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군 B-52 폭격기의 멋진 모습들














미공군 B-52 폭격기의 멋진 모습들
□ 개발배경 ㅇ 미국은 제2차 대전이후 재래식 폭탄, 순항 미사일, 전략 핵폭탄 등을 탑재하고 대륙간을 고공 침투하여 폭격하는 것이 전력 운용상 효율성이 있고 평시 전략적 억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 하였다. ㅇ 미국은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1948년 7월에 발주하여 1952년 4월에 거대한 B-52 1호기 의시험비행에 성공하였고 1954년 평가시험용 B-52A형 3대가 생산되었다.
□ 주요제원 및 성능 전 장 160ft 기 폭 185ft 기 고 40ft 8inch 최대이륙중량 488,000lbs 추 력 B-52G : 13,750lbs × 8, B-52H : 17,000Ibs × 8 최대비행거리 G : 12,070km(7,500miles), H : 16,093km(10,000miles) 순항속도 Mach 0.77 최대상승고도 55,000ft 최대수평속도 Mach 0.90 승무원 6명(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레이더항법사, 전자전 장교, 화력통제체계 장교)
□ 특성 및 성능개량 ㅇ B-52의 날개는 고익 단엽기이며 8개의 젯트 엔진이 2개씩 4개 포드에 장착되어 있다. B-52에는 전자광학 관측장비(EVS: Electro-Optical Viewing System)인 AN/ASQ-151이 저고도 침투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장착되었고, 적외선 전방탐지장치(FLIR: Forward Looking Infra-Red)인 AAQ-6나 고감도 TV카메라인 AVQ-22가 장착되었다. ECM장비로는 AN/ALQ-117 또는 진보된 AN/ALQ-155가 장착되고, 레이더 경보수신기(RWR: Radar Warning Receiver)는 ALR-46이 장착되었으며, 저고도 침투임무 중 항법과 무장투하 능력 향상을 위한 공격용 전자 장비(OAS : Offensive Avionics System) 등이 장착, 운영되고 있다. ㅇ 1954년 실용 시험용의 B-52A형 3대가 완성되었으며 곧 이어 양산형의 B-52가 생산되어 1955년 부터 미공군에서 취역을 개시하였다. ㅇ 그후 B-52는 변모하는 작전환경에 맞게 성능향상을 시도하여 B-52 C, D, E, F와 같은 개량형의 생산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F형까지는 모두 10메가톤급 또는 24메가톤급의 수소폭탄 4발을 탑재하는 폭격기형이다. ㅇ 1958∼1960년에 생산된 B-52G형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성능개량이 시도되었는데, 그 내용은 날개 및 내부날개 연료탱크의 재설계와 수직안정판(Tail Fin)의 축소, 후방 기총수의 전방 이동, 그리고 공대지 하운드 도그(Hound Dog) 미사일과 단거리 공격미사일(SRAM: Short Range Attack Missile)을 탑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었다. ㅇ B-52H는 B-52를 대체하기 위한 B-70 프로젝트가 취소됨으로써 1961년 소개된 B-52의 마지막 개량형이며, Pratt & Whitney사의 TF33터보팬 엔진을 장착함에 따라 연료소모를 감소 시키면서도 더 큰 추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저고도 비행에 무리가 없도록 구조적인 변경을 실시 하고 0.5inch 후방기총을 20mm 개틀링식 기관총(Gatling Gun)으로 교체하였으며, 1962년까지 총 102대의 B-52H형을 생산함으로써 B-52시리즈의 생산은 모두 종료되었다.
□ 운용개념 ㅇ 전략무기 투발능력을 보유하므로 전략적 전쟁억제 역할을 수행 ㅇ 대륙간 고고도 침투 비행 및 폭격 임무 수행
□ 주요 탑재장비 ㅇ 무 장 - 0.5inch 기관총(G형, 꼬리부분) × 4 - 20mm 발칸포(H형 꼬리부분) × 1 - SRAM, 핵폭탄(내부) × 8 - AGM-86 BALCM(외부) × 12 - Harpoon(G형) × 8~12
□ 운용국가 및 실전사례 ㅇ B-52는 1955년부터 미공군에서만 운용되었다. B-52 A, B, C형을 합해 88대, B-52D형 170대, E형 100대 및 F형 89대를 생산하였는데, 이상의 B-52 항공기는 모두 퇴역한 상태이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B-52 G형은 193대, H형은 102대가 생산됨으로써 B-52의 총생산 대수는 742대에 이른다. ㅇ B-52는 베트남전과 걸프전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베트남전에서의 융단폭격은 유명하다. 베트남전에서 B-52의 출격횟수는 총 124,500회로서 3,735,000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또한 최근의 걸프전에서 B-52는 재래식 폭격기로서의 우수한 성능을 다시 한번 입증 하게 되었다. ㅇ 걸프전에서 B-52 편대는 총 1,624회의 임무 출격을 통해 25,700톤에 달하는 72,000발의 무장을 쿠웨이트내의 지역표적, 이라크의 비행장, 산업시설, 병력 집결지 및 각종 저장시설에 투하 하였는데, 취역한지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B-52의 임무가능률은 평시보다 2% 높은 85% 이상이었다. B-52 편대는 걸프전에서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29%, 그리고 다국적군의 38%에 달하는 무장을 투하하였다. 그동안 꾸준히 진행해 온 개조작업의 덕택으로 B-52는 여전히 효과적인 폭격기로 남아있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이후 재래식 폭탄, 순항 미사일, 전략 핵폭탄 등을 탑재하고 대륙간을 고공 침투하여 폭격하는 것이 전력 운용상 효율성이 있고 평시 전략적 억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 하였다. 미국은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1948년 7월에 발주하여 1952년 4월에 거대한 B-52 1호기의 시험비행에 성공하였고 1954년 평가시험용 B-52A형 3대가 생산되었다. B-47의 후계기로서 1952년에 첫 비행, 1955년 배치된 이래 미 전략공군사령부의 주력 폭격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으며,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 초 G ·H형도 나왔다. 길이 48m, 너비(주익의 길이) 56.4m, 무게 221.35t, 최대항속거리 2만km, 실용 상승한도 1만 8000m, 최대속도 마하 0.95로서, 8개의 엔진이 있고 날개가 후퇴익(後退翼)으로 되어 있다. 승무원은 6명이 탑승한다. 보잉사(社)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공대지 미사일 하운드도그와 단거리공격용미사일(SRAM)을 장비하고 있다. 미국은 1970년 초 이후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에 맞서 전략폭격기의 구실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 이에 대처해서 B-1 폭격기의 시험제작에 들어간 1974년 10월 B-1 폭격기 1호기를 제작함으로써 B-52기가 점차 B-1기로 대체되었다. B-52는 1955년부터 미공군에서만 운용되었다. B-52 A, B, C형을 합해 88대, B-52D형 170대, E형 100대 및 F형 89대를 생산하였는데, 이상의 B-52 항공기는 모두 퇴역한 상태이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B-52 G형은 193대, H형은 102대가 생산됨으로써 B-52의 총생산 대수는 742대에 이른다. B-52는 베트남전과 걸프전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베트남전에서의 융단폭격은 유명하다. 