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추리 시리즈

USAF Century Series - 개관
센추리 시리즈는 미공군의 제식 전투기 중 F-100부터 F-106까지의 기체 즉 6기종을 말하는 것으로 F-100,101,102,104,105,106이 있다. 그 이후에 등장한 F-111과 F-117은 공식적으로 센추리 시리즈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공식적인 센추리 시리즈는 50년대에 개발, 양산된 기체에 국한하고 있다. 물론 F-4팬텀도 처음 공군에 인도되었을 때는 F-110이라는 제식명칭이 부여되었으나 해군기에서 출발하였으므로 포함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센추리 시리즈는 50년대에 개발된 미 공군의 제식전투기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미 공군의 센추리 시리즈는 1950~60년대에 주력으로 활약하고 70년대초와 말에 각각 등장한 팬텀,이글,펠컨 등 차세대 전투기들의 등장으로 서서히 공군에서 모습을 감추고 주 방위군으로 옮겨져 80년대까지 활약하였다. 이 전투기 들의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F-100/105는 전투폭격기로써 베트남전에서 활약하였으며 F-101/102/106은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로 부터 미 본토방공에 힘쓰던 기체들이었고 F-104는 센추리 시리즈중 최초로 마하 2를 돌파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어중간한 성능과 잦은 추락사고로 인해 '과부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 공군에서는 조기에 퇴역하엿다. 하지만 나토나 극동아시아 지방의 공군에서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약 2년전 이탈리아공군을 마지막으로 F-104가 세상에사 모습을 감추기도 하였다. 센추리 시리즈 중 미 공군에서 가장 오래 운용한 것은 F-106이고, 해외에서 가장 오래 운용한 기종은 이탈리아공군의 F-104이다. 이것만 보아도 센추리 시리즈는 미 공군은 물론 서방국가들의 공군력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NorthAmerican F-100 SuperSabre - 개발사 : 세계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F-100 수퍼세이버는 세계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로 미 공군에서도 초음속 전투기는 F-100이 최초였다. 당시에는 최대속도가 전투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요소였기 때문에 이는 세계에 이목을 끌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소련은 얼마 후에 초음속 전투기 MiG-19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수퍼세이버는 1949년 2월 노스아메리칸사가 F-86세이버의 초음속화를 검토하면서 개발이 시작된다. 1949년 9월 14일 세이버의 요격기형인 F-86D를 주날개와 꼬리날개의 후퇴각을 45도로 다시 설계한 세이버 45형의 설계안을 완성한다. 그리고 다음해 6월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소련의 MiG-15로 인한 미그쇼크가 확산되고 MiG전투기들을 제압할 수 있는 고성능의 요격전투기가 요구되었고 이윽고 여기에 세이버45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YF-100이 드래그슈트를 펴고 막 착륙한 모습
1951년 1월 19일 노스아메리칸사 사내명칭 NA-180으로 명명된 세이버45는 LA에 위치한 공장에서 기체제작이 시작되었다. 기체제작에 관련된 계약은 1951년 11월 1일에 이루어졌으며 YF-100A 시제 1,2호기의 제작결정이 이루어진다. 양산형 F-100에 대한 계약은 같은해 11월 20일에 채결되었다. 1952년 공군의 모크업 심사를 통과하였다. 그 후 10개월간 공기역학적인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세이버 45는 초음속으로 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는 캐노피와 수직미익에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를 수정하여 초음속으로 날 수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시제기인 YF-100A 1호기가 1953년 4월 24일에 완성되었다. 이 기체는 극비리에 분해되어 에드워드 공군기지로 운반되었다. 이는 '초음속 전투기' 가 당시 비밀무기 축에 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에드워드기지로 운반된 YF-100은 5월 25일 노스아메리칸사의 테스트 파일럿에 의해 처녀비행을 하게 되고, 이 비행에서 곧바로 초음속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4개월 후 9월 15일에는 2단계 시험비행을 완료하고, 10월 3일에는 15km의 직선코스에서 1215.70 km/h 라는 당시 세계최고속도 기록을 갖게 된다. 이리하여 세계최초의 초음속전투기 라는 명예로운 닉네임을 얻은 YF-100은 이름 앞의 Y자를 떼어버리고 F-100으로서 실전에 배치된다.
- 최초로 배치된 요격기형 F-100A 먼저 A형의 특징을 살펴보면 수직꼬리날개가 짧고 방향타가 작은 것이 특징이며 M39 20 mm 기관포 2문을 기수아래면에 장착하고 있고 공기흡입구 상부에는 레이더 조준기를 장착하고 있다. 이것은 레이더 조준기를 이용한 기관포사격 즉, 제공전투가 주요임무인 것을 알고있다. 애초에 수퍼세이버A형은 F-86F 세이버의 후계기의 성격이 강한 제공전투기로 개발된것이다. 이 수퍼세이버의 실전배치는 1954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제 479 주간요격비행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고가 연속으로 발생하여 한때에는 일시적으로 비행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당시 최고성능의 요격기였던 F-100A

이름은 '수퍼세이버' 이지만 정작 엔진은 세이버와 같은것을 쓴다.
첫 사고는 1954년 10월 12일에 일어났다. 사고당시 비행상태는 고도 7,228 m 로 비행도중 기체가 갑자기 공중분해되어 조종사가 사망하였다. 이 사고의 원인은 기체의 피칭과 요잉에 대한 힘의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하였는데 꼬리날개의 지지력이 부족하여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회전비행시 일시적으로 조종불능이 일어난것이 원인이었다. 이 사고 이후 공군은 사고조사에 들어갔고 F-100 전기체에 모두 비행이 정지되었다. 비행이 재개된 것은 이로부터 3개월 이후이며 수직꼬리날개의 위치를 높이고 면적을 27%로 확대하고 주날개의 끝단 면적이 소폭확대되었다. 이러한 개수절차를 거친 기체는 약 70대이다. 두번째 사고는 1955년 2월 26일 노스아메리칸의 테스트파일럿인 스미스가 F-100A-10형의 초음속 성능을 재차 확인하는 비행을 실시하던 도중 발생하였다. 사고원인은 유압계통의 고장이었다. 이 기체는 태평양에 곤두박질 치며 추락하고 있었다. 다행히 조종사는 마하 1.05라는 속도에서 사출에 성공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F-100의 사출좌석이 제대로 작동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F-100A는 1955년 4월, 203대를 끝으로 양산을 종료하고 C형의 양산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 또 다른 수퍼세이버 F-100C 노스아메리칸은 F-100A의 미 공군배치로 인해 P/F-51 무스탕과 F-86 세이버와 함께 3연속으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 제작사가 되었다. 이에 한참 물이올라버린 노스아메리칸은 수퍼세이버의 전천후 전투폭격기형인 사내명칭 NA-212 란 이름으로 F-100B를 계획하였다. 이 기체는 J75엔진과 함께 공기흡입구가 동체 상부에 위치한 획기적이면서도 약간은 엽기적인 디자인을 채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디자인은 채택되지 못하고 훗날 YF-107로 F-105와 전투폭격기 사업에서 격돌하게 되어 또한번의 기회를 갖게되지만 여기서도 좌절하고 만다. 하여튼간 F-100B에 이어서 또다시 전투폭격기에 도전한 노스아메리칸은 새로운 전투폭격기형인 F-100C의 정식 개발,양산승인을 공군으로부터 따내고 1954년 2월 본격적으로 양산계획에 들어갔다. 이 F-100C는 F-100A 1대를 1954년 7월에 개조하여 시험비행에 투입하여 실험을 실시하고 10월에는 제대로된 C형 1기가 투입되어 55년 1월 17일에 처녀비행이 실시된다.
