱이 청와대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은 어처구니없는 돌발사태였던 셈이다. 이 사건은 연예계에 길이 남을 역사적 비화로 남았고 당사자 조영남은 훗날 “지금도 그 하모니카만 보면 그 사건이 생각나 간담이 서늘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조영남의 별난 점은 하나둘이 아니지만 별일 중의 별일은 ‘히트곡 하나 없이 정상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라는 사실이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가곡을 포함해 남의 노래 재취입곡 아니면 외국 번안곡이었으며 시원하게 히트시킨 오리지널 곡은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는 무대의 톱 클래스 자리를 지켰다. 언제나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이주일은 공연중 조영남을 겨냥했다.


“가수가 본업이 아닌 나도 히트송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있지만, 조영남은 히트곡 하나 없이 20년 동안 버티는 가수다. 생긴 거나 노래로 보나 아무래도 내가 한수 위 아닙니까?”


‘백발의 인기 MC’로 잘 알려진 박상규는 조영남과 달리 ‘조약돌’과 ‘친구야 친구’라는 확실한 히트곡을 둘이나 갖고 있는 1970년대의 톱 가수였다. 그는 76년 ‘조약돌’(그해 방송사 최고 히트가요였다)의 빅히트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았고 마침내 이듬해 작고한 백봉호 단장이 주최하는 전국 리사이틀에 나섰다. 처음이자 마지막 리사이틀이었던 이 순회공연 때의 일이다. 부산 영도극장은 유난히도 건달이 많아 난장판이 되기로 유명했다. 박상규 공연 때도 도대체 그가 쇼를 하는 건지 무대 밑의 주먹패가 쇼를 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건달을 누인 박상규의 주먹


첫 리사이틀을 갖는 박상규는 무척 신경이 곤두섰고 마침내 극장 앞에서 사회자 김태랑씨와 식사를 하던 도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찡그린 얼굴로 한마디 말이 없던 박상규가 수저를 들 찰나 극장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거구의 건달 하나가 불쑥 식당에 나타났다.


“상규! 밥 묵네. 보소, 나도 밥 한 그릇 사주소!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인기요?”


김태랑씨가 말을 받으려 하자 박상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되레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불량배는 더 기세가 등등해져 “와, 아니꼽나? 밥 한 그릇 못 사줄 형편이믄 내가 사주까? 정말 보니까 진짜 ‘조약돌’만하네!” 하고 시비를 걸었다.


작은 체구와 히트곡이 동시에 능멸을 당하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박상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른손 주먹에 전 체중을 실어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방 맞은 건달은 마치 고목이 쓰러지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버렸다.


코앞에서 현장을 본 김태랑씨는 “그것은 쿵푸영화의 이소룡보다 훨씬 비호 같은 동작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상규는 뒤에 “그 친구가 워낙 약체였으니까 한방에 간 거지 뭐”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김태랑씨의 느낌은 달랐다. “작은 고추는 맵고, 짠물 먹고 자란 인천 주먹은 역시 강하다!”(박상규는 인천 출신이다)


박상규는 괴팍스러운 애주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밤 공연이 끝나면 공연단 일행은 숙소로 들어가서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곤 했는데 순회공연 60일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라면 한 그릇에 소주가 곁들여졌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라면이 익으면(더러는 덜 익혀서) 바로 먹는 게 이치였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라면이 퉁퉁 불 때까지는 절대 소주병을 따지 않았다.


보기 흉할 정도로 라면이 불어야 그것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켰다. 김태랑씨는 “라면이 불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 노릇을 해주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라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박상규의 별난 라면 식(食)습관이 널리 퍼져 따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상규가 남자다웠다면 1970년대의 인기가수 이수미는 여자다웠던 가수로 기억된다. 그런 이미지에는 빅 히트곡 ‘여고시대’ 또는 ‘내 곁에 있어주’가 주는 청순함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련함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무대 뒤의 이수미는 치마만 둘렀지 행동이나 씀씀이는 완전한 남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래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공연할 때는 아찔한 ‘겁탈미수 사건’도 많았다.


1975년 경북 구미 공연 때 술취한 손님이 이수미 방에 잠입해 난동을 부렸고 이듬해 1976년 울산공연을 마치고 부산 태화관광호텔에 묵었을 때도 웬 남자가 급습했다. 숙소인 6층까지 찾아온 그 치한이 하도 거칠게 공격해오는 바람에 이수미는 다급해서 그곳에서 뛰어내릴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아래층에 자고 있던 동료가수 ‘잘 있어요’의 이현, 배성 등이 올라와 그를 내쫓아서 겨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말해주듯 이수미는 여러 스캔들로 사생활은 불행했던 편이다. 아마 그의 사적(私的)인 이미지가 잘 보호됐더라면 더 많은 히트곡을 냈을지도 모른다. 전성기가 훨씬 지난 87년 그가 김태랑씨에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정말이지 수미라는 이름이 좋지 않나 봐요. 영화배우 오수미 언니도 평탄하지 못하잖아요? 이름부터 자꾸 걸려요.”(오수미는 얼마 후 사망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김수미씨는?”(그 때 김수미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 할머니 역으로 절정의 인기를 과시했다)


“하긴 김수미씨가 잘 되면서 나도 속이 좀 풀렸어요. 이제부터는 나아지겠지요.”


이수미의 사례는 당시 연예인들이 악성 루머나 스캔들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말해준다. 신문에 연애설 밀애설 등이 보도되면 치명타라도 맞은 듯 ‘도저히 낯을 볼 면목이 없어서’ ‘두려워서’ 약속된 공연마저 나오지 못하는 가수들도 있었다. 지금의 연예인들은 웬만한 메가톤급 스캔들에도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것을 도리어 자신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술로도 활용한다. 어찌 보면 근래 가요계의 풍경이 한마디로 ‘순수의 상실’은 아닐까?


