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짝퉁(중국)의 역사왜곡

21c-park 2007. 6. 27. 10:18

우리가 범하였던 오류 
 
올해 초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뉴스가 대륙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東北工程 이라고...중국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그들이 직접 말하는 것은 없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우회적인 이야기들만 간간히 들려오곤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中華人民共和國 이 現在 깔고 앉아있는 영토에 존재하였던 지나간 역사를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 때문 이라는 것 입니다.

 

이러한 왜곡을 시도하려는 중국의 목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歷史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론정도의 역사책을 통하여 중국사를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엄청난 오류가 있습니다.  즉, 이미 그들이 왜곡하여 기록하여온 중국사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또한 그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아온 엄청난 오류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되어진 사실만 알고 있었고, 그만큼 이러한 왜곡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는 것 입니다.  이 뿌리 깊은 왜곡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이웃의 반발을 무릎 쓰고 중국이 歷史歪曲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漢族이 歷史를 분류한 기준 
 
대부분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총론 수준의 역사서들은 4 대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이 때 시기를 나누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라 하는 것이 漢族들이 세워놓은 것에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正史 라고 알려진 25史 ( 혹은 24史 ) 로 분류한 방법으로 짜여진 중국사를 우리가 보아 온 것입니다.

 

 

사마천 ( 司馬遷 ) 이 上古부터 漢武帝까지 2천년 역사를 紀傳體 로 작성한 史記이후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고나면 다음 왕조의 命에 따라 史家들이 前왕조에 대한 역사를 기전체로 작성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25史는 각각 斷代史 집합에 대한 통칭입니다.

 

唐나라 이전까지의 단대 정사는 필생의 저작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史官들이 되도록 정확한 자료를 인용하여 일관된 사관으로 기술 하였던 반면, 이후에는 前왕조의 정치적 득실을 밝히고 새로운 왕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편찬하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후자와 같은 이유로 자칫 前왕조 및 주변국들에 대한 기술이 왜곡되게 나타 날 수도 있고 특히, 전왕조가 이민족이 漢族의 지배자 일 경우 이러한 왜곡의 정도는 지나 칠 수도 있습니다.

 

왜곡의 주역 漢族이란 
 
그렇다면 왜곡의 주체가 되어온 중국 역사의 주류인 漢族 이란 과연 어떤 민족일까요 ?  엠파스사전에 따른다면  중국 본토 재래의 종족, 그 발생 및 이동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 동부와 연안 여러 섬들 및 동북 지구에 이주하여 생활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 광동인과 화북인 ]

 

하지만 중국에 가서 보면 황당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 달라 보이는 까무잡잡하고 작은 南중국인 ( 廣東人 ) 과 황화以北의 한 덩치하고 각진 얼굴의 北중국인 ( 華北人 ) 들 모두가...스스로 漢族이라고 한다는 사실 입니다.  그렇다면 漢族이라 하는 개념은 人種的인 구분이 아니라 文化的인 구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 할 내용이 있습니다.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유태인을 유태교를 믿고 스스로 유태인이라고도 하며 또한 남들도 유태인이라 부르는 민족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漢族들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漢나라 이후 中原에 살던 제 민족들이 문화적으로 동류의식을 형성하여 만들어진 개념이고, 이후 오랜 역사를 거쳐 中原의 앞선 문화를 수용하여 漢族化 된 이민족들도 포함 하여야 된다고 할 것 같습니다.

 

외부의 여러 민족들이 융화되어온 문화문명사적인 관계로 주변에 대한 우월의식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결론은 단 하나, 세계인구의 1/4을 차지하니 정력이 무지무지하게 센 민족이라는 결론 밖에는 없다는...

萬里長城의 의미 
 
사람이 담을 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로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존하기 위해서죠...그렇다면 어디에 담을 쌓을 까요 ?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곳까지만 담을 쌓겠죠...마지막으로 담을 쌓은 자 와 담밖에 있는 자 누가 강한 자 입니까 ?  물론 담밖에 있는 자이죠.

 

 

萬里長城이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유사 이래 漢族들은 계속 담을 쌓아 왔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니 하지만, 쌓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힘들게 쌓았던 이유는 그들의 영역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즉, 漢族 스스로 中原이라 불리는 장성以南 그리고 티�以東의 농사 짖기 좋은 비옥한 땅만을 그들의 터전으로 생각하였고 그 외의 땅은 관심조차 두지를 않겠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 장성을 쌓았던 이유 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만 가지고는 2 %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바로 장성밖에 있는 강력한 이민족들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힘으로 이들을 굴복 시킬 수 있었다면 스스로를 가두어버리는 장성을 만들 이유가 없었겠지요 ?

 

중국의 왜곡된 역사를 파악하려면 지역을 구분하는 萬里長城이 상징하는 의미를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漢族이 주인이었던 王祖 ? 
 
우리와 달리 중국 왕조들의 역사는 길지 못합니다.  때문에 수많은 王朝가 역사에 등장하였다가 사라지고는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조 중 의외로 漢族이 中原을 통일하고 100 년 이상 역사를 지속한 왕조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굳이 손을 꼽아보자면 漢, 唐, 宋, 明 라고나 할까요.

 

     

                          [ 한 ]                                                         [ 당 ]

 

그중 宋과 明은 약체 왕조였다고 많이들 알고 계시지만, 과연 소문대로 漢 과 唐 이 漢族의 극성기를 떨쳤던 왕조들일까요 ? 그리고 이들이 漢族들이 헤게머니를 잡고 유지하거나 창건한 왕조들일까요 ?