F-100C는 A형의 주날개를 보강하여 하드포인트 6개가 설치되어 폭탄탑재량이 5톤에 이르게된다. 각 무장장착대에는 340 kg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고, 또한 냉전시대인 만큼 Mk.7 핵폭탄도 탑재할 수 있었다. 단 이 핵폭탄을 떨구기위해서는 MA-2 저고도 폭격시스템이 꼭 있어야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빵빵한 무장탑재력을 자랑하는 전투폭격기였지만 공중전을 위한 고정무장은 있었다. 이 때에는 아직 미사일만능주의가 심할정도로 만연된 때는 아니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하여간 F-100C의 고정무장은 기존 2문의 M39기관포를 4문으로 늘어나 그 위력이 한층 높아졌고, 2.75인치 로켓탄이 21발 들어가는 로켓탄팩 2기가 장착되어, F-100A 보다 더 뛰어난 공중전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탑재량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중량이 늘어나고 그러면 항속거리가 줄어들게 된다. 전투폭격기에 있어 필수적인 존재인 항속거리가 줄어든다면 그건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F-100C는 F-100A의 연료탑재량인 774 갤런에서 1,704 갤런으로 늘어나게되고 공중급유능력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엔진은 추력이 높은 J-57P-21으로 교체하였다.

힘차게 이륙하는 F-100C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한 F-100C는 1955년 7월 14일 미 공군 포스터 공군기지의 제450 주간전투비행대에 처음으로 인도되었다. 이 기체들은 미 공군의 곡예비행단인 선더버드의 곡예기가 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F-100C는 1956년 4월 까지 노스아메리칸 LA 공장에서 451대, 콜럼버스 공장에서 25대, 총 476대가 양산되어 미 공군에 배치되었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것은 콜럼버스 공장에서 생산한 25대의 F-100C는 따로 NA-222라는 사내명칭과 F-100C-10-NH라는 공군 공식명칭이 있었다. 기존 LA에서 생산한 F-100C와 무슨차이가 있는 지는 잘모르겠지만 말이다...
- 내가 진정한 '수퍼' 수퍼세이버다! F-100D F-100D는 F-100C보다 더욱 향상된 전투폭격기이다. F-100D는 수퍼세이버 시리즈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고 또한 가장많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잘난 F-100D의 양산은 1955년 7월 부터 시작되어 11월에 양산 1호기를 배출하고 1956년 1월 24일에 양산 1호기의 처녀비행이 성공한다. 말 그대로 '후딱' 개발이 진행된 F-100D의 특징은 기존 F-100이 안고 있던 불량한 비행성능을 수직꼬리날개를 더 높게 설치하고 주날개 면적을 확대하여서 크게 개선하고, MB-3 자동조종장치가 장착되었는데 이는 초음속 전투기 전용으로 설계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전에서 활약한 F-100D!!
무장부분에서는 더욱더 성능이 향상되었다. 자세히보면 먼저 기존 Mk.7 핵폭탄이 더 개량된 Mk.38/43도 탑재할 수 있게 되었고 주날개 아래에 450 갤런 보조연료탱크 1기가 설치되어 항속거리를 증대시켰다. 또 이 연료탱크는 동료기에 급유가 가능한 버디포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표준 공대지 무장은 340 kg 폭탄 6발이나 454 kg 폭탄 4발을 장착할 수 있고 미 공군 최초로 AGM-12 불펍 공대지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펍의 운용가능 갯수는 2발이었는데 반면 미 해군에서 AGM-12를 최초로 운용하게 된 FJ-4 퓨리는 4발이나 장착할 수 있고 F-100D와 거의 맞먹는 전천후성을 보여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FJ-4는 F-100D와 같은 노스아메리칸의 작품이었다. 공대공 무장은 F-100C와 고정무장은 같지만 다른점이 있다면 바로 GAR-8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 역시 미 공군에서는 최초로 GAR-8은 총 4발이 장착 가능했다. 하지만 양산 직후부터 운용하지는 않았고 F-100D-60부터 장착이 가능해지게 된다. 또다시 언급하게 되지만 이것 역시 미 해군의 FJ-4가 먼저 사이드와인더를 운용하였다. (미 해군은 항상 공군을 추월해 왔었군요... 톰캣이 점차 퇴역하면서 뒤집히기는 했지만...) F-100D의 양산대수는 LA공장에서 940대, 콜럼버스공장에서 총 334대, 총 1,274대가 양산되었다.