베트남전에서 B-52의 출격횟수는 총 124,500회로서 3,735,000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또한 최근의 걸프전에서 B-52는 재래식 폭격기로서의 우수한 성능을 다시 한번 입증하게 되었다. 걸프전에서 B-52 편대는 총 1,624회의 임무 출격을 통해 25,700톤에 달하는 72,000발의 무장을 쿠웨이트내의 지역표적, 이라크의 비행장, 산업시설, 병력 집결지 및 각종 저장시설에 투하하였는데, 취역한지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B-52의 임무가능률은 평시보다 2% 높은 85% 이상이었다. B-52 편대는 걸프전에서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29%, 그리고 다국적군의 38%에 달하는 무장을 투하하였다. 그동안 꾸준히 진행해 온 개조작업의 덕택으로 B-52는 여전히 효과적인 폭격기로 남아있다.
B-52 스트라토포트레스(Stratofortress) 폭격기는 지난 45년간 미공군의 전략적 전쟁억제 유인폭격기의 근간으로써 존재해 왔다. B-52 폭격기는 1955년부터 전략공군사령부(the Strategic Air Command) 소속으로 취역하여 1958년부터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전쟁억제수단의 자리를 차지했다. B-52의 배치가 정점에 달했던 1963년에는 38개 공군기지에 배치된 42개 전대에 총 650기의 B-52 폭격기가 전략공군사령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B-52 폭격기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전략적 전쟁억제 수단으로써 더욱 큰 역할을 맡게된 이후부터 그 독점적 위치를 내주게 되었으나, 그이후에도 B-52는 여전히 중요한 전쟁억제수단으로 존재했다. B-52 폭격기는 애초 핵폭탄 투하능력에 의한 전략폭격기로써 개발되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사용한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냉전기간과 그 이후에 발생한 몇개의 국지적 전쟁에서 재래식폭탄과 공중발사 순항미사일을 사용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1965∼1972년 사이의 동남아시아전쟁(※ 편집자 註 : 이것은 아마도 베트남戰과 캄보디아戰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과 1991년에 발발한 對이라크戰(※ 편집자 註 : 우리가 흔히 '사막의 방패작전'과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알고 있는 것)과 1999년의 보스니아戰에 투입되어 실전에 사용되었다. B-52 폭격기는 그간 투발병기및 각종 전자병장 그리고 적의 對空병기의 발달에 따라 수년마다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행했으며, 또한 현대적 폭격전술에 걸맞도록 애초의 고공폭격기로부터 나중에는 저공폭격능력을 갖도록 개량되어 졌다. 이런 근대화를 통하여 B-52 폭격기가 각시대의 전장상황에 적절한 폭격기로써 수명을 연장해 왔다는 것은 B-58 허슬러등 오히려 기술적으로 더욱 주목할만한 기종들이었던 일부 폭격기가 단명한것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운용 효율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냉전이후 B-52 폭격기중 다수가 해체되었으며, 그중 운좋은 기종 일부는 박물관이나 혹은 미공군 폐기종 야적장에 보내지는 운명에 처해져 그중 한대는 우리나라의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B-52 기종중 최신기종인 B-52H 기종은 아직까지도 상당대수가 현역배치되어 활동중이며, 21세기 초까지도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될 경우 B-52 폭격기는 애초 개발된 이래 무려 50년이상 사용되어 최장기 현역사용 전투기종(즉, 수송기종들을 제외하고)쯤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B-52의 탄생 B-52 스트라토포트레스의 개발은 태평양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던 1945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에서의 일본과의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날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무렵 미육군의 항공대(※ 편집자 註 : 미국은 그 당시까지 별도의 공군 체계를 갖추지않고 육군 항공대로 항공전력을 보유했었다.)는 항공 자재 사령부(※ 편집자 註 : Air Material Command을 이렇게 해석을 한것이지만, 이게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정확한 표현을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라.)에 戰後의 차세대 폭격기의 특성에 대한 사용 요구사항의 '정형화' 연구를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태평양전쟁 기간 말미에 일본본토 폭격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B-29는 미군이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루면서 일본으로부터 탈환한 서태평양상의 소규모 섬을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그것은 당시 폭격기들의 행동반경이 작기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육군 항공 사령부는 戰後에 소요될 폭격기는 다른 나라의 통제를 받는 지역에 위치한 미군기지나 혹은 전선지역에 설치된 전선기지에서의 출격에 의존하지않고 미본토에서 출격하여 장거리에 위치한 목표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성능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하여 AMC에 구체적인 차세대 폭격기의 운용요구사항에 대해 연구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1945년 11월 23일, AMC는 신형 폭격기에 대해 34,000 피트 상공에서 시속 300마일이상의 속도로 비행 할 수 있으며, 최대 5,000 마일(약 8,000km)의 작전 행동반경을 갖출것을 제안하였다. 기타, 5명의 승무원과 정확히 수량에 제시되지않은 몇개의 20mm 포탑과 조작원들에 의해 운영될것과 10,000파운드(약 4,500kg)의 폭탄적재능력을 가질것과 6명의 추가 요원을 위한 거주구역을 가질것등이 제시되었다. 이런 요구성능들은 그당시까지 처녀비행조차 실시하지 않은 콘베어(Convair)社의 B-36 의 뒤를 잇는 제2세대 대륙간폭격기의 성능을 갖출것을 상정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신형 폭격기 개발 프로젝트는 1946년 2월 13일 신형폭격기 개발입찰 참가를 위해 the Boeing Airplane Company, the Glenn L. Martin Company, the Consolidated Vultee Aircraft Corporation등 3개 업체에 1945년 11월 AMC에서 내놓은 제안사항을 근간으로 비용과 기본설계안을 제출토록 요구함으로써 본격화 되었다.