재떨이에 맞은 하춘화


이미자에 이은 1970년대 트로트의 별 하춘화는 ‘운 좋은 가수’였다. 1972년 12월 2일 연예계의 대사건 서울 시민회관 화재가 있었다. 본인의 말대로 뒷문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1976년 이리 폭발 참사사건 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처럼 공연중이던 그를 코미디언 이주일이 200m를 등에 업고 달려나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이주일은 훗날 “만약 그때 내가 업고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하춘화는 천장의 대들보가 떨어져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명동의 야간업소 ‘라데빵스’에서 노래부르던 도중 취객이 던진 유리 재떨이에 발을 맞아 닷새나 출연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사회자 최성일씨는 이 사건도 만약 그가 다른 곳을 맞았더라면 치명적일 뻔했다고 하면서 “하춘화는 유독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당했고 모두 불행 중 다행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가수”라고 말했다.


하춘화는 어릴 때 하도 노래를 잘해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무룡의 혼을 뺀 일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최무룡 리사이틀을 회고하면서 지금도 쇼 관계자들 모두가 ‘딱부리(개구리눈이라서 붙은 별명) 하춘화’를 기억할 정도. 쇼 무대에 입문한 꼬마가수 하춘화의 노래를 듣고 홀려버린 최무룡은 공연장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하춘화를 붙잡고 노래를 시켰고, “햐! 고놈 참 신들린 것처럼 잘 부르네!”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부산 공연의 단골숙소이면서 ‘이 집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은 1960·70년대 스타가 아니었다’는 ‘남이엄마집’에 여장을 풀면, 대부분 한잠 자거나 목욕을 했지만 최무룡은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춘화를 무릎에 앉혀놓고 깜찍한 어린애의 노래를 감상하곤 했다.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이 남 보기에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훗날 하춘화의 출세를 가장 먼저 인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최무룡이었던 셈이다(그러고 보면 옛날 어른들은 애들한테 노래나 트위스트 춤을 시키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또한 하춘화는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가장 좋아했던 가수로도 유명하다.


세상물정에 훤했던 혜은이


‘당신은 모르실꺼야’ ‘감수광’의 혜은이(본명 김승주)도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섰던 소녀가수였다. 그녀의 아버지 고 김성택씨는 변사 출신으로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낙랑쇼’의 단장이었고 가수 고봉산 안다성 윤복희, 코미디언 이기동 남성남 등 쟁쟁했던 연예인들이 바로 이 단체에서 배출되었다. 역시 ‘소녀가수’였던 윤복희가 아버지 윤부길씨와 한창 낙랑쇼단에서 노래했을 때만 해도 혜은이는 갓난아이였다. 젖먹이 시절 혜은이는 전형적인 ‘울보’로 아무리 젖을 물리고 달래도 마냥 앵앵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김성택씨는 가끔 열 받은 나머지 “저걸 그냥 갖다 버려!” 하며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혜은이가 나중에 톱 가수로 성장한 비결로 “어려서 많이 울면 커서 가수 된다”는 속설에서 찾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비스킷을 주면 좋아할 것 같은 어리고 착한 혜은이였지만, 실제로는 남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세상물정에 훤한 ‘애어른’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성일씨가 즐겁게 기억하는 혜은이 회고담. ‘혜은이=관객동원’이던 1979년 제주 시공관 혜은이 리사이틀에서 공연이 끝난 후 그는 단원을 위해 성큼 수고비를 내놓았다. 그런데 사회자 최성일씨한테는 밴드 전체에 준 돈과 맞먹는 거액을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최성일씨가 “왜 나만 이렇게 많이?”라고 묻자 그 답변이 걸작. “에이 아저씨두. 모처럼 제주도에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술 한잔에 식사도 푸짐하게 하시구요. 또 으음…. 여자구경도 하세요.” 아마 산전수전 거친 오랜 경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인간적인 처세 아닐까.


하춘화의 경우도 흡사하다. 17세이던 72년 하춘화는 파월장병 위문차 월남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 공연에서 그가 겪은 어려움은 노래가 아니라 노래가 끝난 뒤 반드시 술이 있는 ‘파티’였다. 으레 고위장성급이 많은 이 자리에서 그는 귀찮을 정도로 ‘춤 한번 추자’ ‘술 한잔하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춤도 못 추고(그는 댄스가수가 아니었다) 술도 전혀 못 하고 또 그러기에는 어리기도 했지만 하춘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을 지켜가면서도 이런 부탁을 다 들어주는 ‘탄력적 프로’였다고 한다. 춤추러 플로어에 나가서는 파트너의 발을 슬쩍 밟고 재빨리 내려왔고 술은 마시는 척하면서 남몰래 엎지르는 교묘한 전술을 동원했다. 최성일씨는 그것을 “흥겨운 판을 깨지 않고 분위기를 타면서 자신도 무리하지 않는, 아무리 어렸어도 캐리어가 쌓이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능숙한 솜씨”라고 표현했다.


하춘화와 혜은이는 70년대 연예계의 중심이 ‘자기 아닌 남’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관록이란 바로 남(대중)을 헤아리는 데서 나온다. 조금이라도 떴다 싶으면 자기 챙기기에 바쁜 지금의 연예계와는 근본적으로 그림이 다르다. 요즘의 자기중심 세태에 관록이 푸대접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무대를 지키는 하춘화(얼마 전 데뷔 40년 기념공연을 가졌다)와 혜은이를 본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바로 푸근한 관록의 향기”라고 입을 모은다.