- 그 밖의 수퍼세이버들... F-100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복좌르 채택한 F-100F는 훈련용으로 개발되었다. 성능은 F-100C의 성능에서 기관포가 2문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베트남전에 투입되어 고속 전선통제기로 운용되었다. F-100F는 1956년 8월 첫 비행하여 1959년 10월까지 양산이 계속되어 총 339대라는 의외의 양산대수를 기록한다. 이로서 F-100의 총 양산대수는 2,294대를 기록하게된다. 이 밖에도 정찰형인 RF-100과 실험형인 NF-100F가 있었지만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복좌형인 F-100F
- 수퍼세이버의 실전기록 냉전의 바람이 한참 휘몰아치던 1956년에 수퍼세이버는 미 공군에 6개의 증강된 형태의 전투비행대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다음 해에는 16개까지 확대배치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전이 발발하기 얼마전인 1964년에는 F-104D형 위주로 10개 비행대대와 주방위군에 A/C형 11개대대를 배치하고있었고,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나서 베트남에는 전투폭격기형인 C/D/F형이 투입되었다. C형은 주로 근접지원이나 COIN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D형은 북베트남의 주요거점 공격, F형은 O-1/2를 대신해 FAC를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기체 자체가 근접지원도 가능한 상태라 FAC를 통해 발견된 목표를 곧바로 공격하기도 하여서 F-100의 다용도성을 과시하였다. 이 수퍼세이버들은 주로 태국이나 남베트남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하였고 필요에 따라 KC-135의 공중급유를 받기도 하였다.
- 수퍼세이버의 해외진출 수퍼세이버는 1960년에 최초로 해외의 공급이 되었다. 첫 국가는 바로 대만으로 D형규격으로 개량한 A형 80대를 도입하였고 터키는 260대를 공급하여 미 공군에 이어 최대보유국이 되었다. (터키는 미 공군을 제외한 F-16 최대보유국 이기도 합니다.) 덴마크 공군은 3개의 축소형 비행대대 분량의 F-100D형을 인도받았고 프랑스 공군도 3게 비행대대 가량의 F-100D/F를 운용하였었다. 하지만 가장 빨리 퇴역시킨 나라이기도 하다. 반면 가장 많은 보유수를 자랑하는 터키공군은 1980년대 말까지 F-100을 운영하였다. 여기서 특이한것은 대부분 전투기는 타국가에 수출하기위해 따로 개량형이 있기 마련인데 수퍼세이버에게는 그런 개량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만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엄연히 수출형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제작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 수퍼세이버의 수출형들 F-100J : 일본 항공자위대용으로 개발됨, F-100D를 개조한 전천후 요격형 (이것 대신에 F-104J가 공급된듯...) F-100L : D형의 엔진을 J-57-P-55로 교체한 수출형 F-100N : D형의 전자장비를 간소화 시킨 수출형 F-100S : 터보팬엔진을 탑재, 프랑스공군을 위한 수출형 다시한번 말하지만 위의 기체들 중 실용화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McDonell F-101 Voodoo -ㅡ= 개발사 =ㅡ- 미 공군이 막 탄생하고 나서, 즉 2차대전 직후 대규모의 군비축소와 함께 공군의 하부조직으로 창설된 전략공군 (SAC : Strategi Air Command)은 제트엔진의 시대를 맞이하여 기존의 프로펠러 엔진의 호위 전투기를 대체할 제트전투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러니까 초기의 제트엔진은 프로펠러에 비해 연료의 소모가 많아서 장거리를 날아가는 폭격기를 끝까지 호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SAC는 1946년 기존의 운용중인 제트전투기가 아닌 새로운 전투기를 제안하게 된다. 이 계획의 이름은 침공전투기 사업으로 정해졌고 맥도널의 XF-88등 3개 사에서 경합을 벌였지만 3기종다 SAC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공군은 F-84/86의 생산을 우선시하여 SAC의 침공전투기 사업은 사장되고 말았다. 하지만, MiG-15의 등장으로 전략공군의 B-29 폭격기가 자꾸 육군으로 소속을 바꿈에 따라(?) 다시금 침공전투기(호위전투기)의 필요성을 깨닫게되고, 이렇게 미그쇼크 덕에 탄력을 받게된 침공전투기 사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SAC는 3기종중에 가장 성능이 좋았던 맥도널 사에게서 XF-88의 엔진을 더 강력한 것으로 교체한 성능 향상형을 제안받았고 이전과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어 XF-88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11월 XF-88은 [F-101 Voodoo]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953년 5월 부터 미 공군의 정식 발주가 시작되어 선향양산형 31기의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F-101의 생산이 진행될 무렵 SAC는 돌연 F-101의 용도를 침공(호위)전투기가 아닌 장거리 핵공격기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개발된 소형 핵폭탄 때문이다. 그렇다고 호위임무는 아예 사라진게 아니라 2차임무로 변경되었다. 다시 말하면 호위전투기가 핵공격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튼간 F-101A의 1호기가 1954년 9월 29일에 첫 비행을 실시하였다. 첫 비행에서 마하 1.07이라는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여주어 공군은 마음에 들었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법! J57엔진의 압축기의 실속문제와 공격임무에 사용하기에는 약한 하중강도가 문제시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한 F-101C 47기가 새로 발주되어 1956년에 공군에 인도되었다.
-= 전투폭격기(?) F-101A/C

F-101A의 옆모습
본격적으로 공군에 배치되어 활약하게된 F-101A/C의 기본임무는 전투폭격기로 추력 6.8t의 J57-P-13 2기를 장착하였고 20 m 가 넘는 전장과 20 t 에 달하는 전투비행중량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대형전투기였다. 그러면서도 마하 1.51에 달하는 최대속도, 4,000 km 의 장대한 항속거리를 자랑하며 1957년 5월에 전환훈련을 마치고 제 27 SFW (전략전투비행단)에 인도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작은 변화가 생기는데 그건 바로 F-101부두가 속해있어야할 곳이 전략공군사령부가 아닌 전술공군사령부로 바뀌어 버린것이다. 이유인 즉슨 미 공군내의 역할분담이 변화에 따라 전략공군이 모든 핵공격/호위전투기를 포기하고 전술공군 사령부로 넘긴것이었다. 이로 인해 제 27 전략전투비행단은 1957년 7월 1일부로 전술공군사령부 소속 제 27 전술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전술공군사령부는 새로이 핵공격이 가능한 웨폰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F-105) 마침 물려받은 F-101을 찬찬히 뜯어보니 당시 사용중이던 F-100C/D와 비교할 때 여러가지 면에서의 우수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전술공군사령부는 당시 전쟁 위협이 높았던 유럽공군 (USAFE)으로 보내기로 하고 제 27 전투비행단의 기체를 모두 영국의 제 81 전술전투비행단에 배치하였다. F-101의 무장은 M39 20mm 기관포 4문을 기본무장으로 하고 GAR-1(AIM-4 Falcon) 세미액티브호밍 미사일 3발, 2.75인치 FFAR 6발들이 로켓탄팩 2개를 동체 아랫면에 장착하였다. 화기관제장치는 MA-7 레이더, K-19 건 카메라를 조합하여 기관포와 미사일을 통제하였다. 핵무장은 주익중앙부 아래의 3개의 전용파일런이 설치되어서 중앙에 Mk.7/28 핵폭탄이 장착되었고 양쪽의 2파일런에는 연료탱크가 장비되었다. 이후 F-101A/C는 유럽공군에서 장거리 전천후 핵공격 전력으로서 NATO 전력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1966년 F-4C로 교체되었다.