보잉사가 제안한 모델 462기는 기존의 B-29 기를 확장한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221피트(67.36m) 너비/3250 평방피트(302㎡)의 면적을 가진 주익이 동체 윗부분에 얹혀진 모습이었다. 동체의 단면은 B-29와 마찬가지로 원형이었으며, 동체의 길이는 161 피트 2인치(약 49m)였다. 추진은 각기 5500 마력의 출력을 내는 Wright社의 XT35 타이푼 터보프롭엔진(즉, 프로펠러 추진식) 6개와 각엔진 샤프트에 달린 6엽의 프로펠러에 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터보프롭엔진이 제안된 것은 당시의 제트엔진 기술수준으로는 제트엔진이 중량비 파워가 뛰어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료를 먹어치우는 돼지'라고 불릴 만큼 열악한 연비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이로 인해 군에서 요구하고 있는 항속거리를 도저히 맞출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중량은 360,000 파운드(약 163톤)였으며, 4개의 메인휠은 4개의 엔진 나셀에 접혀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비록 모델 462기가 애초 제시된 항속거리 요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1946년 6월 5일 보잉사는 군으로부터 보잉의 모델 462기가 채택되었음을 통보 받았으며, 6월 중순경 보잉의 모델 462기에는 XB-52란 분류기호가 부여되었다.
1946년 10월, 위의 계약서를 받은지 3개월이 채 지나지않은 시점에, 미육군항공대(USAAF)는 XB-52에 대한 몇가지 불비점을 지적했다. 즉, 보잉의 XB-52기는 너무 크고, 비싸다는 것과 이미 배치를 목전에 두고 있던 B-36에 비해 장점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향후의 선진 기술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군의 작전 참모였던 Earle E. Partridge 소장은 보잉에 모델 462기는 항속거리성능도 충족하고 있지 못함을 솔직하게 지적했다.
결국, 보잉사는 모델 462기에 대한 설계안을 다시 설계대로 가지고 가서 이를 개량하여 모델 464기의 설계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기존의 모델 462기 보다 훨씬 작았으며, 엔진 역시 XT35 터보프롭 4기만을 장착도록 변경되었고, 총중량 역시 대폭 줄어든 230,000 파운드였다.
미육군항공대의 정비사단장이었던 Laurence C. Craigie 소장은 새로운 모델 464의 설계를 받아들이도록 추천했다.
그러나, 1946년 11월 미래의 B-52기는 더 높은 순항속도와 긴 항속거리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육군항공대 연구/개발 참모부장이었던 Curtis E. LeMay 장군은 모델 464기가 아직도 군의 요구사항을 충족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12월, 미육군 항공대는 1,2000마일을 공중급유나 중간 기착없이 비행 할 수 있으며, 시속 400마일의 순항속도를 갖는 4발 폭격기에 대한 연구를 실행할 것과 이 폭격기가 원자폭탄을 적재하고 투하 할수 있는 기능을 가질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보잉사는 두개의 분리된 기종 - 모델 464-16과 17을 제시했다. 이 기종들은 여전히 XT-35 터보프롭 엔진 4개에 의해 추진되나 종전의 엔진 성능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기종들은 종전의 모델 464기보다 더 크고 무거웠으며, 총중량은 400,000 파운드에 달하는 엄청난 중량이었고 주익의 너비는 205 피트(62.5m), 주익 면적은 3000 평방피트(279㎡)에 달했으며, 전장은 156피트(47.55m)였다. 또한 항속거리를 연장시키기위한 외부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하도록 되어있었고, 최고속도는 35,000 피트 상공에서 시속 440마일에 도달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464-16 기종과 17 기종사이의 차이점은 464-16은 핵폭탄 투하기능을 가진 '특별기종'이라는 것이었으며, 이 기종은 장거리 항속 능력을 가진 대신 단지 한개의 10,000파운드 짜리 핵폭탄을 운반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464-17 기종은 재래식 폭탄을 적재/운반하는 기종으로 총 90,000 파운드의 폭탄을 적재/운반 할 수 있었으나, 항속거리는 훨씬 짧았다.
미육군항공대는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만한 여력이 없었으며, 그들은 464-17 쪽에 관심을 가졌다. 464-17 기종은 항속거리만을 제외하면 미육군항공대의 요구사항을 거의충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짧은 항속성능은 이 기종의 가장 결정적 단점이기도 했다. LeMay 장군은 XB-52의 개발을 위해 제안된 이 기종이 너무 크고, 비싸서 100기 정도밖에는 제작되지 못할것이라고 직감하고 있었기때문에 아직도 보잉사의 제안 기종에 만족하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항공정비사단장이었던 Craigie 장군은 보잉사의 개발안은 B-36을 약간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장래의 B-52기는 이전 기종보다 명백하게 우수한 기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XB-52기종의 개발을 위한 보잉의 네번째 제안안 이었던 모델 464-17 역시 도면상의 기종으로 끝나 버렸다.
한때 B-52 개발 계획 자체가 그대로 폐기될 뻔도 하였으나, LeMay 장군은 6개월후에 B-52 개발의 실시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그 기간중 일단 B-52에 대한 결정을 보류키로 하였다.