윤복희의 오빠 윤항기는 가요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신중현이 이끈 ‘애드포’가 한국 최초의 록그룹으로 기록되지만 일반인들도 아는 최초의 대중적 록그룹은 엄연히 ‘키보이스’였고 이 그룹의 일원이 바로 윤항기였다. 그는 나중에 솔로로 독립하면서 ‘나는 어떡하라고’를 크게 히트시키며 74년에는 가수라면 누구나 탐냈던 KBS ‘가수왕’에 등극했다. 그러니까 윤항기는 한국 록이 배출한 최초의 대중스타였던 셈이다(물론 노래는 포크에 가까웠지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정작 놀라운 사실은 어릴 적에 그는 코흘리개 철부지에, 자기의사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던 ‘말더듬이’였다는 점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나이가 들면서도 더듬는 버릇은 여전해서 남들 세 마디 할 때 겨우 한 마디밖에 못했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 그가 하고픈 말을 미리 해주면 손뼉을 치면서 ‘맞아! 맞아!’ 하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목격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뒷날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가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윤항기는 1964년 군에서 제대한 직후 차도균, 김홍탁, 옥성빈 그리고 작고한 차중락과 함께 록그룹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 시절 록그룹이란 말부터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록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생생하게 말해주는 일화.



만능 엔터테이너 윤항기


키보이스 멤버들이 서울 녹번동의 윤항기 사촌누나 집에서 한창 연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동네 주민들로부터 신고를 받았는데 신고한 이유는 “하루종일 ‘상여 나가는 소리’가 찢어지게 들리는데 귀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동네에 한 사람만 목청을 높여도 많은 가구가 괴로웠던 시절에 무려 다섯 명이나, 그것도 악머구리 끓듯 악기를 두드려댔으니 그게 얼마나 주민들 듣기에 소란스러웠겠는가. 그래서인지 “한국에 록이 늦게 정착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의 ‘가옥구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런저런 난관을 딛고 윤항기는 가련한 말더듬이에서 일약 ‘한국 록그룹의 창시자’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윤복희의 ‘여러분’이란 노래가 말해주듯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에, 전성기에는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 윤부길씨의 재능을 이어받아 무대 연출에도 능했고 공연 기획과 작품각색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일례로 1975년 윤항기가 윤복희와 그때 매제였던 남진이 함께 했던 ‘3인 리사이틀’이 크게 히트한 것은 그의 훌륭한 작품구성에 힘입었다는 것이다. 이런 게 인간승리 아닐까.


송창식은 윤항기 이상으로 가요사에 남긴 업적이 지대한 인물이다. 윤항기가 록 출신이었다면 그는 통기타 포크음악이 배출한 MBC 가수왕이었다. 포크의 거성이었던 것은 물론 ‘토함산’이나 ‘가나다라’가 입증하듯 포크와 국악의 접목을 시도한 개척자였다.


가수로서 송창식은 이처럼 분명한 존재였지만 당시 ‘인간 송창식’은 정녕 알다가도 모를 불분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를 본 공연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 막말로 하자면 ‘괴물’이고 좋게 말하면 기인(奇人)이었다고 할까? 자기 좋을 대로, 멋대로 살아갔고 원체 ‘어벙’했던 까닭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최성일씨는 “우선 어떻게 해서 가요계에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명동에서 윤형주와 만나 트윈폴리오를 조직해 데뷔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떤 꿈을 가지고 연예계에 진출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먼저 그의 괴벽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올빼미’였다는 사실.


1976년 서해 5도의 군부대 순회공연 때였다. 그중 백령도 공연에서 행사가 끝난 뒤 군인들 숙소에 가수의 잠자리가 마련됐고 모두 곯아 떨어진 한밤중에 그는 취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신 기타 줄을 퉁겨댔다. 보초가 득달같이 달려와 취침시간임을 경고했지만 그는 “알았습니다” 해놓고는 잠시 후 또 기타를 쳐댔다. 옆방 여자숙소에서 자던 가수 옥희는 혼자 신경질을 부리다 못해 “이제 그만 치고 제발 잠 좀 잡시다!”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송창식의 기타소리는 하염없이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이 때문에 옥희는 아예 뜬눈으로 날을 새웠으며 상당수 군인들도 귀중한 잠시간을 빼앗기는 피해를 당했다.


그는 또 세수, 손톱과 발톱 깎기, 빗질 그리고 양치질 등 기본적인 공중생활 에티켓과도 인연이 멀었다. 옷차림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티셔츠 등 허름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정장 입은 모습을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75년 가수왕으로 선정되던 순간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맸으니 상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그가 옷을 다려 입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구두도 한번 광을 낸 것을 못 봤다”고 증언한다(가수왕 맞아?).


게다가 엄청나게 무감각 무관심 무혈(無血)한 사람이 송창식이었다. 언젠가 공연 관계자들 앞에 굴곡이 어지러운 멋진 몸매의 다방 아가씨가 휙 지나갔다. 당연히 대다수 남자들은 “와, 끝내준다!” “아가씨, 더 쉬었다 가, 응?” 하며 짓궂게 시비를 걸었다. 이때 송창식의 반응. “왜들 그래요? 여자가 지나갔어요? 남자가 지나갔어요?”


좋게 말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할 만큼 대인관계에서 사리사욕을 차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무대 욕심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객석에서 단 한 사람이 앙코르를 해도 신명나게 노래를 부른 사람이었다.


분명한 가수, 불분명한 인간 송창식


지난 1980년 서울 신사동의 야간업소 ‘88서울’에 출연했을 때 그는 세 곡을 부르게 돼 있었지만 앙코르 요청이 있자 다음 출연자에 대한 배려를 잊은 채 계속 불렀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돌아와주오’ ‘내 단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가수 임희숙은 “바빠 죽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무대로 나가 송창식의 옆구리를 찌르며 “그만해! 다음 가수가 기다려!” 하며 퇴장 신호를 알렸건만 그는 여전히 기타를 치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답답하고 속 터질 노릇이었다.