- 사진정찰기 RF-101A/C 기존 F-101A/C의 기체에 정찰용 카메라를 부착한 형태이다. 1953년 10월에 전략공군사령부는 F-101을 생산하고 있던 맥도널사에 생산중이던 선행양산형 F-101A 2기를 정찰형으로 제작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F-101A 규격으로 35기가 발주되었고 이후 F-101C형이 개발되고 나서 C형 규격으로 166기가 제작되었다. 이중 96기는 전투폭격기형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하여튼간 완성댓수로만 따지만 정찰형이 203기, 전투폭격기형보다 더 많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RF-101A/C는 개발도중에 소속이 바뀌게 되어 (위에서 언급) 1957년 5월에 아예 전술공군사령부 휘하 제 363 전술정찰비행단에 배치되었다. RF-101A/C는 F-101A/C의 기수를 연장하여 쐐기형으로 각이 진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 여러가지 정찰용 카메라들을 쑤셔넣고 있는것이다! 여기에 들어있는 카메라들을 보자면 먼저 페어차일드제 KA-2 전방사각 카메라 (12인치 렌즈), KA-2 트라이메트로군 카메라 (6인치 렌즈, 3기탑재), M39탄창을 떼어낸 자리에 KA-1 수직스플리트 (36인치 렌즈)를 탑재하였다. 전방사각 카메라에는 동영상보정 기능이 부여되어있어 초저공 고속정찰이 가능하였다. 이 밖에도 AN/APN-22 항법레이더, VF-31 뷰파인더, 유니버설 카메라컨트롤 시스템을 설치하였으며, 야간 정찰용으로 KA-46 카메라, 조명탄 발사기도 탑재하였다. 1964년 말에는 베트남전쟁의 본격개입에 따라 카메라의 개량이 이루어져 전방사각카메라는 KA-72A, 트라이메트로곤을 KA-56 파노라믹카메라 1대로 교체하였다. RF-101A/C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핵공격기능이 살아있는 것으로 B28/43/57등의 핵폭탄 탑재 및 투하기능이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말 그대로 정찰하다가 곧바로 공격이 가능한 무서운(?) 기체이지만 실제로 그런일은 없었다. (다행이다...)

맥도널 더글라스 공장앞에서...(어디인지는...) 이 RF-101A/C는 TAC에서 정찰임무를 맡아오던 RF-84F를 대체하였고 1961년 베트남전이 발발하기전에 4기가 사진처리장비와 함께 베트남에 파견되었고 1967년 부터는 베트남전의 격화로 인해 다량의 RF-101이 태국과 남베트남에 배치하여 남/북베트남과 라오스(호치민루트...)에 대한 본격적인 정찰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는 1970년 10월에 종료되었고 그 동안 37기의 RF-101이 손실되었다. 베트남전의 종전이후 RF-101은 점차 퇴역의 시기를 맞이하였고 1971년에 TAC에서 퇴역이 시작되었고 1976년 까지 ANG (주방위군공군)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공군에서는 RF-4C로 교체되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미 공군 이외에 RF-101을 사용한 국가는 대만으로 금문도 상공 공중전 이후 1959년에 8기를 공여받아 기존의 RF-100을 교체하여 중국대륙을 정찰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적어도 5기가 격추된걸로 알려져 있다.
- 요격전투기 F-101B/F
F-101이 한창 개발중인 1952년, ADC(방공공군)은 F-101의 고속성능과 긴 항속거리에 만족하여 F-101의 요격기형으로의 전용을 계획하게 된다. 1955년 ADC는 예산을 확보하여 제식명칭 F-101B로의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ADC는 궁극의(그 당시로써...) 요격시스템인 MA-1 화기관제장치를 탑재한 WS-201B 계획 (F-106A)를 개발중이었는데 F-101은 WS-210B를 보좌하는 기체로 개발되었다. 이 WS-201B는 고공에서의 완전한 자동요격을 목표로 한 것에 비하여 F-101B는 지상관제 시스템과 연계되어 있지만 언제든지 조종사의 재량으로 요격이 가능하도록 복좌형으로 설계하였다.
F-101B는 완전한 요격기의 능력을 갖추도록 기본무장인 기관포를 떼어내고 후방석과 회전식 웨펀베이를 설치하였다. 이 웨펀베이 내부에는 MA-1의 간이형인 MG-13을 탑재하여 자동요격을 기본으로 후방석에는 무기관제장교(WSO)가 탑승하는 반자동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IR센서를 사용한 조준이 가능하며, 강력한 ECM환경에서도 작전수행이 가능하다. 이렇게 요격기의 틀을 갖춘 F-101은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원래 전투폭격기였던 F-101B/F가 요격형이 되면서 오히려 중량이 늘어나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나버린것이다. 이리하여 성능저하를 막기 위해 A/B추력이 7,666 kg로 증가한 J57-P-55 터보제트엔진을 장착하였고 공기흡입구와 배기노즐을 확대하였다 또한 랜딩기어와 메인타이어를 강화하였다. F-101B의 1호기는 1957년 3월 27일 첫비행을 하였으며 1961년까지 480대가 인도되어 F-101시리즈중 최다생산모델이 되었다. F-101B 중 72기는 제한적인 2중 조종장치 (엔진시동/소화, A/B점화, 랜딩기어조작 등..)가 장착되어 훈련임무에도 사용이 가능하였고 또 다른 10기는 FCS를 떼어내고 밸러스트를 장착하여 훈련전용으로 쓰였고 또 다른 4기는 완전한 2중 조종장치가 장착되었다. 이 훈련모델들은 중 밸러스트가 장착된 것은 TF-101B로 명명되었고 1961년 TF-101F로 개칭되었다. 별도로 2중조종장치가 장착된 것은 F-101F이라 명명되었고 TF-101F와는 달리 14대를 신규생산하고 기존의 기체 65기를 개조하여 훈련과 방공임무에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다. 모든준비가 끝난 F-101 요격형의 배치는 1959~1960년중에 이루어졌다. 방공공군의 42개 비행대대중에서 17개의 비행대대가 부두를 장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각 F-89J, F-86L, F-102A, F-104C를 대체하였다. 강력한 FCS와 긴 항속거리 (최대3시간의 공중초계가능)는 후에 개발된 F-106A에 뒤지지 않는 성능을 보여주어 1960년대 북미방공부대의 주력을 이루었다. 방공공군의 F-101B/F는 1971년 까지 모두 퇴역하여 주방위공군에 분산배치 되었고, 1981년에 이 주방위공군에 있던 기체들 마저 모두 퇴역한다. 한편 1961년 미국/캐나다의 공동방공망인 NORAD(NORth america Air Defence)가 조직되면서 캐나다국방군에 F-101B 56기와 F-101F 10기가 공여되었다. 캐나다공군은 1961년 7월 부터 5개비행대를 편성하고 북미방공망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그 후 1971년에는 기존 F-101B 56기가 반환되고 새로운 기체 56기가 공여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체들은 공중급유 프로브가 제거되고 IR센서가 장착되었다. 캐나다공군의 F-101B/F는 1995년 CF-188 호넷으로 모두 대체된다.