보잉사의 설계자들은 다시 일을 시작하여 1949년의 전반기의 수개월이 채 지나기 이전에 모델 464-29 기종에 대한 설계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종은 추진체로 여태까지의 XT-35 터보프롭엔진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었으나, 주익의 형상은 크게 변경되어 이전까지의 기종들이 일직선형의 주익을 가졌던 데 비하여 약 20。가량 뒤쪽으로 젖혀진 후퇴익을 갖도록 설계되었으며, 확장된 dorsal 핀이 보태졌다. 주익의 너비는 205피트(62.5m)였으며, 총중량은 400,000 파운드였다. 랜딩기어는 크게 변경되어 B-47과 같이 동체 중앙부에 앞뒤 각각 두개의 대형의 랜딩기어가 위치하는 식으로 변경되었으나, 전방과 후방의 랜딩기어 유니트간의 간격이 B-47보다 더 좁혀졌으며, 양날개에는 엔진 나셀에 수납되는 아우트리거식의 보조 랜딩기어가 붙는 형식을 갖고 있었다. 추정 최고속도는 시속 445 마일이었다.
1947년 중반 이후, 미공군(※ 편집자 註 : 아마도 이쯤부터 공군이 육군과 분리되어 별도 독립군종으로 탄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더 효율적인 핵무기 운반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 미공군내에 重爆擊委員會(Heavy Bombardment Committee was)가 설립되어 다른 대안을 찾기위한 활동에 나섰다. 특히 핵폭탄 운반수단으로서의 장거리 폭격기에서는 속도와 고도가 중한 기능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특히 폭격기가 전투 지역에 도달하면서부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었고, 이에따라 공군은 핵폭탄 운반용 폭격기는 8,000 마일(약 12,900km)의 항속거리와 시속 550마일(약, 880km)의 순항속도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새로운 요구사항은 1947년 12월 8일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이당시에 순항속도 요구값은 애초보다 약간 낮은 500 마일(약 800km)로 감소되었다.
미공군에서 제시된 새로운 요구사항은 속도와 항속거리 모두 모델 464-29 기가 맞추기에 어려운 수치였다. 1947∼1948년 겨울동안 B-52 프로젝트는 다시 계속될지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으며, 1947년 12월 11일, AMC는 실제로 보잉과의 계약 취소를 지시 받았다. 그러나 당시 보잉사의 회장이었던 윌리엄 M. 알렌(William M. Allen)이 당시 공군장관이었던 Stuart Symington에게 이의를 제기하여 실제 명령이 곧바로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1월 Symington은 보잉에 현재의 보잉의 제안은 적절하지 못하며, 다른 가능성이 찾아질때까지 최종결정은 없을것이라고 통보했다.(※ 편집자 註 : 당시 미공군에는 노드롭社의 YB-49 Flying Wing(오늘날의 B-2와 매우 흡사하게 생긴 기종으로 실제로 현역배치되지는 못했다.)과 같은 기종에 대해 검토중이었다.)
B-52의 개발 실행 여부가 매우 불투명했던 이 기간동안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그들의 설계를 개선하기위하여 지속적으로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그결과 모델 464-35 기종의 설계안을 1948년 1월에 발표했다. 이 기종은 이전의 기종과 마찬가지로 XT35 터보프롭 엔진 4기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프로펠러는 동축의 이중반전 회전식으로 변경되었으며, 디멘션 역시 주익너비 185피트(약 56m), 주익면적 2600평방피트(약 241.5㎡), 동체길이 131피트 4인치(약 40m)로 줄어들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중량감소로 총중량은 280,000 파운드로 절감되었다. 성능은 향상되어 최고속도는 41,000 피트에서 시속 500마일(약 800km), 최대항속거리는 11,635 마일(18,721km)로 증대되었다.
이로써 모델 464-35기의 성능은공군의 요구사항에 거의 근접한 수준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보잉은 모델 464-35의 Phase II 제안서(주 내용은 464-35 Phase-Ⅱ를 기본으로 XB-52 두대를 제작하는 것 이었다.)를 완료하여 공군에 제출하였으나, 이 기종 역시 공군의 요구사항에 100% 부합되는 성능을 가진 것은 아닌 관계로 공군은 이 제안의 결정을 망설였으나 같은 해 6월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베를린봉쇄는 미공군으로 하여금 신형 장거리폭격기에 대한 획득필요성을 절감케 하여, 결국 1948년 7월 미공군은 보잉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B-52 프로젝트는 비로서 제대로 순항하기 시작하였으며, 목크업 제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XB-52의 모델이 나오기까지는 몇가지의 변동사항이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추진체의 변경이다.