 

비록, 正史에는 이들이 中原의 주체로 기록되어 있지만, 진실을 절대로 속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역사의 곳곳에는 제대로 된 진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미 왜곡되어진 歷史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하나가 아니었던 中原 
 
삼국지를 읽다보면 장비가 적들과 마주 쳤을 때 호령하면서 울부짖는 말 중 꼭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 네 ! 이놈들 燕人 장비가 여기 있다. ”  스스로 春秋戰國시대 華北에 있던 燕나라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려 500 년전 존재하였던 제후국의 후예임을 자부 하였다는 이야기인데...소설에서 꾸며낸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


하지만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면 그 잔영이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南韓과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이 山東省입니다.  이곳에 돌아다니는 차량의 번호판을 보면 魯1234 하는 식으로 표기 되어 있습니다.  그 유래가 산동성이 2300년전 春秋戰國시대의 魯나라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외부적으로는 中華를 외치지만, 내부적으로는 뿌리 깊은 지역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지역의식이 漢族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內在되어 있었던 잠재의식과 결합 될 경우 中國 스스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마천의 史記가 전설로부터 漢武帝까지 2000 년 역사를 다루다 보니 소설로나 가능한 부분도 많습니다.  다만 문명이 시작되어 진시황의 통일까지는 별다른 왜곡은 없어 보입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라는 민족의식이 없었던 小國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이죠.

秦始皇이 두려워한 것 
 
中原은 원래 민족이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갈기갈기 찢어진 小國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하나하나 격파하여 中原을 아우르는 최초의 통일왕조가 등장하니 秦 ( BC 221∼BC 207 ) 입니다.  그리고 창업자 秦始皇 또한 그 무지막지함으로 너무나 유명하죠.

 

만일, 秦이 장수하였다면 오늘날 漢族 대신 秦族 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China 라는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秦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중국역사에 秦始皇의 등장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인물이 나온 이후로 中原을 하나로 만들고자하는 반복적인 시도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여러 장점도 많겠지만, 그보다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권력자의 욕심에서 시작 되었던 것 같습니다.  秦始皇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생각 됩니다.


중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곳곳에 나타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 (?) 이기 때문 입니다.  중국사는 계속 반복되는 분열과 통합의 역사였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주체가 漢族인것으로 인식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皇帝임을 자칭하였고 무덤조차도 믿기지 힘들만큼 웅장하게 만들었던 秦始皇이 무서워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文化와 文明이 헤게머니는 아니다 
 
秦始皇은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이 축조하였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만듭니다.  장성이북에 秦始皇이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워하였던 匈奴 라는 몽골-투르크계 國家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秦始皇은 평생의 집념으로 만든 제국을 유지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中原에는 더 이상의 적수가 없었지만, 초원에는 너무나 무섭고 강대하였던 흉노가 있었던 것 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장성을 쌓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흉노를 자극하지 않고 현상유지만 합니다.  이들을 자극하여 코피가 터진 것은 바로 다음에 이야기 할 漢나라입니다.

 

분명히 처음부터 대륙의 헤게머니는 초원의 유목민들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역사에서 주변으로만 등장하는 이유가 그들 스스로 기록한 史書가 없다는 사실이고 이로 인하여 대부분 漢族이 저술한 史書의 주변으로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역사에서도 계속 外傳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곡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들은 잦은 이동 때문에 文明을 이룰 만한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中原처럼 정주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文化와 文明을 꽃피울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漢族이 文化史나 文明史를 선도하였다는 것은 절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유목민처럼 기후도 나쁘고 척박한 땅에서 이동이 잦게 된다면 언제 건물을 짓고 글을 쓰고 하겠습니까 ? 하지만 文化와 文明이 앞선 자는 기록을 남겼고 그 속에서 역사의 헤게머니를 본인들의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25史 대부분은 漢族이 중심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漢族이 대륙의 헤게머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匈奴가 지배한 漢 
 
오늘날 漢族이라는 民族 개념을 성립하게 된 것은 漢 ( 前漢 BC 202~AD 5 後漢 AD 25~AD 220 ) 의 건국이후부터 입니다.  우리의 高句麗처럼 漢族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왕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중국문화의 기초를 이루었던 왕조임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漢을 건국하여 中原의 패자로 등장한 이가 漢高祖 劉邦입니다.  그는 秦始皇보다 뛰어난 帝王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만리장성을 넘어 흉노와 맞짱을 뜨고자 전쟁을 벌입니다...그 결과요 ?...白登山에서 포위당해 코피가 터지고 겨우 목숨을 구합니다. ( BC 200 )

 

유방이 목숨을 건진 것은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앞으로 흉노를 형님으로 모시고, 매년 조공을 받치며, 漢의 공주를 單于 (황제) 에게 첩으로 대대로 상납하겠다는 것입니다...즉, 漢이 흉노의 속국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약속을 못지키면 흉노로부터 맴매를 당하고 잘못했다고 비는 역사가 계속 됩니다.

 

                              

                        [ 흉노에 상납된 왕소군 ]                         [ 흉노전사 ]

 

누가 대륙의 지배자인지 결론은 확실합니다.  漢은 그들이 깔고 앉은 中原을 지키고자 국가적인 굴욕을 감수하였습니다.  흉노는 간접적인 지배에 만족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중원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면 유목민의 통일대륙제국이 역사에 먼저 등장하였을 겁니다.  史記에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漢武帝의 도전 
 
흉노와 漢의 이러한 신속관계는 景帝까지 약 60 년간 계속됩니다.  그러다 漢族들에게 最高로 손꼽히는 武帝 (BC 141∼BC 87) 가 등장하며 주종관계가 깨지게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 한나라 최대 강역도 ]

 

다음은 漢武帝의 대외관계사에 대해 흔히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는 주변 여러 민족과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정에 성공하여 대제국을 수립했다. 북방의 흉노에 대해서는 BC 129년부터 원정을 실시하여 흉노의 본거지를 고비 이북으로 격퇴하였고, 남방으로는 BC 111년 南越國을 멸망시켰고,

 

동방으로는 BC 108년 衛氏朝鮮을 쳐서 四郡을 설치, 장건의 원정으로 서역 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樓蘭과 姑師를 점령하고, BC 104년과 BC 102년에는 大宛國에 원정군을 보냈다. [ 엠파스 백과사전 인용 ]

 

과연 漢族의 광개토대왕이라 불려도 될만한 업적 입니다...하지만 이 내용이 전부일까요 ?