송창식이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세상은 남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고, 그가 사는 세계는 이기심이나 공명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역이었다. 그런 괴물에, 목석에, 멋없는 가수가 일세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선 믿어지지 않는다. 만일 요즘 가수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가수왕은커녕 데뷔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 우리 음악계에 송창식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유산이다.


마지막으로 ‘리사이틀 시대의 마지막 스타’ 조용필이다. 조용필 얘기를 하면서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80년 12월 제주 코리아극장 공연 때였다. 공연이 시작된 날 운수 사납게도 폭설이 쏟아져 제주행 비행기가 결항돼버리는 바람에 조용필은 꼼짝없이 김포공항에 묶여 오후 2시에 개막될 제주공연은 물건너갔고 오후 6시쯤에야 제주에 도착, 즉시 밤 공연에 임했지만 흥행은 완전히 망해버렸다.


공연 주최측이었던 ‘삼천리연예공사’의 김만두 단장은 허탈해하는 조용필을 위로하려고 룸살롱에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조용필은 “돈도 못 번 마당에 무슨 고급 술집입니까? 굳이 가려면 포장마차나 갑시다”고 했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그는 도리어 공연 주최측 사람을 위로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논에 물들어가듯 소주를 마셔댄 조용필은 단 3시간 만에 소주 한 상자(그러니까 20병)를 ‘거의 혼자서’ 깨끗이 비워냈다. 이때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증언. “공연을 치르면서 애주가는 무수히 목격했지만 조용필처럼 가공할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폭주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도 그가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뜬히 공연에 나서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악에 관한 한 엄청난 욕심과 인간미가 공존하는 인물이 조용필이었다. 절대로 악기는 빌려주는 법이 없었지만 남들 공연에 기꺼이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을 지원할 줄 알았다. 다른 가수들의 공연에 연주해줄 밴드가 없어서 공연 주최측이 제주도 현지에서 조달하려고 하자 조용필은 “경비를 절약하라”며 ‘위대한 탄생’의 지원을 자청했다. 그리하여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무명가수의 공연에 밴드가 ‘무료로’ 무대에 올랐고 자신은 무대 뒤 커튼이 쳐진 구석에서 열성으로 기타를 연주했다고 한다.


3시간에 소주 20병 마신 조용필


무대 뒤쪽에서의 조용필은 워낙 분주했던 탓인지 시간만 나면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물론 깨어나면 술이었다. ‘눈감으면 잠, 눈뜨면 술’은 그의 유명한 생활방식이었다. 다시 술 얘기지만 술은 꼭 소주, 안주는 김치찌개, 술집은 포장마차였다(나중에는 당연히 양주, 과일, 고급술집으로 바뀌었겠지만).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오로지 남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언젠가 만난 한 연예기자의 조용필 인간론.


“그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가슴에 깊이 보관한 인물이다!”


조용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주일이다.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최봉호 사장) 소속이기도 했지만 ‘인간적 온도’가 서로 맞는 사람들이었다. 인기 위세 그리고 수입에 있어 쌍벽이기도 했고…. 당연히 가까운 사이였고 그런 이유로 서로 툭탁툭탁 잘 다투기도 했다.


둘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이주일이 먼저 “용필아! 니가 스타냐?”고 시비를 걸면 조용필은 “그럼 형님은 스탑니까?” 하고 꼬치꼬치 응수하며 대드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니, 이 자식이?” “아무리 형이지만 말야!” 하며 제법 살벌한 말다툼으로 번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날 술이 깨면 마치 짜고 한 듯 “우리가 싸웠어?” 하고 ‘끊긴 필름’을 부정한다. 이 정도면 숙명의 동반자라 하겠지만 한 사람이 가수고 한 사람이 코미디언이었기 망정이지 만약 분야가 같았더라면 두 사람은 아마 대권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하다면 무조건 배우려는 열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대 완벽주의로 공연 관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프로기질,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쓰러져 죽는 게 소원”이라는 진정성은 조용필을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요소들이다. 그런 것들이 50세가 넘은 지금도 공연만 하면 유료티켓 판매율 90%를 상회하는 유일한 국내 가수라는 위치를 낳은 밑거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용필이 가요의 방송시대를 열면서 극장 쇼와 리사이틀 시대는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났다. 이곳에서 활동했던 음반 제작자와 매니저들도 1980년대 들어서는 KBS와 MBC 방송국으로 주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음악 흐름의 중심이 방송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말해 가요가 산업화하면서 가요계는 그 시절의 인간적 온기(溫氣)를 상실했다. 누구 말대로 지금은 ‘인간적 예술인’은 간 데 없고 오로지 ‘스타’만 존재한다.


극장 쇼와 리사이틀은 바로 공연을 말한다. 우리 가요계가 무수한 역기능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공연이 아닌 방송출연이 음악의 주(主)가 되면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음악은 공연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음악예술의 향기’와 ‘음악산업의 위용’이 화학작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극장 쇼의 푸근한 뒷얘기들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

송창식은 모든 점에서 ‘둘도 없는 사람’이다. 우선 음악이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독창적 세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 또한 범인(凡人)의 그것과 크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와 절친한 가수 조영남은 그를 가리켜 “일반적인 잣대로는 풀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독자성의 광채를 발하는 비범한 음악’ 그리고 ‘별난 사람’이라는 두 마디 말이 송창식을 가장 잘 축약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송창식은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정복한 주인공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된 그 시대 포크문화를 대표하면서 그의 노래들은 모든 세대와 계층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대학생들은 저항의 찬가인 양 ‘고래사냥’을 목놓아 외쳤고,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은 마냥 ‘왜 불러’를 따라 불렀으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상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트로트에서 느끼는 구수함과 애절함을 맛보았다.