1948년 5월, 미공군은 보잉에 B-52의 엔진을 제트엔진으로 교체할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공군은 사실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장거리 폭격기에 제트엔진을 채택하는 방안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항상 당시 기술수준으로 제작된 제트엔진의 높은 연료소비율이 이런 관심을 그냥 관심차원에만 머물게 해왔었다. 미공군의 요구에 대해 보잉은 1948년 7월 말 모델 464-40기의 설계안을 내놓았다. 이 기종은 바로 전의 464-35 기종과 흡사했으나, 4개의 XT35 터보프롭 엔진 대신 웨스팅하우스社의 XJ40-13-12 제트엔진 8기를 장착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8개의 엔진은 한쌍씩 4곳의 포드내에 수납되도록 설계되었다. 총중량과 주익 너비는 464-35 모델과 동일하며, 동체 길이는 130피트 9인치로 약간 줄어들었으나, 성능은 약간 좋아져 최고속도가 47,000 피트 상공에서 시속 507 마일을 기록하게 될 것으로 제시되었다.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모델 464-40기에 대한 연구결과를 공군의 프로젝트 담당관에게 가지고 갔으며, 마침 보잉의 제시안과 흡사한 폭격기를 구상하고 있던 담당관은 보잉의 464-40 모델에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정부는 그당시 제트엔진의 높은 연료소비율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으며, 보잉사에 XB-52의 기본모델로 모델 464-35기종을 변함없이 채택하여 개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당시의 조달관련 참모부의장 Howard A. Craig 장군은 제트엔진이 분명히 미래의 물결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으나, 그당시로서는 터보프롭 엔진의 기술수준을 훨씬 튀어넘을 만큼 제트엔진이 뛰어나다고 생각지는 않았기때문에, B-52에 제트엔진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보잉은 제트엔진의 채택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터보제트 엔진을 채택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수개월후 여태까지의 모든 상황은 다시 변했다. 1948년 10월 21일, 일단의 보잉사 엔지니어들은 미공군의 장교들과 미래의 터보제트 엔진 장착형 B-52 폭격기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Wright Field에 도착했다.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그들의 설계에 대한 진행상황을 토론하기 위한 준비로 한묶음의 도면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들은 X35 터보프롭 엔진의 개발사인 Wright社의 Air Development Center의 Col. Henry Warden 박사가 그들에게 터보프롭 엔진은 폐기되어야 하고, 터보제트 엔진이야말로 명백히 가야할 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하였다. 워든 박사는 프랫트&휘트니社(Pratt & Whitney)에게 10,000마력의 출력을 내는 T45 터보프롭 엔진대신 B-52 폭격기에 사용될 엔진으로 JT3(J57) 터보제트엔진을 개발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프랫트&휘트니社는 제트엔진 개발에 선구자가 아니었으며, 미국정부는 그들의 애초 기본 임무인 공냉식 피스톤 엔진 제작으로부터 이 업체를 다른 데 신경쓰도록 변경하지도 않았다. 프랫트&휘트니社의 터빈 추진기관 분야에서의 첫번째 성공적인 결실은 PT2 로, 이것은 매우 성공적인 터보프롭 엔진이었던 T34의 개발로 이어졌다. 1947년, 프랫트&휘트니社는 제대로 결과가 나오지않던 Wright社의 T35 엔진을 대체할 수 있는 10,000마력의 추력을 갖는 PT4(T45) 터보프롭엔진의 개발사로 선정되어 개발을 체결하였다. PT4 엔진은 2중축의 13단계의 유체압축기를 갖고 있는것으로 손쉽게 필요할 경우 터보제트 엔진으로 변경될 수 있었다.
10월 21일 오후와 저녁내내 동안의 아이디어 토의가 주어진 후,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다음날 아침 Col. Warden 박사를 불러 다음 월요일까지 신선한 제안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그 이후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Dayton에 위치한 Dayton 호텔로 돌아갔으며 일주일 내내 작업을 했다. 그들의 일부 동료들은 필요할 경우 전화로 데이터를 제공토록 머물러 달라는 데이톤의 동료들의 부탁을 받고 시애틀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모델 464-49 기종으로 이것은 J57 엔진을 이전의 464-40모델에 장착한 것이었다. 주익의 너비는 185피트로 동일했으나, 후퇴각도는 35。도 15。가 더 뒷쪽으로 꺾여진 형상이었으며, 주익의 면적은 1400평방피트가 늘어난 4000평방피트로 증가 되었다. 추정 최고속도는 46,500 피트 상공에서 시속 565마일(약, 910km)였으며, 전투행동반경은 10,000 파운드(약 450kg)중량의 폭탄을 적재시 3550마일(약 5700km)였다. 최대중량은 330,000 파운드로 계산되었다. 한명의 엔지니어가 그 지방의 Hobby Shop(아마도 모형제작물을 취급하는 가게로 생각된다.)에서 발사 나무재를 사용하여(모형 만들기가 취미였던 분들은 '발사'가 어던 재질인지 아시리라 생가한다.) 새로운 디자인의 모형을 제작했다. 월요일 아침,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그들의 새로운 제안을 공군에 가지고 갔으며, Colonel Warden 박사는 B-52가 제트엔진을 장착하여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B-52에 제트엔진을 달기로 결정했다.
보잉사는 즉시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464-35 목업제작과 관련된 일을 중단하고 동시에 프랫트&휘트니社는 J57엔진의 개발에 착수토록 지시 받았다.
1949년 1월에 있었던 최종 시험평가이후 미공군 상부는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승인했으며, 제트엔진에 의해 추진되는 B-52 개발을 보잉사가 계속할 것을 결정했다. 보잉은 1월 26일 미공군으로부터 제트추진식의 B-52 폭격기에 대한 작업은 애초의 계약내용하에 진행될것이라는 것을 통보받았다.
비록 제트엔진 장착형 B-52 충분히 납득할만한 계약이었지만, 1948년 말 트루만 대통령의 국방부에 대한 강력한 예산삭감 요구에 의해 B-52 프로그램 전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해졌다. 이런 사정이외에도 공군 내부에서조차 B-52 폭격기의 추진체로 제트엔진을 장착하는데 대한 저항이 존재했었다. 1949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터보제트엔진을 장착한 후퇴익기인 XB-52의 목크업이 전시되었지만, 공군은 그때까지도 J57 엔진이 그때까지 겨우 2700 해상마일의 전투행동반경만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약간의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AMC의 Orville R. Cook 장군은 B-52의 매우 짧은 전투행동반경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으며, B-52 프로그램 전체에 대한 재검토를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전략공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던 LeMay 장군은 여전히 B-52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짧은 전투행동반경 문제에 대한 답은 엔진 개발로 보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9년 11월, B-52의 짧은 전투행동반경이 B-52 프로젝트를 위험하게 할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한 보잉사는 항속거리의 개선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이에대한 답으로 모델 464-67로 알려진 새로운 기종을 제안했다. 이 기종은 종전의 464-49 기종과 같은 주익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체는 연료의 추가 적재를 위해 152피트 8인치로 늘어났으며, 최대중량도 390,000 파운드로 증대되었다. 연료의 추가 적재가 가능해짐에 따라 전투행동반경 역시 3500마일로 늘릴수 있었다. 물론 464-67 모델은 LeMay 장군을 비롯한 전략공군 요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1950년 1월 26일, 미공군 본부에서 B-52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차례의 토론이 속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다시한번 경쟁업체들 - Douglas and Republic(맥도넬더글라스社의 전신), Fairchild Aircraft Corporation(A-10 공격기를 개발한 업체) - 들이 제시한 레일발사식의 Flying Wing 형 폭격기와 후퇴익형의 콘베어社의 YB-60 기와 B-47기를 베이스로한 두개의 신형 폭격기와 미사일형 항공기등이 선보여졌으나, 이 회의에서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으며, LeMay 장군은 여전히 B-52 편이었다. 1950년 2월, 미공군 참모부는 제안된 모든 전략폭격기에 대한 성능과 가격 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같은달 LeMay 장군은 공군수뇌부회의에 보잉사의 464-67 모델을 받아들일것을 요청했으며, 이 요청은 1950년 3월 24일 공군수뇌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양산과 관련한 어떤 명확한 지침도 없었다. 이런 상태는 1951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전쟁에 의해 형성된 미-소간의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LeMay 장군은 B-52의 획득에 의한 미전략폭격기 편대의 현대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1951년 1월 9일, 미공군 참모총장인 Hoyt S. Vandenberg 장군은 마침내 B-52 를 양산하여 B-36기를 대체하도록 승인했다. 이에따라 미공군과 보잉사간에 1951년 2월 14일 정식으로 양산계약이 체결되었다.(계약서 번호 AF33(038)-21096) 이로인해 비로서 13기의 B-52A (시리얼 52-0001/0013)가 초도분으로 제작되어 1953년 4월까지 전략공군사령부 소속 공군기지에 공급되었다.