순간의 꿈 
 
武帝가 그동안 흉노에 당해왔던 치욕을 떨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넘어 진격한 것은 漢族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입니다.  50 여 년간 ( 집권 54년 동안 대부분 ) 전쟁으로 흉노의 보급로 서역을 점령하고 흉노를 내몽고로 몰아냄으로써 약화시키기는 하였지만 결코 점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漢의 최대 전성기라고 흔히 보는 강역도 실은 武帝의 절정기인 불과 20 여년간 이었습니다.  武帝 후반기에 이미 서역과 막북에서의 반격으로 고무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급속하게 강역이 축소되게 됩니다.

 

[ 대륙을 반분한 흉노와 한 ] 

 

武帝의 이러한 장기간 대외 전쟁은 漢의 재정사정을 약화시키게 되고 만년에는 농민반란이 여러 곳에서 잇따라 일어나
漢의 급속한 위축을 초래합니다.  결국 BC 91년에는 巫蠱의 난이 일어나 수도 長安이 전쟁터가 되며 그 이듬해 원정군은 괴멸당하고 흉노에 항복합니다.  결국 흉노에 대한 복수는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게 됩니다.

 

平和 와 몰락 
 
武帝의 뒤를 이어 집권한 昭帝 이후 흉노와 漢은 장기간 전쟁의 고통을 깨닫고 화친을 합니다.  이러한 평화유지의 버팀목은 두 王祖의 통혼관계 입니다.


漢의 劉氏흉노 왕족인 연제氏가 계속적인 통혼을 함으로써 서로 간을 지원하여 줍니다.  때문에 이후 漢과 흉노의 대규모 충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왕실은 하나의 핏줄로 섞이게 됩니다.  즉, 흉노의 연제氏가 漢에서 劉氏로 불리우게 되며, 흉노 劉氏 는 이후 中原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이러한 두 제국은 신기하게도 함께 내부 분열로 사라지게 됩니다.  漢의 멸망은 小說 三國志에서 볼 수 있듯이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이고, 흉노의 경우는 정권다툼에 의해서 입니다.

 

먼저 東西흉노로 나뉜 후 西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 BC 50 년 )  즉, 正史에서 없어졌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흉노 스스로 쓴 史書가 없기 때문에 일순간 없어진 것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대륙을 한번도 재패하지 못하였으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漢族의 무서움입니다.

 

이 당시의 史書는 漢族들이 기록한 내용밖에 없습니다.  外傳으로나 다루었던 흉노가 분열되고 일부가 단지 漢族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인데...漢族은 역사에서 이들을 완전히 멸종시켜 버린 것 입니다.

 

 [ 유럽사에 갑자기 등장한 훈 ( 북흉노 ) ]

 

東흉노 또한 이후 南北흉노로 또다시 분리되는데, 北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며 史學者들은 이들이 同時期에 유럽에 갑자기 등장한 훈 Hun 族 일 것이라 추측을 합니다.  南흉노는 지금의 내몽고지역에 자리 잡고 漢族에 융화되어 漢의 지배층으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분열시대의 개막 
 
지금까지 본 것처럼 漢族 最高의 왕조라는 漢 은 사실 대륙을 반분하였던 흉노에게 위협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협력을 하여야 유지되었던 왕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漢 멸망 후 中原은 三國時代를 거쳐 魏晉南北朝時代 라고 불리는 400 여 년간 大혼란기에 빠져 들게 됩니다. ( 사실 이러한 시대구분도 앞에서 설명드린 25 史 에 따른 구분 일 뿐 입니다. )  이상하게도 이 당시는 華南에서 주로 강역을 보존한 漢族도 그렇지만, 五胡라 불리며 北朝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민족들도 이합집산을 함께 하였던 시기입니다.

 

[ 중원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귀족 ]


이러한 大혼란기에 흉노의 후예들이 中原의 패자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앞전의 설명처럼 南흉노가 漢의 주류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갑니다.  예를 들어 三國志에서 조조의 꼬붕으로 등장하는 하후돈 같은 夏后氏는 흉노왕족 姓氏입니다.  이것은 西洋史에서 게르만이 로마에 동화되어 갔던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후 서양사의 주역은 게르만이 되죠.  바로 東洋史의 흉노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흔히 보아오는 역사책에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기록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즉, 漢 과 더불어 漢族 역사상 또 하나의 대제국이라 일컫는 唐의 정체성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 입니다.


유목민國家에 대한 이해 
 
東洋史를 읽다보면 앞에 장황하게 설명한 흉노뿐 아니라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잠간씩 등장 합니다.  예를 들어 흉노와 동시대에 등장하는 다른 이민족이나 국명으로 월지月氏, 동호東胡, 오손烏孫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中原의 왕조만 바뀌면 갑자기 이들이 사라지고 엉뚱한 국가나 민족들이 등장하고는 합니다.

 

그 이유는 漢族들은 항상 본인들의 시각에서 이들을 정의하였기 때문 입니다.  예를 들어 滿洲族을 시대에 따라 肅愼 (周), 邑婁 (漢), 靺鞨 (唐), 女眞 (宋) 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部族名일수도 있지만, 흉노처럼 國名 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민족의 전통을 단절 시키려는 漢族의 흉악한 (?) 시도가 아닌가도 생각 됩니다.

 

유목민들은 광대한 지역에 소수끼리 이동하면서 생활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수의 집단은 대부분 氏族 이나 部族 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A부족이 초원세계의 헤게머니를 잡으면 차츰 인근부터 A국가 이름으로 쉽게 동질화 합니다.

 

위에서 말한 월지, 동호, 오손들도 흉노의 성장과 함께 흉노로 흡수가 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A가 일순간 없어지기도 하고 B부족이 헤게머니를 잡으면 B부족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몽골-투르크계로 역사에 등장하는 대부분 유목민 국가들이 이런 형태로 존재 합니다.  즉, 흉노, 돌궐, 거란, 몽골이 각각 큰 차이가 없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렸으며 단지 그때마다 대표 部族들만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야인시대에서 을지로 나와바리를 차지하고 있는 X파 건달들이 종로파가 쌜 때는 종로파의 하부조직으로 있다가 종로파가 몰락하고 동대문파가 득세하자 동대문파 간판아래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처럼 이해하면 될까요.