그다지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지만 듀오 트윈폴리오 시절 부른 ‘하얀 손수건’은 그를 여학생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 만들었고, 대중가요를 외면한 고매한 사람들마저 가곡풍의 ‘그대 있음에’에 감동했다. 그가 포크가수 가운데 유일하게 방송사의 가수왕(1975) 자리에 오른 것도 그처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광대한 흡인력 때문일 것이다. 국민가수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이미 국민가수였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가 조용필, 1990년대가 서태지 시대라면 ‘1970년대는 송창식 시대였다’는 규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밤창식, 별창식, 왜창식


그런 시대의 거목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에게도 충분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두려웠다. 그에게 따라붙는 무수한 수식들과 별명들이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낭만파 시인’이나 ‘저잣거리의 현자(賢者)’와 같은 그럴듯한 것들도 있지만 밤에만 활동한다고 하여 ‘밤창식’ ‘별창식’, 모든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서 붙은 ‘왜창식’이란 별칭이 먼저 떠올랐다. 한마디로 ‘기인(奇人)’임을 말해주는 수식들이 아니던가.

올해 초 서유석, 김도향, 남궁옥분 등 포크 가수들 9명이 모여 만든 앨범 ‘프렌즈’ 때도 송창식은 홍보를 위한 TV 출연 섭외를 거절했다. 아직도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련만 그는 좀처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오전 5시 취침, 오후 2~3시 기상에 깨고 난 뒤에도 몇 시간 운동’이라는 오랜 생활패턴은 누구도 파고들지 못하는 ‘금지영역’이다. 그래도 그의 지인들은 불만의 토를 다는 적이 없다. ‘송창식이니까’ 하는 말은 그들의 오랜 양해사항이 됐다.


이런저런 걱정에 싸여있는 필자 앞에 예의 손수 지었다는 그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난 송창식은 “이거 말 잘해야 되겠는데”라고 운을 뗐다. 그의 얼굴에 팬들에게 너무도 친숙한 하회탈 같은 히죽웃음이 떠오르자 인터뷰 자리의 긴장감은 말끔히 사라졌다. 음악 얘기를 많이 하고 싶다는 청에 유난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요즘 송창식은 1990년대 포크가수의 부활 아지트가 된 미사리 소재 ‘록시’라는 이름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며 관객들과 만난다. ‘송창식이 노래 부르는 곳’이란 간판이 말해주듯 카페가 지어질 때부터 실내장식, 무대, 조명 장비에 자신이 관여했다고 귀띔한다. 주위가 어스름해지는 저녁무렵 이 카페의 옥상에 마련된 출연 가수들의 대기실에마주앉자, 그의 표정은 ‘모든 질문에 답할 준비가 돼있다’는 듯 넉넉하고 여유에 넘쳤다. 미처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자신의 인생역정, 음악에 대한 접근법과 시각, 남에게는 별종이라 할 라이프스타일 등을 주섬주섬 꺼내 들려주기 시작했다.

-조금 바빠 보입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매년 열 차례 정도의 공연을 합니다. 그 공연 개런티로도 충분히 음악하고 생활할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고 기(氣)와 관련된 운동 때문에도 더 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올해는 추석 전후에만 11회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왜 일이 갑자기 몰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월드컵 효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의 답변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그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나이가 들어 활동을 중단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부분 세월과 함께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은둔’ 아니면 ‘칩거’가 그의 이미지로 굳어진 진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더러 동료 가수들과 함께 공연과 음반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평범한 대중 입장에서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가 동참한 앨범에 손이 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지속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이렇듯 둔감하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 가요계가 현실을 좇느라 지나간 과거에 너무 인색한 때문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한번도 내 앨범에 만족 못했다”

왜 그가 1987년 ‘참새의 하루’를 끝으로 독집 앨범을 내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신세대 가수에게 몰려있는 음반 회사들이 상업적으로 한물간 그를 외면한다는 소문을 접한 적이 있다. 그의 침묵은 대한민국 가요시장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이런저런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독집 음반으로만 따지면 무려 15년간 공백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음반이 음악가의 중요한 호흡무대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직도 송창식의 앨범을 찾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많은 곡을 써놓았다는 말도 들은 바 있습니다. 일각의 얘기처럼 음반회사에서 앨범 출반을 주저하는 건가요.


“누가 그러던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음반을 내겠다고 결심하면 음반을 내주겠다는 레코드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까지 써놓은 곡도 1000곡쯤 될 거고.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한창 때 무려 20장이나 되는 음반을 내놓았지만 솔직히 그때마다 단 한번도 앨범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항상 부족하고 불만스러웠지요. 하지만 대중의 요구나 음반사의 행정을 고려해서 그냥 내곤 했던 겁니다.

지금도 내 곡에 만족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죠. 음반 발매를 위해 곡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자리하면 아득하고 혼미스럽기만 해요. 인기나 판매량과 같은 이윤동기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요. 만약 내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장 앨범 출반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써놓았던 곡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새로 쓸 겁니다.”

결코 쉽게 흘려 들을 말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대중은 쉬 받아들이지 못할 언급이다. 그와 비슷한 연령대인 가요계 선배들의 경우 앨범을 내고자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이 역시 언제나 ‘내 멋대로의 삶’을 구가해온 송창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주변인들이나 많은 가요계 사람들이 송창식씨에게 기인이란 표현을 들먹입니다. 스스로 남과 비교할 때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이 있습니까. 또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지요.