 위에서 아래로 F-101B, YF-101, RF-101C
Convair F-102 Delta Dagger ♤ 개발/시제기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 공군에게 최고의 문제점으로 대두된것이 바로 소련의 핵폭격기 전력이었다. 미 공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고성능의 요격전투기를 개발하고 방공공군을 창설하여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하였다. F-102 델타대거는 미 공군 최초로 순수 요격을 목적으로 개발된 전투기이다. 이 뾰적하고 날카롭게 생겨먹은 삼각날개를 가진 전투기는 1949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F-86/89, F-94등의 제공전투기와 요격기가 개발 되던 시기이다. 미 공군은 이들 전투기의 차세대급 전투기는 15,000m 이상의 운용고도와 초음속 요격능력이 있는 기체였다. 이랬던 것이 1950년 9월에 운용고도 20,000m, 마하1.3에서의 요격이 가능하도록 성능을 상향조정하라는 요구와 1955~59년 사이에 개발을 완료 하라는 미 공군의 압박이 있었다. 구체적인 후보선정에 앞서 휴즈사는 XM-1179라 명명된 FCS의 개발을 시작하였고 공군은 총 19개사가 제시한 기체들을 살펴보며 고심하였다. 결국 Convair사의 F-102요격기 안이 선정되었으니 이 때가 1951년이다. Convair사의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1948년 9월에 최초비행한 XF-92A란 전투기가 모체였는데 이는 델타익 전투기로서 세계최초로 비행한 델타익전투기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Convair사의 안은 이 XF-92A보다 1.5배 대형화 되어있었다. 당시로선 이런 수평미익이 없는 델타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또한 Convair사는 미공군의 성능에 만족시키기 위해 미사일을 내부에 수납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F-22와는 의도가 다릅니다.)
 YF-102 미 공군은 YF-102 2대와 양산형 25대를 발주하여 1959년 안에 후딱 해치우려는 의지를 보여 시제1호기가 1953년 10월 24일에 첫 비행을 성공시키지만 정확히 8일후에 시험비행을 위해 이륙직후 추락하는 바람에 1954년 시제2호기가 완성되기까지 시험비행은 지연된다.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데... 시제2호기의 시험비행에 앞서 풍동시험 도중 F-102의 외형 때문에 초음속 비행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이를 어째..-_-) Convair사의 설계팀은 F-102의 재설계에 착수하였다. 구체적인 개수사항은 이렇다. - 동체 2m 연장 - 캐노피 형상 변경 (3각형) - 주익과 수직미익의 후퇴 - 앞전후퇴각 60도로 변경 - 주익 앞전에 코니컬 커버 신설 - 주익 상면에 경계층 패널 신설 - 좀더 추력이 높은 P&W사의 J57엔진 채택 - 면적법칙의 적용 특히 이 면적법칙은 YF-102의 속도향상에 큰 기여럴 하였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은 항력이 동체와 날개의 단면적의 합으로서 이루어저야 한다는 법칙이다. 따라서 이 법칙을 적용시키면 큰 항력이 발생하는 날개와 동채의 연결부위를 오목하게 만들어서 동체의 단면적에 날개의 단면적을 흡수시킬 수 있게 된다.
 면적법칙이 적용된 후 오목해진 중앙동체. 이러한 대수술 끝에 재탄생한 F-102는 다시금 1954년 12월 20일 첫비행에 성공하고 이윽고 초음속 비행에도 성공하여 원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 양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F-102A는 시제기에 비해 업그레이드 된 곳이 많은데 살펴보면 휴즈사에서 개발한 MG-10 FCS가 기수에 장착되었다. 이것은 광역수색성능과 완전자동추적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캐노피에는 IR센서가 장착되었고 방공공군에 투입되는 기체들은 SAGE와의 링크를 위해 ARR-39 링크시스템을 장비하였다. 무장을 보면 내부의 미사일 수납고에 빔 라이딩/적외선추적방식의 GAR-1(AIM-4A/C)공대공 미사일 3발과 미사일 창의 측면 안쪽에 2.75인치 공대공 로켓탄 24발을 수용하였다. 그러다가 2.75인치 로켓탄은 폐지되고 AIM-4E/F와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AIM-26 지니 1발을 탑재하게 된다. F-102A는 1956년 제327요격비행대대에 최초로 배치도어 총 875대가 양산된다. 훈련형은 조종훈련과 기량유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하게 Side by Side의 형태이다. 기수의 FCS는 제거되어있고 길이는 19.21m로 축소된 반면 중량은 12,600 kg으로 증가하였다. 훈련형의 제식명칭은 TF-102A이고 총 111대가 양산되었다.
♤ 실전 1968년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면서 남한/미국과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일본의 나하 공군기지에 주둔하던 제82요격비행대대의 F-102가 오산 공군기지로 임시 파견되기도 하였고 1971년 까지 일본과 남한을 오가며 북한의 견제세력으로 이용되었다. F-102는 단일목적 전투기인 관계로 주로 요격임무에만 투입되었는데 나중에는 B-52를 엄호하는 호위기로 점차 변경되어서 베트남전에 투입되었다. 북폭임무를 맡은 B-52와 함께 들어가던 F-102가 MiG-21에 격추되어 버리자 F-102는 고성능의 요격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절하되어 점차 일선에서 물러났다. 한편 그리스와 터키는 F-102를 가지고 서로 공중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자세한 자료가 없군요...)