이것으로 B-52의 양산 배치가 본격적으로 실행되었으나, 미공군 사이에서는 B-52를 폭격기로써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은지 아니면 장거리 정찰기로써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B-52의 전략폭격기로 사용시에는 쉽게 동체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동체 장착식 포드 내장형의 정찰 센서를 채택함으로써 이중목적기로 활용하기를 원한 반면, 미공군 본부는 B-52를 정찰기용도로만 사용하기를 원했다. 1951년 10월, 미공군 참모부는 정식으로 모든 B-52기체를 RB-52 정찰기로 사용하는 방안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B-52기종에 정찰용 센서를 장착하더라도 폭격임무를 수행 할 수 있는 기능은 여전히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데 동의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정은 실제적으로는 B-52를 폭격기로 사용코자 하는 전략공군사령부의 의지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1951년 초, LeMay 장군은 보잉사에 그는 횡배열식의 복좌형 - 즉,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나란히 옆으로 앉는 형태 - 조종석이 비행계기를 위해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으며, 부조종사가 조종사를 더 훌륭하게 보좌할 수 있다는 등의 장점이 있기때문에 XB-52의 텐덤식의 종배열식으로 배치된 조종석보다 더 훌륭할것이라고 얘기했다. LeMay 장군의 이런 생각은 받아들여져 미공군은 1951년 8월, B-52의 조종석을 횡열배열식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B-52 제작분중 일부는 애초에 종배열 텐덤식의 조종석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은 나중에 횡배열식으로 개조되고 단 2대만이 끝까지 텐덤 배열식의 B-52A로 남아 있었다.
일단 개발계약이 체결되자, 두대의 XB-52 시제기의 제작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1951년 말경, 완성되었다.
이 기종의 주익은 동체상부장착식이었으며(※ 편집자 註 : 원문에는 'Shoulder-Mounted'로 표기되어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동체상부 윗쪽에 일체형으로 장착되는 'High-Mounted' 형과 분히아여 B-52와 같이 동체의 최상부 바로 아랫쪽 양옆으로 분리되어 주익이 장착되는 것이 'Shoulder-Mounted' 형이지만, 달리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동체상부장착식'이라고 표기하였다. 좀더 올바른 표현을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란다.), 35˚각도로 뒤로 젖혀진 후퇴익의 형태를 하고 있다. 주익의 너비(Wingspan)는 185 피트(약 56.4m), 면적은 4000평방피트(371.6㎡)이며, 측면에서 볼때 뒷쪽으로 6˚경사진 형태로 달려있다. 하부 적재대는 중량의 균일 분포를 위해 텐덤형으로 2열 배치되어, 항공기가 이륙시에 요동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B-52는 애초 주간 고공폭격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주익의 두께는 상당히 얇은 편이었고, 날개구조가 장착되어 있는 동체부의 측면투시면에 대해 날개의 두께는 접합부에서 16.2%를 차지하다가 끝단부로 가면서 8%로 감소한다. 주익의 두께는 상당히 얇은 편이었지만, 내부에는 공기주머니 형식의 연료탱크가 위치해 있다. 얇은 날개구조는 상당한 유연성을 제공해주어, 날개 끝단부가 32피트(9.7536m)의 원호길이 만큼 상하로 요동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상에 연료를 적재하지않고 주기시에는 문제가 없으나 날개쪽의 공기주머니형 연료탱크에까지 연료를 가득 적재하였을 경우에는 처진 날개가 지상에 닿지않도록 하기위해 날개 끝 부분에 아우트리거가 내려와서 날개를 받쳐주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륙이후에 아우트리거는 접혀진다. 공중 비행시 주익은 보통 윗쪽으로 휘어지게 된다.