“보편적인 눈으로 보면 제가 기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난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기인이 아닌데 내가 하는 행위나 표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으니까 그렇게들 부르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보편적인 잣대로 볼 경우 나를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친한 사람들도 다 기인이 될 겁니다. 조영남도 기인이고, 윤형주도 기인이죠.”

그는 먼저 자신이 1947년 인천 태생으로 해방 후 우리의 여건이 가장 나빴던 시절에 자라났다는 점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95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지만 전쟁 통에 1년 늦은 1954년에야 학교에 들어갔고, 그 훨씬 전인 다섯살 어린 나이에 경찰관이었던 부친은 전사했으며 아홉 살에는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가 가출해 사실상 그는 고아로 컸다.

불우했지만 놀거리도, 특별한 낙도 없었던 시절이라는 점이 도리어 소수의 뛰어난 학생들에게 강한 성취동기를 자극해, 자신의 또래들 가운데는 한가지에 흥미를 붙이면 놀라운 재주를 발휘한 사람, 말하자면 기인이 많았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러면서 자신이 만약 기인이라면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설가 최인호, 김홍신, 시인 김지하, 가수 조영남 등을 그 또래의 예로 들면서 그 사람들이야말로 한국문화에 획을 그은 재주꾼들이라고 덧붙인다.

송창식에게 그 재주는 물론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여 노래에 취미를 붙이자마자 ‘노래와 악보와의 관계’를 금세 파악해 1년 만에 작곡을 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재능이 특별한 나머지 인천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중3 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도 잘해 늘 엘리트 그룹에 속했지만 인생목표를 음악으로 정한 그는 제물포고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한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으나 지독한 가난으로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유급통지서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야 만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것은 ‘음악도 공부하는 것, 다시 말해 지성적인 연구로 이뤄지는 것이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음악관련 외국서적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사춘기를 보낸다. 덕분에 얻은 전리품은 영어와 독일어, 일어 해독 능력. 그가 나중에 트윈폴리오를 통해 팝송을 능란하게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이 시절 노력의 결과였다.

-데뷔 무대가 서울 무교동의 유명한 음악감상실 ‘세시봉’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시봉은 대학생들의 전당이었는데 어떻게 고교 중퇴자가 출연하게 된 건가요. 또한 데뷔할 때 팝송 천지였던 그곳에서 왜 하필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는지도 궁금합니다.

“고교동창이 홍익대 미대로 진학해서 나도 덩달아 홍대에서 살다시피했어요. 수업도 듣고 교정잔디에서 매일 기타를 퉁겼으니까요. 그러다가 세시봉의 MC로 활약했던 홍대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이 출연을 섭외해 얼떨결에 ‘홍대 대표’로 출연하게 된 거예요. 나한테는 인생의 커다란 전기였지요. 거기서 연세대에 다니고 있던 윤형주와 이익근을 만나 ‘세시봉트리오’를 만들었거든요. 얼마 되지 않아 이익근이 입대하는 바람에 1968년 2월1일 윤형주와 둘이서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오페라를 한 것은 클래식밖에 몰랐기 때문이죠. 멋있다고 생각해서 클래식 기타를 이미 배운 상태였고 명색이 성악과 출신이라 오페라 아리아쯤은 능히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제게 클래식이 전부였어요.”

-그럼 팝송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클래식 음악을 하던 사람이 대중음악 분야로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대중음악이 출세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닌가요.

“성공하려는 욕심 이전에 포크라는 외국 팝송에 흠뻑 빠졌어요. 윤형주가 부르는 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와! 대중음악도 장난이 아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배운 대로’ 해야 하는 클래식과 달리 대중음악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가요계는 트로트 아니면 약간은 변형된 서구 팝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통기타 포크는 그것과 달랐지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 상상만 해도 얼마나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까? 전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점이라면 대놓고 끌려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트윈폴리오 앨범에는 창작곡이 하나도 없고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축제의 노래’ 등 모두 번안곡들입니다. 아까 얘기대로 따르면 작곡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왜 자작곡을 수록하지 않았나요. 혹자는 ‘가수는 노래만 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가 자기 곡을 썼던 한대수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작곡을 시작했다고 분석합니다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충분히 작곡을 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아직 틀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죠. 내 눈으로 볼 때 완성되지 않았던 겁니다. 1970년 솔로로 독립해 창작곡 ‘창밖에 비오고요’를 발표했는데, 그것도 욕 먹지 않을 정도의 곡이어서 앨범에 한번 실은 거예요. 솔직히 그 곡이나 ‘딩동댕 지난 여름’은 가사와 멜로디가 딱 달라붙지 않았어요. 다만 팬들이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해 발표한 거지요.

한대수 음악은 결코 내가 지향하는 패턴이 아니었습니다. 난 보브 딜런 류의 사실적 포크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런 식의 포크 가수들이 내는 목소리는 흥미가 없었어요. 난 가수가 노래를 하려면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엄청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한대수가 출현한 뒤 자극 받아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 전환하게 됐다는 말은 전적으로 틀린 얘기예요. 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렇지, 난 이미 곡 쓰는 데 자신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곡 쓰기나 노래 부르기라는 점에서 한두 차례의 진통과 굴곡을 겪기 마련입니다. 송창식씨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고요. 실제로 트윈폴리오 시절과 솔로로서 전성기 때의 송창식씨의 노래는 판이한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하얀 손수건’과 ‘한번쯤’은 목소리부터가 전혀 이질적입니다. 곡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도 갈수록 점점 변화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음악가로서 그 무렵 도약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제가 1973년 병무청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제 음악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나를 보게 된 거죠. 그랬더니 내가 만든 음악이 너무나도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노래만 따지더라도 ‘아마추어 국악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여학생보다 내 노래가 못하더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정말로 창피했고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괴감에 군 복무 3개월 내내 눈물로 지샜어요.