 

匈奴 후예들의 변신 
 
後漢 말기 흉노국가의 제 부족들은 흉노의 실체가 없어지기 시작하자 서서히 漢族에 동화되거나 부족으로 분화되어 역사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조 혼란기 북조의 패자로 활약하는 흉노, 갈, 선비 鮮卑 등이 그러합니다.

 

그중 흉노 ( 이때부터는 國家로서의 흉노라기보다 部族으로써의 흉노) 는 劉淵 ( 흉노 劉氏 ) 처럼 부흥 漢王朝 를 창건 ( 후에 前趙 라고 개명 304∼310 ) 하고, 흉노와 漢의 전통을 함께 물려받으려 하였을 만큼 헤게머니를 승계한 집단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흉노제국의 일파로 있었던 갈, 선비 등도 이러한 혼란기에 여러 국가들을 세우고 사라지고는 합니다. 이때 선비는 단석괴 檀石槐 라는 지도자로 일시적인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나

 

모용부 慕容部 ( 西秦, 前燕, 後燕, 西燕, 南燕, 吐谷渾 건국 ) ,
우문부 宇文部 ,

단부 段部 ,

걸복부 乞伏部 ( 西秦 건국 ) ,

독발부 禿髮部 ( 南凉 건국 ) ,
탁발부 托跋部 ( 代, 北魏, 東魏, 西魏, 北齊, 北周 건국 ) 등의

 

다시 여러部로 나뉘어서 각각 국가를 건설했다가 사라지는 등 군옹할거의 시대 였습니다.

 

즉, 漢末부터 唐의 건국까지 400 여년의 中原은 漢族들이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초원민족들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특히, 이중 탁발부가 앞으로 설명할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統一王朝 의 차이 
 
이러한 혼란기를 정리하고 400 년 만에 中原을 통일하고 등장한 왕조가 있으니...바로 高句麗 의 영원한 밥... 입니다.  戰國시대를 통일 한 800 년 전 秦의 재판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秦 처럼 단명왕조로 끝나고 뒤이어 漢 과 맞먹는 中原 의 부흥기를 이끌었다는 이 출현 합니다.

 

            

                                 [ 진의 시황제 ]                                         [ 수의 문제 ]

 

그런데 隋 - 唐 의 통일 및 제국형성 과정은 앞전의 秦 - 漢 과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秦始皇 은 秦 이라는 제후국에서 출발하여 주변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하여 통일제국을 만들었지만, 隋文帝 는 그러하지 않았다는 사실 입니다.

 

隋 는 역사의 흐름 속에 이름으로만 분열 되었던 지역이 하나로 바뀌는 과정 중, 단지 마지막에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 등장 과정도 왕위찬탈이라는 방법에 의한 것이었고, 이후 완결편으로 등장한 唐 또한 왕위찬탈로 수립된 정권이었습니다.


군웅할거시대는 列國志나 三國志演義 처럼 소설의 배경으로 좋기는 하지만, 隋文帝 나 唐高祖가 주요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정복이나 대결이 아닌 모략과 찬탈의 주인공들이기 때문 입니다.


統一과정에 대한 이해 
 
앞으로 있을 唐 의 정체성을 말하려면 먼저 남북조시대의 통일과정을 설명 할 필요가 있습니다.  三國志演義 를 읽다가 마지막에 웃기는 것은 최후의 승자가 엉뚱한 놈이었다는 것이죠.  그토록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유비, 조조, 손권이 아닌 司馬氏 라는 사실 입니다.

 

어쨌든 魏 를 선양혁명 형식으로 찬탈하여 건국된 司馬炎晉 ( 265∼316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南흉노의 劉聰 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이때 도망간 晉의 잔당들이 江南 에 東晉 ( 317∼420 ) 을 건국하여 남북조시대를 개막합니다.  이 때부터 역사의 주역은 흉노의 후예들이 주도하였던 北朝 의 여러 나라들 입니다.

 

[ 수의 통일 ]

 

먼저 흉노 탁발부가 北魏 ( 또는 東魏, 拓跋魏 386∼550 ) 를 건국하는데, 孝文帝 때 均田制, 祖庸調制, 三長制, 俸祿制 를 시행하였고 이와 같은 제도는 唐 까지 國制 가 됩니다.  즉, 唐 까지 국가의 기본 형태가 바뀌지 않았다는 겁니다.

 

北魏 는 東西로 분열하였는데 ( 535 년 ) 東魏 는 실권자 高洋 에게 망하여 北齊 (550∼577) 가 되고 西魏 는 실권자 宇文氏 가 제위를 빼앗아 세운 北周 (557∼581) 에 망합니다.  그리고 北周 가 北齊 를 병합하여 북조지역을 통일 합니다.

 

그 후 北周 왕실의 실력자이자 외척인 楊堅 이 왕위를 찬탈하여 나라를 건국하니...이것이 바로 隨 ( 581~618 ) 입니다.  그리고 東晉, 宋 ( 420∼479 ), 齊 ( 479∼502 ), 梁 ( 502∼557 ) 으로 이어지던 남조지역의 마지막 약체국 陳 ( 557∼589 ) 을 무너뜨려 中原 을 통일합니다.

 

斷代史의 복잡함 
 
앞에서 설명한 남북조의 통일과정은 너무 복잡합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화 한다면 간단하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국가들이 흥망을 하였어도 근본적인 헤게머니의 중심은 흉노의 선비계 부족인 탁발부를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는 사실 입니다.


또한 국가들이 정복이나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왕위찬탈이라는 집권층간의 파워게임으로 바뀌었다는 것 입니다.  국가의 실체는 그대로 있었는데 정권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北魏 가 만들었던 제도가 唐 까지 이어졌던 것은 말 그대로 정부만의 교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때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식으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입니다.