♤ 퇴역 F-102는 1970년에 전 기체가 모두 일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후계기 성격으로 등장한 F-4 팬텀과 F-106 델타다트의 요격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F-102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QF-102로 활약아닌 활약을하며 AIM-120의 표적이 되어 하나둘 씩 사라져 버렸고 일부는 F-102를 보유한 터키와 그리스의 후속지원용 부품으로 하나 둘씩 뜯겨져 나갔다.

Lockheed F-104 Starfighter ※ F-104의 추락사고나 손실율에 관한 자료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너무 흔해서...-_-;;)
♤ 개관 F-104 스타파이터는 센추리시리즈중 최초로 음속의 2배가 넘는 속도를 달성한 기체이다. 또한 이 F-104를 시작으로 마하2의 시대가 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마하2라는 고성능을 가진 기체가 개발되었지만 정작 미 공군은 그리 많은 댓수는 아닌 200여대 정도였다. 대신에 자체적인 전투기 개발능력이 없는 NATO국가들의 주력전투기로 오랜기간 사용되어진다. 유럽에서는 얼마전에 이탈리아공군의 F-104S-ASA가 퇴역함으로써 F-104의 시대가 막을 내렸는데 이는 첫비행으로 부터 무려 40여년이 지난뒤로 F-104는 그 악명에 맞기 않게 오랜 운용기간을 보여주었다. F-104의 성격은 요격기 쪽에 가까운 성능을 가진 기체이다. 그래서 등장당시 마하 2라는 속도를 등에 업고 최후의 유인전투기라고 불리우면서 미 공군의 요격기 자리를 꿰차게 된다. F-104A/C형은 북미대륙의 반자동 방공시스템인 SAGE에 링크되어 방공부대의 주력을 차지하였고, 전술항공단에서도 높은 속도로 인해 레이더 피탐지율이 낮은것에 착안하여 F-104C/G형을 핵공격기로 운용하기도 하였다.
♤ 개발
 다른 센추리시리즈와는 다르게 X 가 붙은 시험기 F-104의 기본개발은 1951년부터 시작되었고 1953년에 미공군이 XF-104라는 이름의 실험기 2대를 발주하게 된다. 다음해인 1954년에 라이트사의 J65-W-6 터보제트엔진 (최대추력 : 4,670 kg)을 장착하고 첫 비행에 성공한다. 1955년 3월에는 최대속도가 마하 1.79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마하 2의 가능성이 보이자, 좀 더 추력이 강화된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J79 엔진을 장착한 실험기 17대를 추가로 발주하여 1955년 4월 27일에 J79를 장착한 YF-104가 마하 2를 돌파하게 된다. 곧이어 양산형의 발주가 시작되었고 최초의 양산형인 F-104A는 1956년 2월 17일 첫비행에 성공하여 총 153대가 만들어진다.
♤ 각 형식 - F-104A/B F-104A는 실험기에서 사용했던 J79엔진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F-104A에 쓰인 정식모델명은 J79-GE-3A이고, 최대추력은 6,712kg이었다. 무장능력은 주날개 끝단에 AIM-9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할 수 있어 당시로서는 미사일 자체나 장착위치로나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한 미사일 대신에 640리터 짜리 보조연료탱크도 장착할 수있느데, 사실상 주날개 끝단은 보조연료탱크 장착용으로 쓰여졌다.
 주날개 끝단에 미사일을 달고 있는 모습...(진짜 구하기 힘듬..) F-104B는 F-104A의 훈련기형으로 좌석증설로 인해 F-104A보다 동체가 약간더 길어진 것과 벤트럴핀이 먼저 증설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기체이며, 총 26대가 양산되었다. 한편 F-104A 초기형은 피치업과 방향불안정, 엔진의 부조화로 인해 고속비행시 상당히 불안한 문제를 일으켰다. A형 후기형에서는 동체후방아래면의 벤트랄 핀을 설치하여 피치업고 방향불안정 문제를 해결하여 1958년 부터 비행대 배치를 재개하였다. 참고로 A형은 양산된 153대중 55대가 추락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에 엔진문제가 속출하여 추락사고가 이어지자 일시적으로 비행중지 조치가 내려졌고 엔진은 J79-GE-3B로 교체하여 일시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긴 하였다. 그러나 미 공군은 SAGE에 F-104를 연결시키는 링크시스템의 인터페이스가 여의치 않자 1960년초에 방공단에서의 F-104운용을 포기하게 된다. 여기서 퇴출된 기체들은 대부분 주방위군 공군으로 배치된다.
- F-104C 기존의 요격기로서 운용하였던 F-104A를 개수하여 전술비행단에서 운용하게 된것이 F-104C형이다 기존 F-104에 비해 개수된 점은 엔진이 J79-GE-7로 바뀌었고, 20mm 발칸포 추가, 공중급유장치 추가 이다. 그러나 C형 역시 엔진과 부조화를 일으켜 77대만이 양산되고 만다.
 주날개 끝단에 미사일이 있는 F-104C 구하기 매우힘들었음...
- F-104G F-104G는 위에서 말했듯 전술항공단의 핵공격기로 운용되었던 기체이다. 특징은 F-15A나잘 화력제어시스템을 채택하였고 저공침투능력, 핵공격능력, 향상된 공대공 전투능력, 개선된 항법장치, 수직꼬리날개의 대형화로 방향안전성이 양호하게 되었다. 방향타의 동력조정계통은 비가역식이다. 또한 수평 꼬리날개의 동력조정장치도 개량되었다. G형의 엔진은 J79-GE-11A로 최대추력 7.1톤을 발취하였으며 최대이륙중량은 13톤에 달았다. 하지만 G형도 60대를 끝으로 양산이 끝나고, 이것이 미공군을 위한 F-104양산의 마지막이 되었다.F-104의 모든 기체들은 1977년 까지 미국의 군용기를 운용하는 모든 곳에서 운용을 중단하게 된다.
 USAF F-104G
♤ 해외진출 F-104의 해외수요는 센추리 시리즈중 제일 많은양이다. 먼저 독일(당시 서독)공군과 해군이 750대를 도입하여 최대운용국이 되었고,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캐나다, 터키, 일본, 대만, 파키스탄 등 F-104의 운용국은 계속 늘어만 갔다. 이는 나중에 밝혀졌지만 록히드사의 정치성 뇌물비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의 록히드사건은 유명하죠...)