XB-52에 장착된 8개의 프랫트&휘트니社製의 J57 터보제트엔진은 각기 두개의 엔진을 매단 주익하면부착식의 4개의 포드에 수납된다. 이 포드는 주익에 직접 면해 있지않고, 각기 주익하면의 파일론에 부착된다. 상면도상에 각 엔진들은 주익 리딩에지의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것은 고속비행시 Drag Force(여기에 대해서는 3,4월중 본 홈페이지의 '밀리터리-심층분석'에 올릴 예정인 '항공기 기초이론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여기에는 주로 항공기의 Control Surface, 즉 플랩, 아일러론, 핀등의 작동을 중심으로 어케 방향을 바꾸고, 상승하고, 뱅글뱅글 도는지에 대해, 그리고 Drag Force, Bank, AOA, Rolling, Turning, Stall이 대체 뭔지에 대해 올릴 예정이다. 그러나 나도 아는게 기초밖에 없으니 기본이론이나 중급이론같은건 기대하지 마시라. 그거 알고 싶으면 '항공공학'책을 사보시거나 아예 '항공공학과'쪽으로 진학을...)가 덜 발생하는데 도움을 주고, 하중부담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파일론은 일종의 윙 펜스(wing fence) 역할을 하여 실속의 개시를 지연시키도록 하기위해 크게 설계되었다. 주익에는 각 날개의 트레일링 에지部 양끝단에 두개씩 모두 4개의 플랩(flap, ※ 편집자 註 : 각도를 조절하여 양력을 발생시키는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이륙시나 착륙시 사용된다.)이 붙어 있다. 총 플랩 면적은 797 평방피트(약 74㎡)이다. 그러나 이중 두개의 플랩만을 완전히 상승시키거나 하강시킬수 있으며, 최대 하강각도는 35˚이다. XB-52의 주익의 Aerodynamic surfaces(※ 편집자 註 : 여기에서 Aerodynamic surfaces는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장치를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Aerodynamic surfaces이 Control Surface와 같은 의미로 혼용되는 단어인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는 용어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도 아시는 분은 설명을 좀...)는 아일러론(ailerons, ※ 편집자 註 : 항공기의 Turning 혹은 Rolling시에 사용되는 것이다.)과 스포일러(Spoiler)로 구성된다. 아일러론은 트레일링 에지部의 중간쯤에 즉, 바깥쪽 트레일링 에지와 안쪽 트레일링 에지의 중간에 위치한다. 또 좌우 각 날개의 윗부분 바깥쪽으로 위치한 스포일러는 각 날개에 7개가 붙어 있다. 공기역학적으로 이상적으로 작동될때, 에일러론은 대부분의 평범한 비행시간 동안 정확한 회전 조종성을 제공하지만, 착륙시나 공중급유시동안에는 스포일러를 사용하여 부가적으로 사용하여 조종성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균형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스포일러는 에어브레이크나 혹은 착륙을 위한 접근시 착륙용 낙하산 대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
수직미익(Tail Fin)의 높이는 48피트3인치(약 14.7m)로 거의 수직미익의 높이와 같은 길이를 가진 방향타(Rudder)가 붙어 있다. 수직미익은 기체를 기본규격의 격납고에 주기 시킬 수 있도록 전체가 옆쪽으로 접혀질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다. 수평미익(Horizontal Tail)은 52피트(약 15.85m) 너비이며, 면적은 900평방피트(약 83.6㎡)이다. 수평미익은 완전가변타입으로 윗쪽으로 9˚, 아랫쪽으로 4˚씩 각도를 변환할 수 있다.
동체내부의 많은 부분 - 조종실 바로뒷쪽부터 후방의 주적재대 보강대 바로 앞까지의 상부동체 - 은 연료탱크가 차지하고 있으며, 무장적재대는 전,후방 하부구조 사이의 하방 동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장적재대는 길이 28피트(약 8.53m), 폭 6피트(약 1.83m)이며, 이중 판넬 도어에 의해 개폐된다. 비행중 개폐될 수 있는 폭탄적재대의 계페문 부분은 적재대 양 옆에 각각 3개씩의 유압 개폐식 판넬로 구성된다. (즉 총 6개의 개폐식 도어가 있는 셈이다.) 폭탄 적재대 윗쪽의 판넬 역시 링크식으로 되어 있어 B-52기가 지상에 있는 동안, 무기 탈착시의 작업전고 확보를 위해, 회전하여 윗쪽으로 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방어용 병기는 총 4개의 0.5인치 구경 기관총이 작동요원이 탑승한 후미 포탑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랜딩기어는 동체의 하부 양옆에 각기 트윈 휠이 장착된 랜딩기어가 전후방으로 두개씩, 총 4개가 장착된다. 또한 기체의 이·착륙시 윙팁부분이 지면에 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익의 끝부분에는 접이식의 아우트리거형 휠이 각기 1개씩 장착된다. 그러나 아우트리거형 휠은 단지 윙팁부분이 지면에 끌리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지상에 주시기 메인휠만으로 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다. (B-47의 경우 메인 랜딩기어가 자전거 바퀴식으로 앞뒤 1개씩 있어서 지상에 주기시에 아우트리거형 랜딩기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메인 랜딩기어의 수납 과정은 상당히 복잡한 편으로, 기체의 용적을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 수납시 커버동체내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위해 일단 휠 지주부를 거의 90˚각도로 돌려서(즉, 휠을 기체방향과 90˚가 되게) 랜딩기어 보관대에 수납하게 된다. 만약 랜딩기어가 그대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90˚각도로 꺾여져서 수납된다면 지주자체를 90˚로 돌릴 이유도 없겠지만, 랜딩기어자체가 앞쪽이나 뒷쪽으로 꺾여져 수납되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만든 것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동체 왼쪽의 메인랜딩기어가 전방으로 꺾여져 수납되는 반면, 오른쪽의 메인랜딩기어는 뒷쪽으로 꺾여져 수납된다는 것이다. 또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4개의 메인 랜딩기어는 각기 작동하여 독립적으로 내릴 수도 있다. 이밖에 랜딩기어는 비행상태에서 20˚각도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릴 수 있다. 이것은 측풍시에도 안정적으로 기체를 이·착륙 시킬 수 있게 해주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평상시의 승무원은 5명으로 기수부에 위치한 버블 타입의 종배열 텐덤식 조종석에 조종사, 부조종사가 위치하며, 항법사및 레이더 관제사는 기수부 아랫쪽에 위치한 하방 데크에 나란히(Side-By-Side) 위치하며, 후미부분에 기관총수 1명이 위치한다.
비상시,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윗쪽으로 캐노피가 열리면서 사출되며, 항법사와 레이더 관제사는 아랫쪽으로 사출되며, 후방 기총수는 포탑과 함께 뒷쪽으로 떨어진다.
B-47에 있던 착륙 접근 감속용 낙하산은 삭제되고 대신 윙 스포일러가 생겼으나, 더 짧은 착륙이 필요한 경우에의 사용을 위해 44피트 짜리 감속용 낙하산을 수납하기 위한 낙하산 해치를 후방동체에 만들었다.