 

더욱이 北魏, 東魏, 西魏 하면서 나누어 부른 것도 후세의 史家 들이 헤게머니를 중심으로 분류하여 부른 것이지 그들의 자칭으로는 모두 魏 였습니다.  조금 특이한 놈들이 나라이름을 周, 齊 등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즉, 魏 라는 국가는 그대로였고 단지 집권자만 바뀌었을 뿐인데 사가들이 각각의 왕조로 나눈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나오는 이유는 이 씨리즈 앞에서 설명드린 이유 때문 입니다.  바로 후세에 기록한 正史들이 대부분 왕조별로 각각 끓어진 斷代史 로 보았기 때문 입니다.  때문에 북조는 탁발부 왕조라고 단순히 생각하시면 되겠고, 남조는 中原에서도 江南으로 밀려난 漢族들의 왕조로 보시면 됩니다.

 

[ 정권의 이름만 바뀐 흉노의 후예 ]

 

그리고 이를 통일한 隋文帝 도 이전 정권의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직계 조상은 장성이북 내몽고에 있던 南흉노의 후손입니다.  즉, 통일왕조 隋 는 漢族 을 피지배인으로 하여 등장한 흉노 후예의 국가였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漢 과 만리장성을 경계로 길항을 계속하던 흉노가 이제는 中原 까지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원의 世界大戰 
 
흉노후예로 中原 을 지배한 隋 는 흉노가 이뤄보지 못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때문에 초원에 남아있던 몽골-투르크계의 또 다른 일파인 突厥 과 대립하고, 東아시아 또 하나의 역사중심 퉁구스 ( 東夷 ) 를 정벌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퉁구스계의 지배자는 高句麗 였습니다.  高句麗 와 隋 의 전쟁 ( 612 ~ 613 ) 은 말 그대로 초원의 世界大戰 그 자체 였습니다.  이 처절한 전쟁사는 다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퉁구스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승리였지만, 패전국 隋 는 나라가 망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高句麗 와 隋 그리고 이후 唐 의 전쟁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韓民族 과 漢族 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漢族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때입니다.)  韓民族 의 원류인 高句麗 가 주축이 된 퉁구스계와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투르크계 문명간의 세계대전이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25史 중 그나마 역사왜곡이 덜되게 쓰 여진 마지막 正史 인 隋書 에 이들의 패전기록이 너무나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唐 초기 魏徵, ( 580 ~ 643 ) 에 의하여 작성된 隋書는 기록자 본인이 전쟁의 주체와 상관이 없는 피지배인 漢族 이기 때문에 그나마 객관적으로 적을 수 있었습니다.

 

唐은 漢族국가가 아니다 
 
드디어 唐 ( 618∼907 ) 으로 이야기를 돌려 봅니다.  隋 의 실정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봉기하여 건국된 것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제 답변은 아니올시다 입니다.

 

唐高祖 李淵 (618∼626)隋煬帝 와 이종사촌간 이었습니다.  또한 이전 정권인 北周 의 왕가 宇文氏, 隋 의 왕실 楊氏 등과 동향이며, 서로 통혼한 사이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무천진군벌 이라고 합니다.

 

 

[ 사촌지간이던 수양제와 당고조 ]

 

즉, 이연 또한 北魏 부터 정권의 핵심에 있던 탁발부 사람으로 흉노의 후예입니다.  또한 이전 북조의 다른 왕조처럼 선위 받는 식으로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한 나라입니다.  때문에 唐 은 흉노중원국가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비족이 漢族 등과 통혼하여 北族的 요소를 계승하고 있는 황실이나 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자집단을 중국 역사가 陳寅恪 이 관롱집단이라 칭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중국 역사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동북공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헤게머니를 쥐고 있던 이민족들을 은근슬적 漢族化 함으로써 이민족에 의한 피지배의 역사가 아닌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고자하는 漢族 들의 역사왜곡 입니다.

 

隋書 까지 남북조 기록은 같은 흉노인 唐 이 기록하였으므로 탁발부가 역사의 주체로 기록되었지만, 唐書 는 漢族 국가인 宋 에서 만든 기록이기 때문에 唐 에 대한 왜곡이 심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몽골인이 생각하였던 唐 
 
唐 이 몽골-투르크계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元史 와 우리나라의 高麗史 에 같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대몽항쟁에서 항복한 高麗 高宗 은 태자 ( 고려 24 대 元宗, 1219 ~ 1274 ) 을 몽골에 볼모로 보내게 됩니다.  그때 정은 몽골제국의 실력자로 후에 元 을 건국한 쿠빌라이 ( 1215 ~ 1294 世祖 ) 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30 여년을 항쟁하다 패전한 고려의 태자를 맞은 쿠빌라이는 이렇게 감격하였다고 합니다.

 

“ 唐太宗도 무너뜨리지 못하였던 高(句)麗 의 태자가 나를 따르게 되다니...”

하면서 자기 딸을 주고 극진한 대접을 하여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 당태종과 그를 닮고 싶어하던 흉노의 후예 쿠빌라이 ]

 

즉, 당시에 高麗 가 高句麗 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 하였던 것이고,  몽골 또한 그들의 선조인 흉노가 세운 唐을 당연히 그들의 역사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唐太宗 李世民 은 몽골의 지배자들이 본받고 싶었던 선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中原에서 항상 찌그려져서 살던 漢族들이 요즘 동북공정이랍시고 高句麗를 중국의 지방 정권이니 뭐니 하고 입에 개거품 물고 떠들죠.  참으로 치매에 걸린 건방지기 이를데 없는 올챙이들 입니다.

 

世界帝國이 아니었던 唐 
 
唐 에게 있어 최대의 적수는 같은 몽골-투르크계지만, 南흉노처럼 中原 으로 남하하지 않고 초원에 남아 힘을 길러왔던  돌궐 이었습니다.  북조시대부터 唐 말까지 돌궐과 탁발부는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흉노와 漢의 대립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두 주역이 모두 몽골-투르크계라는 사실 이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唐高祖 가 隋 를 무너뜨리기 위해 長安 으로 진격 할 때, 무력의 기반이 될 만큼 밀접한 관계이기도 하였지만, 唐太宗 전성기 때 제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 657 년 )

 

[ 돌궐과 함께했던 잠시동안의 세계제국 당 ]

 

唐 이 新羅 와 연합하여 高句麗 를 무너뜨린 것 ( 668 년 ) 은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퉁구스계 전체를 지배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도에는 新羅 가 건재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연합한 퉁구스제국 渤海 의 등장으로 만주로 더 이상 강역을 확대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이때까지 약 20 여 년만이 唐이 세계제국으로 존속한 기간 입니다.  東돌궐의 독립 ( 682 년 ) 과 발해의 건국 ( 699 년 ) 으로 순식간에 唐 은 그 강역을 중원으로 좁힐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멸망까지 그저 그런 中原의 帝國으로만 존재 합니다.