♤ 실전기록 F-104의 실전기록은 운용한 나라가 많은 만큼 센추리 시리즈중에서도 가장 다양한 전적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1965년 인도-파키스탄전쟁 에서 MiG-19를 격추한 기록이 있고, (항공아트로보는 파키스탄공군 참조) 대만공군은 1960년대 산발적으로 일어난 양안위기에서 F-104G형을 투입하여 중국공군의 MiG-19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미 공군은 베트남전에서 F-104C에게 방공전투를 맡겼으나 북베트남군의 공습이 없어 나중에는 대지상공격기로 전용하지만 여러대가 추락해버리자 1970년대가 오기전에 모두 철수시켜버린다. - 제식명칭별 모음 YF-104A - 실험기 F-104A - 최초 양산형 NF-104A - 로켓추진방식, 우주비행사 훈련용으로 사용 : 120,000 ft (37,000 m)의 고도상승 기록을 보유 QF-104A - 표적기 F-104B - A형의 훈련기형 F-104C - 전술공격기 F-104D - C형의 훈련기형 F-104DJ - 일본 수출형 F-104F - 독일 수출형 F-104G - C형의 성능향상형 RF-104G - 정찰기 TF-104G - G형의 훈련기형 F-104J - 일본 수출형 (미츠비시사에서 면허생산) F-104N - NASA 실험기 F-104S - 이탈리아 수출형 F-104S-ASA - S형의 성능향상형 (최근까지 운용되었던 기종) CF-104 - 캐나다 수출형 (캐나디어사에서 면허생산) CF-104D - CF-104의 훈견기형
Republic F-105 Thunderchief ♤ 개관 F-105 선더치프는 센추리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고 화려한 실전기록을 가지고 있는 기체이다. 그야말로 실전부분에서는 치프(Chief : 우두머리, 장)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전에서의 북폭을 주도해 나간것이 있는데 이는 원래 설계당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한 선더치프는 양산대수 중 거의 절반가까이를, 그것도 베트남 한군데에서 손실했다는 미 공군의 제트전투기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개발 선더치프를 개발한 리퍼블릭사는 2차대전부터 P-47 선더볼트로 유명해진 전투기 제작사이다. 2차대전 종전후 F-84 선더제트를 개발하였고 이는 한국전쟁에서 대지상공격기로 맹활약하였다. 그 이후에 F-84의 주날개를 당시에 유행(?)하던 후퇴익으로 교체한 F-84F를 NATO의 주력 전투기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클래식제트기의 시대가 끝나고 센추리시리즈의 시대가 도래하자 리퍼블릭사는 앞서 개발해왔던 선더 시리즈의 최종적인 기체라 할 수 있는 선더치프의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F-105의 운용개념은 핵폭탄을 장착하고 마하2의 속도로 적진(소련)으로 날아가 핵폭탄을 떨구는 전형적인 (그 때 당시 기준으로...) 침공전투기였다. 1952년 4월 공군은 리퍼블릭사에 최대속도가 음속의 1.5배정도, 기본적인 핵무장 능력을 갖춘 전투기를 개발할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에 리퍼블릭사는 1955년 1월 22일에 추력이 16,000lb인 J57-P-25엔진을 장착한 YF-105A 1호기가 첫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YF-105A는 초음속 돌파 실험에 간단하게 성공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윽고 1956년 1월 28일에는 2호기가 첫비행에 성공하여서 F-105의 양산이 가시화 되었다.
 YF-105B YF-105A의 총 제작대수는 2대로 기체의 특징을 살펴보면 수직미익이 작고, 동체가 짧으며 면적법칙이 적용되어 있었다. 이기체는 주로 초음속에서의 비행성능, 기동성, 조종성 평가용으로 쓰였다. 한편 1956년 5월 26일에는 추력이 16,400 lb인 YJ75-P-3을 장착한 YF-105B (시제3호기)가 첫비행에 시도하였으나 이륙 1시간만에 착륙에 실패하여 기체가 대파되기도 하였다. 미 공군은 YF-105B의 시험비행을 계속 진행하여 시험평가를 실시한후에 본격적으로 양산을 결정하고 1956년 3월에 57회계연도분으로 F-105B 65 대와 정찰형인 RF-105B 17대의 양산을 결정하게되고, 3개월후에 복좌훈련형인 F-105C 6대의 추가양산을 결정하게 된다. 1957년에는 APN-105 전천후 항법장치의 장착, 계기판의 위치변경, Mk.43핵폭탄 운영능력획득 등 의 개량이 가해졌다.
♤ 각 형식
[F-105B] 선더치프 최초의 양산형이다. 처음에는 추력 17,000 파운드의 J75-P-5엔진을 장착하고 있었으나 블록 10형과 15형에서는 추력 24,000 파운드의 J75-P-19로 교체되었다. 57회계연도 예산으로 65대가 발주되었고, 그 이후에는 F-105D의 양산이 실시되었다. F-105의 블록은 20형까지 존재하고 이 블록20은 블록15에 비해 엔진과 전자장비의 개선이 이루어진 형식이다. 고정무장은 M-61A1 20mm 발칸포를 기수 좌측에 장비하였다. 모든 기체가 제 4 전술전투비행단에 배치되었던 F-105B는 1964년 F-105D의 배치로 인해 모두 뉴멕시코주 주방위군에 인도되었다. 그와 동시에 곡예비행팀인 선더버드에 F-100C의 후계기로 9대가 제공되었다.
[R/JF-105B] 원래 RF-84의 후계기 성격으로 미공군에서 3대를 발주하기로 하였으나 RF-101C가 비용대 효과면에서 더 우수한것으로 판명되어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사장되지는 않았고 JF-105B라는 특수실험용 기체로 만들어졌다.
[F-105C] 1956년 6월에 시험평가용으로 5대가 발주된 기체이다. 복좌형 기체로 동체가 연장되어있으며 캐노피도 원피스형으로 시험평가후에 이 기체를 훈련용으로 전용하여 사용하려 했으나 너무 비싸서 양산이 취소되었다.