제대한 후 작심하고 내 음악체계 모든 것을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위시해 음악 전반을 다시 연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음악’, ‘한국인 송창식, 내 속의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지요.

그러고 난 뒤 발표한 곡이 바로 ‘피리 부는 사나이’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의 ‘어~언제나’ 부분은 특이한 음정이 구사됐는데 나의 그런 연구를 실제로 적용한 겁니다. 이후 실험적인 소절을 대중반응의 추이를 보고 점차 늘려나갔어요.”


밀고자로 낙인 찍힌 사연


인터뷰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 음악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송창식 하면 결부될 만한 대중적 관심사로 얘기를 돌렸다. 민감한 질문을 연이어 던졌지만 그는 단 한차례의 머뭇거림이나 숙고 없이 일사천리로 응답했다. 먼저 필생의 동반자이자 껄끄러운 사이로 알려진 윤형주에 관해 물었다.

-윤형주씨와는 트윈폴리오를 통해 천상의 화음을 들려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타일이나 사회적 삶의 방식이 전혀 달라 보입니다. 트윈폴리오에 대한 팬들의 줄기찬 재결합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각각의 길을 달려간 것도 사실이구요. 지금은 관계가 어떻습니까.

“윤형주와 내가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삶의 접근법도 차이가 났지만 내가 트윈폴리오를 멀리했던 것은 음악적인 이유였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솔로 이후 상당한 음악적 변화를 겪었어요. 가창부터가 달라졌지요. 그러나 대중은 트윈폴리오에 대해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예전의 음악을 원했고 윤형주는 미성(美聲)의 패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죠.

이미 음악적으로 다른 길을 밟아간 내 입장에서 그와 화음이 양껏 맞을 리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나 트윈폴리오를 재결성했지만 그 차이로 인해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솔로로 열심히 음악을 했지만 대중들은 저와 트윈폴리오를 함께 기억하고, 때로 트윈폴리오를 나보다 더 기억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곧바로 다시 갈라서게 된 거죠. 근래 포크 빅3 공연 등 수차례 같이 노래하고 있듯 일반의 선입견과 달리 인간적인 트러블은 거의 없습니다.”

-송창식은 서슬 퍼런 유신시대의 대마초 파동을 딛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로 기록됩니다. 단 한 가수도 살아남지 못한 전체주의적 압박의 ‘서바이벌 게임’을 어떻게 탈출한 겁니까. 그래서 당시 어쩔 수 없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대한 죄의식이랄까, 어떤 일말의 회한이 없었나요.

“맹세코 전 대마초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동료 뮤지션들이 설령 피울 때도 난 빠졌고 도리어 그들에게 ‘언젠가는 큰 일 터질지도 모른다. 하지 않는 게 좋다’며 충고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1975년 가수왕이 된 뒤 가수 정훈희와 동거설이 퍼졌고 대마초 혐의를 받은 정훈희와 덩달아 묶여서 수사대상에 오르게 됐습니다.

취조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레 동료 이름을 거명하게 됐고 윤형주에 대해 묻길래 ‘그 친구는 대마초 하지 않았을 거다’라고 답하는 와중에 저절로 주소를 알려준 꼴이 됐어요. 취조기술에 내가 말려든 겁니다. 더욱이 나중에 알았지만 취조실에는 신문사 기자가 있었어요. 다음날 기사를 통해 나는 졸지에 동료 가수들에 대해 불어버린 밀고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수들은 나만 보면 눈을 부릅뜨곤 했지요. ‘망할 놈’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때의 황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자전거 따르릉이나 바흐 오르간이나


대마초 파동의 험한 파도를 넘긴 그는 1978년 완구공장 창고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대뜸 빌려줘, 이제는 전설이 된 노동가 ‘공장의 불빛’을 탄생시킨 일화로 다시 한번 인구에 회자된다. 송창식은 김민기와 많은 작품을 공작하지는 않았지만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 노래의 ‘내나라 내겨레’는 최고수들끼리의 환상적 합작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작업실을 내준 것이 과연 동료에 대한 연분이었는지, 아니면 대마초 파동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죄책감에 의한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1978년이면 유신체제의 억압이 극에 달한 시절인데 가뜩이나 불온한 인물로 지목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내준 것은 당시 분위기를 전제하면 상상할 수 없는 용단으로 비쳐집니다. 아무리 동료가수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습니까. 나중에 밝혀지면 공범(?)이 되는 것 아닙니까.

“난 아무 생각 없었어요. 원효로에 내 연습실이 있었는데 김민기가 녹음을 하겠다고 하길래 선뜻 빌려준 겁니다. 뭐 때문에 두려움을 느낍니까? 난 그 시대를 전혀 위기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내가 본래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 일이 용기고 뭐고 할 것도 없지요.”

-기념비적인 곡이라 할 ‘왜 불러’나 ‘고래사냥’과 같은 곡은 금지곡으로 묶였지만 오히려 대학생들에게는 마치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의 찬가로 애창되었습니다. 송창식씨의 우렁찬 외침에서 반항의 힘을 체감했는지도 모릅니다. 3공과 유신이라는 압제의 시대를 호흡하며 살아갔던 입장에서 막상 저항가요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그 노래들은 내 소리를 낸 것이지 시대와 대치하는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항성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냥 그때의 내 음악이었을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저항가요에 약간은 부정적입니다. 김민기 얘기를 다시 해볼까요. 전 그가 등장했을 때 ‘와 큰 별이 떴구나!’했습니다. 브람스 수준의 천재라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그가 나중에 저항적으로 변화했을 때 안타까웠습니다.