 


唐玄宗 이 돌궐의 제왕 퀼 테킨의 죽음을 애도하며 받쳤던 돌궐비문의 내용은 唐 이 돌궐과 협력을 하여야 존속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漢族 들은 이러한 역사를 漢族이 세운 世界帝國 의 시대라고 합니다.  唐書 는 漢族 이 세웠던 宋 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唐 을 漢族 의 역사에서 제외한다면 漢族 들은 피지배 역사로만 존재하게 되므로 漢族 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으며  이왕 왜곡하는 바에 세계제국이라 뻥치고 있는 겁니다. (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계시지 않으셨는지요 ? )

 

왜곡 할 수 없는 草原의 시대 
 
이제부터는 글자로 고쳐서 또는 돌려서도 이야기 할 수 없는 漢族 대망신의 시대입니다.  唐 멸망 후, 中原 이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宋 이라는 漢族 왕조가 모처럼 등장합니다.

 

하지만, 宋 ( 960 ∼ 1127 南宋 1127 ∼ 1279 ) 하면 최고의 문약한 약체 왕조라는 이미지가 뚜렷합니다.  물산과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경제적으로 발전하였고 문화적으로 융성하였으며, 100 萬의 상비군과 3 萬의 관리가 나라를 다스렸는데도 왜 이러한 이미지가 남아 있을까요 ?

 

     

                [ 요에 눌린 송 ]                                     [ 금에 쫓겨난 남송 ]

 

바로 그 이유는 초원의 세력으로부터 계속적인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건국당시부터 몽골-투르크계의 契丹 ( 遼 907 ∼ 1125 ) 으로부터 대륙의 패권을 빼앗겨 조공관계를 맺었고, 또 다른 외세인 퉁구스계 女眞 ( 金 1115 ∼ 1234 ) 을 이용하여 遼 를 물리쳤으나, 결국 金 에게 中原 을 내어주고 조공관계를 맺은후 南宋 이라는 이름으로 ( 물론 자칭으로는 여전히 宋 ) 겨우 보존 할 수 있었던 왕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최후의 일격은 다시 한번 몽골-투르크계로부터 당하죠...바로 몽골제국입니다.  몽골에 의하여 南宋 이 멸망당하고 元 에게 끝까지 저항한 죄로 漢族 들은 최하층 백성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도저히 왜곡 하려고 해도 왜곡 할 수 없는 사실 입니다.

 

하지만, 漢族 스스로 宋 이 약한 왕조이고 굴욕적인 왕조였다고 쓰고 싶었을 까요 ?   宋史 는 그 이전에 얼마나 역사왜곡이 심하였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자료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漢 과 宋 의 차이는 없었다 
 
宋 이 약한 정권이었다고 모두 알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특별히 宋 만 약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어 온 역사의 반복 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강력하였다고 漢族 들이 주장하던 漢 또한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漢 또한 초원의 흉노로부터 끓임 없는 지배와 간섭을 받아온 국가입니다.  도대체 宋 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여기서 또 하나의 역사왜곡을 알 수 있습니다.

 

흉노는 漢族 들이 주체가 되어 기록한 史書 에서 外傳 으로나 등장하였을 뿐 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당시 역사 주체를 漢 으로 잘못 알고 있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셨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씨리즈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문화와 문명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헤게머니는 아닙니다.  하지만, 宋 당시의 초원국가들은 별도로 遼史 와 金史 로 기록 되어 있고, 이것은 25史 의 일부 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란과 여진이 흉노보다 中原 에 더 강한 압박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기록으로 남긴 역사의 위력 ]

 

遼史 와 金史 는 몽골의 元 에 의하여 작성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漢族 이 왜곡을 할 수 있는 틈이 없었습니다.  만일, 다음 정권이 元 이 아닌 漢族 국가였으면 거란이나 여진의 역사 또한 外傳 으로 처리 하였을 겁니다.  또한, 25史중 魏書, 北齊書, 周書, 隋書, 北史, 唐書, 新唐書, 遼史, 金史, 元史, 新元史 는 엄밀히 말하면 漢族 의 史書 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다면 中原 역사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   또한 25史 를 正史 라는 하나의 통칭 史書 로 정리 한 것도 이민족 淸 에 의해서 입니다.

 

최고의 수모를 당한 漢族 
 
징기스칸에 의해서 1204 년 창업된 몽골제국은 몽골이전 모든 지배자들이 꿈꿔왔던 퉁구스係, 몽골-투르크係, 漢族 을 한꺼번에 지배하는 최초의 제국이 됩니다.  그들의 선조중 최고의 극성기를 열었던 唐太宗 도 이뤄보지 못하였던 역사였습니다.

 

광대한 점령지를 나누어 다스린 몽골은 中原 에 元 ( 1271∼1368 北元 1368~1635 ) 을 건국 하여 지배합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독특한 방법으로 합니다.  제국의 백성을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분화하여 통치를 하였던 것 입니다.

 

 

[ 색목인 ]

이 때 최하층민이 漢族 이었습니다.  이전에는 漢族 이 쉽게 이민족 왕조의 속민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권력자들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선 漢族 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특히 생산의 주체인 농민들은 정권이 바꾸어도 생활의 변화가 없이 생산과 수탈을 당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누가 잡는지는 관심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元은 정권 핵심부에 漢族 의 등용을 철저히 막았고, 경제적으로는 색목인이라 불리는 아랍계를 중시하여 漢族 이 발붙일 공간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이때부터 막연하게만 있었던 漢族 의 민족의식이 고양됩니다.