다른 기종에서 보기 힘든 XB-52의 또 다른 특징은 항공기내의 모든 보조 작동 기구의 주동력원으로 공압시스템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제트엔진의 두번째 압축기로부터 발생한 고온-고압의 공기는 덕트를 통해 기체내의 요구되는 각부분으로 이송되고, 거기에서 고온-고압의 공기는 에어터빈 구동식의 파워팩에 의해 전기나 유압으로 바뀌어져 필요한 동력을 공급하게 된다. 기체내에는 각기 평방인치당 3000파운드(3000 lbs/inch2 = 약 8780 Bar)의 압력을 내는 총 10개의 터빈 구동식 유압 펌프가 있어 브레이크, 조향메카니즘, 스포일러, 폭탄적재대 문 개폐 작업등을 하게 해준다. 공압 시스템은 기내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에어터빈 알터네이터를 구동시키기도 한다.
이력 두기의 XB-52가 보잉의 씨애틀 공장에서 완성되었다. 두 기체 모두 애초 XB-52로 주문되었으나, 두번째 기체는 YB-52로 변경 완성 된다. 이것은 보잉사의 제안에 의해 추가적인 운용 장비를 장착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XB-52와 YB-52는 상이점이 거의 없는 동일한 설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두 기체 모두 프랫트&휘트니社의 각기 8700파운드의 추력을 내는 YJ75-P-3 터보젯 엔진 8기를 장착한다.
1951년 11월 29일 저녁, XB-52의 시제기(시리얼 넘버 49-0230)가 출고되어 곧바로 비행테스트 격납고로 이송되었다.
당시 기체는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XB-52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방수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제작완료된 XB-52는 일련의 지상 테스트를 수행하였다. 불행하게도 XB-52의 공압시스템이 전압력 테스트를 견디지 못해 파손되어 주익의 트레일링에지부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결국 이기체는 수리를 위해 제작 라인으로 옮겨졌다. 보잉사와 공군은 '비밀'로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결론적으로 XB-52는 그후 1년이 지나서야 비행에 나설 수 있었다.
이런 사유로 YB-52는 형식상 두번째 프로토타입 기체였으나, 실제 비행은 XB-52보다 먼저 실시하였다. YB-52(시리얼 넘버 49-0231) 기는 1952년 3월 15일 조립라인으로부터 출고 되었다. 애초에 XB-52로 하기로 했던 여러가지 테스트는 결국 YB-52로 대신해야 했다.
YB-52기의 처녀비행은 1952년 4월 15일 있었으며, 이때 탑승한 조종사는 보잉사의 테스트 파일롯인 Johnston과 미공군 항공연구개발사령부의 Townsend 였다. 처녀비행시 YB-52기는 2시간 15분동안 체공했으며 Larson 공군기지에 착륙하였다. 비행중 발견된 문제점은 미미한 것 - 메인랜딩기어를 적절하게 수납하는데 1회 실패가 있었으며, 액체산소 시스템의 결함이 발견되었다. 또, 엔진 오일 유량계의 누유가 있었다. - 이외에는 없었으며, 공군은 기밀유지에 과민하여 언론사에 배포된 이륙사진에는 랜딩기어 유니트部가 삭제되어 있었다.
1952년 10월 초까지 YB-52기는 총 50시간의 비행시간을 기록하고, 곧바로 Phase 1 비행 시험을 종료하였다.
XB-52기는 애초 계획된 것 보다 거의 1년이 지난 1952년 10월 2일, 처녀비행을 실시하여 2시간 이상의 체공시간을 기록했다.
Phase II 테스트는 1952년 11월 3일과 1953년 3월 15일 사이에 실시되었다. 그 기간동안 엔진의 신뢰성면에서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J57 엔진은 평상 추력 비행시 압력이 급작스럽게 변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착륙 접근시 기수가 들어올려지거나 기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문제점이 발견되었으며, 브레이크 시스템의 요구된 거리이내에서 기체를 멈추게하는 성능이 부족했다.
두대의 시작기체는 오하이오州에 위치한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Wright-Patterson AFB,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는 에드워드 공군기지 만큼이나 미공군 군용기 개발사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다.)에서 수명을 다할때까지 광범위한 비행테스트를 지속하였다.
1957년 XB-52기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내의 라이트 공군 개발 센터(the Wright Air Development Center)로 보내져, 후에 J57 엔진 4개와 J75 엔진 2개를 달고 시험비행에 나서기도 했다. YB-52 기는 783시간의 시험비행후, 1958년 1월 27일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내의 미공군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기체 모두 존슨 대통령의 영부인이 주도한 '국가 청결 프로그램'의 희생양으로 1960년대 중반 해체되었다. 즉, 미국을 청결하게 가꾸자는 대대적 캠페인(대통령의 마누라가 앞장섰으니 얼마나 굉장했겠는가...)에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공군의 다른 잉여 군장비와 함께 제거대상 리스트에 올라 말끔히 해체되었던 것이다. 제작당시에는 비밀유지의 이유로 제대로 촬영되지 못했고, 박물관에서 지낼만큼 노후화된 이후에는 아예 해체되어 버렸으니, 사진 자료구하기 힘든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YB-52의 제원>
일반제원 |
전장 : 152피트 8인치(약 46.3m) W/S : 185피트(약 56.4m) W/A : 4,000평방피트(약 371.6㎡) 전고 : 48피트 3.6인치(약 14.6m) 자체중량 : 155,200파운드(약 70,400kg) 최대중량 : 405,000파운드(약 183,700kg) |
추진기관 |
모델 : 8×프랫트&휘트니 YJ57-P-3 터보젯 엔진 출력 : 각기당 8700파운드 |
성능 |
최고속도 : 시속 611마일/983km(20,000피트/6100m 상공), 시속 594마일/956km(35,000피트/10670m 상공) 초기상승속도 : 4,550피트(1390m)/분 전투행동반경 : 3,545마일(약 5,700km)(10,000 파운드 폭탄 적재) 항속거리 : 7,015마일(11,287km) |
무장 |
고정장착무장 : 無 최대무장적재량 : 43,000파운드(약 19,500k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