음악가는 음악이 우선입니다. 사고와 고민 그리고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그 모든 것을 음악이란 그릇에 용해시켜야 합니다. 저항운동을 위해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위험하죠. 내 곡 중에 김민기가 쓴 ‘강변에서’가 있는데, 김민기 곡이라 그런 건지 운동권에서 많이 불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전 몇 년간 일부러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송창식씨의 음악을 들으면 여러 음악적 세례 가운데 트로트의 과정도 밟은 것 같아 보입니다. 1978년엔가 TV에서 ‘나그네 설움’을 감칠맛나게 불렀던 걸 본 기억이 나거든요. ‘상아의 노래’를 위시해 실제 트로트도 불러 음반에 수록했습니다. 포크나 국악쪽 음악가들은 트로트를 상당히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왜 트로트를 무시합니까? 전 트로트도 많이 불렀고 트로트가수인 김연자씨에게 ‘당신은’이나 ‘안돼’ 같은 곡을 주기도 했어요. 내 노래 가운데 ‘토함산’ 같은 곡은 사실 트로트를 만들겠다고 만든 곡이에요. ‘피리 부는 사나이’도 그렇고요. 단지 ‘트로트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시범의 의미를 담았을 따름입니다.

음악은 다 똑같은 겁니다.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부터 바흐까지 다 같아요. 트로트가 단순히 반복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음악적 표현입니다. 단지 트로트가 경시되는 이유는 가수들이 음악 외적(外的)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겠지요.” 소리는 몸 속에 들어있다


향군법 위반 혐의로 1977년 한해를 쉰 송창식은 고교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인 한성숙씨와 결혼하고 이듬해인 1978년 회심작 ‘토함산’을 내놓는다. 이전의 작품과는 사뭇 기조가 다른 이 앨범을 계기로 그는 음악생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국악과의 접목’으로 숨가쁘게 내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1980년 ‘가나다라’와 ‘에이야홍 술래잡이’, 1982년 ‘마의태자’ 같은 현대 가요사의 유산이라 할 만한 값진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 자신 음악적 진화의 절정을 굴삭해낸 것이다. 그 무렵 그는 가사를 쓸 때도 말로 쓰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쓴 뒤 그 의성어들과 비슷한 언어를 찾아 노랫말을 짰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국악에 심취했을 때의 음악적 관점은 지금의 신세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과는 모든 게 달라요. 그들 음악은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해 음이 분류되어 7음계 형식으로 정착되었어요. 상당히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음은 수학이나 철학이 아닌 우리 몸에 내재된 힘이나 영혼의 개념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에 잘 안 맞는 서양음악의 방법을 덧씌우면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요.

일례로 외국의 유명 지휘자가 한국 연주자나 성악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다 훌륭한데 기본이라 할 음정과 박자가 안 맞는다’고 토를 답니다. 당연하죠. 생래적 음의 표현방식이 다른데 어찌 그들과 같겠어요?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뿐인 겁니다. 이것은 애초 우리가 서양으로부터 음악을 잘못 받아들여 잘못 알고있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고유의, 전통의 음을 찾는 것은 의당 제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두고 197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에 맞섰다고 평가하는 것, 시대성과 사회적 맥락을 결부시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송창식 본인은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해나간 ‘순수음악가’라는 것이 정확할 듯했다. 소리와 음악에 대해 장광설을 피울 때의 모습에선 마치 도인의 경지를 느끼게 했고, 또 그만큼 어렵게 들렸다. 의미를 따라잡는 데도 진땀이 났다.

-송창식씨의 음악은 듣기는 쉬운데 막상 부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후배들이 리메이크를 많이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독특함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내 음악이 독특하다고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애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 소리를 살펴 찬찬히 풀어놓은 것일 뿐이니까요.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하게 된 것이겠죠. 그러니까 제 음악이 그때 사람들에게 새로웠을 겁니다. 전에는 그런 노력이 없었으니까요.


음악의 본질 향한 구도(求道)


돌이켜보면 그렇게 대중들이 좋아하게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은 ‘운’이었을 겁니다. 시대적으로 맞았던 것도 운이고. 하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곡은 없었어요. 내 음악에 대해 만족할 수 없지만 그래서 대중적으로는 괜찮았을 거예요.”

그는 “나는 어떤 후배들에게도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후배들은 “음악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을 본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1978년 데뷔한 정태춘, 비슷한 길을 밟아간 김수철, 그리고 지금도 음악적 도약을 위해 국악을 기웃거리는 신세대 뮤지션 등 그의 사정권에 들만한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송창식에게서 음악적 완성이나 포만감이란 있을 수 없는 듯했다. 앨범을 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설령 목표에 근접한 음악을 구상했어도 혼연일체로 소리를 내줄 연주자가 없어서 앨범의 실현가능성은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음악의 심연을 향해 파고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어쩌면 음악을 통해 구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부나 명예, 유행, 시대의 요청 같은 음악 외적인 것들은 창공에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하잘 데 없는 것들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면서 그는 피곤해하기는커녕 도리어 처음보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카페로 내려오자 그를 알아본 손님들의 사인공세가 쇄도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요!” “요즘에 들으니까 더 후련해요!” 비틀스의 고(故) 존 레논이 노래 속에서 그랬던가.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와 같이 가게 되리라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한국에도 이 정도 크기의 음악세계를 가진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은 기억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끝)

 

'일반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어트 정보 120 가지  (0) 2007.07.26
세계자연유산-제주  (0) 2007.06.28
불륜원인  (0) 2007.06.27
짝퉁(중국)의 역사왜곡  (0) 2007.06.27
욕 철학  (0) 2007.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