 

明 이 장성을 넘지 않은 이유 
 
강남에 자리 잡고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던 南宋 지역은 설명한바와 같이 몽골지배 시기에 많은 차별을 받습니다.  때문에 몽골제국 지배하의 어느 곳 보다 반몽사상이 심하였고, 이 때문에 元 의 쇠퇴기에 明 이 漢族 들의 지지를 받아 창건 될 수 있었던 토양을 제공 합니다.

 

明 ( 1368 ∼ 1644 ) 은 유일하게 강남에서 창업되어 中原 을 재패한 국가로 기록 됩니다.  1368 년 朱元璋 이 明 을 건국하여 元 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냈습니다.  비록 元 지배 시 많은 수모를 겪었지만 漢族 은 元 을 멸하지 못하고 단지 장성까지만 북진을 합니다.

 

          

[ 장성을 넘지 않은 명의 강역 ]

 

물론, 元 의 잔존세력 ( 北元 ) 의 반격도 매서웠지만, 보다 정확한 이유는 앞에서도 누차 설명 드린바와 같이 漢族 스스로 그들의 강역을 장성이남 으로만 보았습니다.

 

유사이래 계속 그렇게 생각하여 왔듯이 만리장성까지만 漢族 의 강역으로 보았던 것이고 明 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장성이북 황무지는 그들이 굳이 피를 흘리며 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을 만큼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관이 없었던 지역 이었기 때문입니다.
  
明 의 역사왜곡 
 
漢族 들이 자신의 역사를 쓴 경우는 당연하겠지만, 이민족들은 中原 지배의 기록을 남겼을 경우라도 전왕조가 비록 漢族 국가임에도 되도록 마지막까지 기록하려 하였습니다.

 

南北朝, 隋 의 혼란기를 남조의 漢族 이 통일 하였다면 단지, 外傳 으로 만 처리 되었을 무수한 단명 왕조들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이유는 唐 이 흉노의 탁발국가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조의 왕조들이 모두 흉노 후예들의 국가였기 때문에 누락이 될 수 없었겠죠.

 

그리고 遼史, 金史 가 남아있는 이유는 기록의 주체가 元 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遼史 와 宋史 를 보면 알겠지만 이민족들은 남들의 역사도 끝까지 기록 하였습니다.

 

[ 역사에 기록된 서요와 남송 ]

 

遼史 는 그들의 후예인 西遼 ( 카라키타이 ) 까지, 宋史 는 南宋 의 역사까지 끝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淸 이 기록 하였던 明史 또한 南明 의 멸망까지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漢族 의 明 은 어떠하였습니까 ?   그들이 멸망시키지도 못하고 단지 강역을 장성이북으로만 몰아낸 元 을 明 의 건국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  元 은 계속 존속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비록 역사에서 北元 으로 지칭 당하고 있지만 元 은 淸 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때까지인 1635 년까지 존속 합니다.  하지만 漢族 이 저술한 元史 는 단지 1368 년에 元 이라는 실체가 없어진 것으로 기록 하고 있습니다. ( 무려 270 여년의 역사를 삭제하여 버린 것 입니다. )

 

그나마 元史 마저 기록하지 않았다면 나중에라도 中原 에서 漢族 들의 어떠한 인연도 연결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이러한 것도 宋 이 唐 의 역사를 漢族 의 역사로 왜곡 하였던 전통에서 배운 것 이었을 겁니다.  요즘 元 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하니 참으로 징그러운 역사왜곡의 전통 입니다.

 

내세울 것이 너무 없다 
 
요즘 중국에서 明 의 鄭和 ( 1371 ~ 1434 ) 선단의 항해에 대해 위대한 漢族 의 세계진출이라고 떠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漢族 스스로 唐, 元, 淸 을 漢族 의 역사라고 왜곡을 하던 지금까지 작태에 비추어 웃기는 일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明 의 정화보다 唐, 元, 淸이 더 뛰어난 세계진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화를 내세우는 이유는 아무리 왜곡해도 그들 역사에서 漢族 이 나서서 대외진출을 하였던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화는 정복자가 아니고 통상임무를 띄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정화가 漢族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믿던 越南係 라는 것 입니다.  鄭 씨 성도 明 에 의해서 하사받은 것 입니다.

 

[ 만주족의 청 ]

 

明 도 이전의 漢族 왕조들처럼 中原 에서만 그럭저럭 머물다가 퉁구스계로 몽골제국의 전통을 승계한 淸 ( 1616∼1912 ) 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淸 은 사상 두 번째로 퉁구스, 몽골, 漢族 을 아우르는 역사상 최대강역의 대제국을 건설 합니다.  그리고 淸 이 이룩한 최대강역은 오늘날 中國영토의 기본이 됩니다.

 

淸은 이전의 몽고와는 달리 봉금정책 같은 몇몇의 제약을 빼놓고는 漢族 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중용합니다.  때문에 中原 에 수립된 모든 왕조를 살펴 볼 때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漢族 들이 고분고분 하지는 않았습니다. ( 참으로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

 

가면을 쓴 中華民國 
 
中原 에 새롭게 출몰한 또 다른 이민족인 西洋 의 도발로 淸 이 쇠퇴하자 1850 년 태평천국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漢族 들은 멸만흥한 ( 滅滿興漢 ) 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서서히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1911 년 辛亥革命으로 淸은 멸망하고 中原 역사상 처음으로 전제국가가 아닌 中華民國 이 수립 됩니다.  아래 세번째 신해혁명의 지도를 보면 주로 독립을 선언한 지역이 漢族 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꼼지락 거리던 지역들 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중화민국 또한 처음부터 모든 民族이 함께 하려 하였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1850 년 태평천국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멸만흥한을 내걸은 漢族 들이 성립한 또 다른 漢族 전제국가 일 뿐 이었습니다.  국호 民國 처럼 오늘날 중국이 인민의 주권에 의해서 이뤄진 나라인 가요 ?  세습제는 아니지만 제국을 지향하는 모습이 변형된 전제국가임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 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漢族 들은 지금까지 그들 스스로 자신의 강역이라 생각하던 티베트以東, 장성以南 의 중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淸 이 개척하였던 모든 강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로 세 가지로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첫째, 文化 에 대한 우월의식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漢族 이 이루었던 인류 문화사의 업적을 깍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동아시아의 文化 와 文明 을 선도하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이러한 문화와 문명의 선도가 대륙의 헤게머니를 잡았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말씀 드렸습니다.


특히, 그들은 중화사상이라는 말도 안돼는 사상으로 이민족들을 야만시 하였습니다.  經濟的, 文化的으로 앞섰다는 자부심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동안 이민족들에게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을 것 입니다.

 

[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 ]

 

하지만, 역사에서 그들을 지배하였던 이민족들이 中原 의 漢族文化 를 대부분 적극 수용하였고 존중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평화가 이루어지고는 하였습니다. 

 

때문에 강역을 확대하여 처음부터 우월적인 문화를 이용하여 이민족을 형식적이나마 이전처럼 백안시 하지 않고 미리 지배하여 차후 발생 할지도 모를 또 다른 도전을 막고자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둘째, 이민족에 대한 공포 
 
지금까지 살펴 보아왔던 것처럼 유사 이래 漢族 은 한번도 대륙의 패자로 있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中原 에만 머물며 농사짓고, 책이나 쓰고, 사상이나 생각하였습니다.  漢, 宋, 明 처럼 많은 군비를 갖췄으면서도 소수의 이민족 침탈과 지배에 항상 시달려 왔습니다.  오죽 하였으면 만리장성이라는 괴물이 나왔을 까요

 

때문에 漢族 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외부에 보였다가는 항상 이를 노리는 외세의 표적이 되고는 하였기 때문에 淸 이 하였던 것을 배워 이번에는 漢族 이 주체가 되어 모든 민족을 지배 하는 것이 바로 中原 의 漢族 자신들을 또한 쉽게 보존하는 지름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 이민족에 의한 굴종의 역사 ]

 

더구나 이전처럼 말과 칼이라는 무력보다 현대화된 무기체계는 인구수가 많은 漢族 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때문에 압도적인 인구수로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만주, 막북, 서역에 진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漢族 은 中原 에만 머물지 않고 이민족 지역사회에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즉, 이민족의 지역에 漢族 이 다수가 됨으로 해서 역사 이래 계속 되었던 이들로 부터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 할 수 있는 효과를 노린 것 입니다.

 

셋째, 經濟的 목적 
 
이전 농경사회 漢族 의 강역은 그야말로 비옥한 곡창지대였고 기후도 좋았습니다.  때문에 이들 강역만 보존한다면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부족함을 느껴왔던 황무지의 이민족들이 中原 을 노리던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漢族 이던 이민족이던 황무지라 생각하였던 초원의 땅은 경제적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漢族 도 굳이 이를 노리지 않았고 이민족들도 대륙의 패자가 되면 중원으로 남하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땅은 그 밑에 묻혀있는 경제적 가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급격히 늘어난 漢族 인구를 수용 할 땅이 필요로 하게 된 것 입니다.

 

때문에 처음으로 대륙의 패권을 잡은 漢族 의 국가인 中國 이 이를 놓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민족이 경제적인 목적에서 중원을 노렸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歷史 에 대한 범죄 
 
러시아, 캐나다, 미국, 호주, 브라질처럼 광활한 영토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도 지금 점유하고 있는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보지만 그 땅위에 있었던 역사는 별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역사는 미국의 헤게머니를 차지하고 국가를 수립한 앵글로 색슨의 역사와는 별개로 그 지역에 있었던 역사로만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타타르의 멍에라던 몽골지배 250 년의 역사를 그들 땅에 대한 피지배의 기간으로 볼 뿐이지 러시아의 역사로 보지는 않습니다.

 

 

즉, 지금까지 인민들은 있었지만 인민들을 지배하였던 헤게머니의 주체를 따져서 전통을 승계하는 것으로 역사를 보아야 하는데 漢族 의 중국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인류 문화사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려 합니다.  바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왜곡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점유하고 있는 땅에 많은 漢族 들이 이주하였고, 앞으로도 차지하고 싶으니까 이러한 흐름을 단절 시키고 자기 것으로 하려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東北工程 
 
漢族 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스스로 잘난 漢族 의 세상과 오랑캐 이민족의 세상으로 세계를 나누어 왔고 역사도 그렇게 기술 하여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모든 역사를 漢族 의 역사로 이미 왜곡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淸 의 경우는 만주족이 현재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므로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웠던 국가로 주장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별도의 독립국가가 있는 몽골,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역사라 할 수 있는 唐, 元 의 역사를 어떻게 자기 역사로 주장 합니까 ?


이민족 에 의한 피지배의 시기로 해석하는 것이 극히 타당함에도 이들은 절대 이를 인정 하려 하지 않습니다.  동북공정도 지금까지 보아온 오래된 역사왜곡의 일부분 일 뿐입니다.


최초로 만주지역의 제국으로 등장한 高句麗 의 역사를 唐, 元 처럼 왜곡하여야 두고두고 남들에게 자기의 역사로 세뇌 시킬 수 있고 이후에도 연고를 주장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중국사에 있어 漢族 들은 中國 이전까지 단, 한번도 대륙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대륙에 춘추전국시대가 다시 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겁니다.  만일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하나가 된다면 그들은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근거로 연고권을 주장 할 겁니다.  처음으로 대륙의 패자가 된 漢族 들이 이러한 천우신조의 기회를 놓치려 하겠습니까 ?

 

자료를 준비하면서 제 3 국의 싸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우리역사가 이미 왜곡되어 있는 현실을 똑똑히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이미 중국이 왜곡하여 놓은 자료를 인용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제서야 우리는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흥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동북공정 주장에 대해 분노하기에 앞서 우리 또한 그동안 漢族 들이 왜곡하여 써놓은 대륙의 역사를 그대로 읽어만 왔던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혹시 회원님들도 지나간 역사를 漢族 이 헤게머니를 잡고 지배하였던 역사로 잘 못 알고 계시지는 않았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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