[F-105D]
 베트남전 초기 도색을 하고 있는 F-105D 베트남전에 대량으로 투입되었고, 선더치프 중에서 가장 많은 양산대수를 자랑하는 표준형으로 그 만큼 완성도도 높은편이다. 전체적으로 전천후 성능이 향상되었고, J75-P-19W를 탑재하였으며 F-105B 후기형과 비행성능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기수에 AGS-19 선더스틱 화력제어시스템을 장착하기 위해 기수부가 15인치 연장되었고, R-14A 모노펄스 X밴드 수색/거리측정 시스템과 ARN-131 도플러 항법장치를 도입하였다. 이 장비들은 토스보밍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어서 정확한 목표유도와 공격이 가능해졌다. 미 공군은 1957년도 예산으로 F-105D와 복좌형인 F-105E (훈련/공격겸용)를 발주하여 58년 5월 부터 4년간 472대를 양산하게 된다. D형 1호기의 첫 비행은 1959년 6월에 실시되었다. 초기 양산형 25대는 본토에 주둔하게 되었고 블록10형부터 해외기지에 파견되어져서 1962년 10월에 일본 가데나 기지에 파견되어 작전태세를 갖추게 된다. 블록25형은 MER이 도입되어 한번에 여러발의 재래식폭탄을 장비할 수 있게 되었고, 동체 내의 연료탱크가 폭탄창에도 연료탱크의 부착이 가능해졌다. D형의 최종양산형인 블록31은 공중급유장비가 추가되었는데 특이한것은 공군과 해군에게서 모두 급유가 가능하도록 붐방식의 리셉터클과 프로그 앤 드로그식의 급유장치도 설치된다. F-105D 블록31형의 마지막 생산기체는 64년 2월에 인도되었다. 미 공군의 당초 1,400대의 D형을 도입하려 했지만 마침 등장한 맥나라마 장관의 3군 통합방어 계획에 따라 해군의 F-4팬텀을 공군형으로 개조하여 양산하기로 함으로서 중단된다. F-105D형은 블록1형에서 블록31형까지 총 610대가 생산되었다.
[RF-105D] RF-101C의 후계기로 개발이 예정되었으나 RF-4C의 등장으로 무산되고만 기체, 동체이 폭탄창을 개조하여 카메라와 센서용베이를 추가하였고, 주날개에 측방감시 레이더포드를 장비할 수 있었다.
[F-105E] F-105D의 복좌훈련 및 공격이 모두 가능한 양용기체였으나 너무 높은 기체가격으로 인해 59년 3월에 발주계획이 취소되었다.
[F-105F] F-105E의 취소뒤에 다시 계획된 훈련형기체이다. 후방석의 추가를 위해 동체를 31인치 연장하였고, 전자장비를 추가하여 D형보다 더 높은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다. 동체의 연장으로 인해 수직미익의 면적이 증가하였으며 중량은 2천파운드가 늘었다. 62년 5월에 143대가 발주되었고, 63년 6월 첫 비행에 성공하여 제4전술전투비행단에 배치되었다.
[F-105F Wild Weasle ll] 북베트남군의 지대공미사일 사이트를 저고도에서 고속성능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임무 (SEAD)를 수행하기 위해 기존 F-105F를 개조하여 만들어진 형식이다. 총 87대의 F-105F가 개조되었고 이 중에서 30대에는 AGM-78 스탠더드 대 레이더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으나 나머지 기체에는 AGM-45슈라이크 무동력 대레이더 미사일을 장착하고 북베트남군의 방공망 사냥에 나섰다. 전자장비는 적 레이더기체 추적시스템과 경보시스템을 추가한것이 전부이다. 이들 기체는 나중에 거의 모두가 G형으로 개조된다.
[F-105F Combat Martin] 1967년 F형 6대를 전자전기로 개조한 기체를 일컫는 형식이다. 외형상의 차이점은 없으며 후방석의 사출좌석이 제거되었고, 동체하부에 브레드 안테나가 추가된것이 특징이다. 6대중 4대는 71년에 G형으로 개조되었다.
[F-105F Command Nail] 1967년 F형 6대를 저고도 레이더폭격형으로 개조한 기체로, 주로 야간/전천후 폭격임무를 수행하였다.
[F-105G Wild Weasle lll] 기존에 사용하던 F-105F Wild Weasle을 개조한것으로 ALG-105 다중모드재머를 추가한 본격적인 SEAD 미션 기체이다. 1973년까지 총 65대가 개조되었다. F-105G형은 베트남전이 끝난후 1980년대 초반까지 주방위군 공군에 배치되어 있었다.
[F-105H] 1962년 리퍼블릭사가 제안한 F-105F의 발전형으로 주익과 수평미익의 면적이 증가되었고 30,000 파운드의 추력을 가진 JT4B-24로 교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 공군에서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아 취소되고 만다.
Republic F-105 Thunderchief & 베트남에 배치되다..
F-105선더치프 전투폭격기가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은 1964년의 일이다. 투입된 기종은 D형이 최초이고 이들 기체들은 F-100 수퍼세이버와 함께 베트남전 초기 북폭을 주도하였다. 베트남전에 투입된 최초의 F-105 비행대는 가데나 기지의 제18전술전투비행단 제67전술전투비행대대로 남베트남의 다낭공군기지에 주둔하였다. 여기에 추가로 제6441전투비행대 기체가 태국의 코라드 공군기지에 전개하였다. F-105D가 베트남전에서 맡은 최초의 임무는 라오스 국내의 공산군이나 반정부 게릴라인 파테트라오군을 공격하는 임무였다. 이 작전에서 패테트라오군 대공포 사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미미한 저항에 불과하였다. 1965년에 들어서는 동남아시아에서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 가데나 기지의 기체들은 파견이 일상화 되다시피 하였다. 1965년 3월 2일에는 태국의 코라드 기지에 배치된 F-105D가 최초로 북폭작전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작전에서 1대가 귀환하지 않아 최초의 F-105손실로 기록된다. 4월 4일 북폭에 F-100 수퍼세이버 전투기가 공중초계 엄호하에 북폭작전중 예상하지 못한 북베트남 공군의 MiG-17전투기의 요격을 받아 F-105D 2대가 격추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로서는 초음속 전투기가 아음속 전투기에게 격추 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65년 코라드 기지에서 북폭을 개시한 이래 출격하는 F-105D 조종사들의 애로사항은 바로 대상 목표물선정이었다. 1966년 부터는 남베트남 영토내의 공산군/베트콩을 공격하는데에 F-105의 출격율이 더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한편 1966년 미군의 북폭 출격횟수는 13,000회에 달하기도 하였는데 이중 F-105가 차지하는 비율은 75%였다. 그 만큼 F-105는 당시 미공군의 주력전투기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만큼 손실도 발생하여 대공포나 미사일에 의한 손해는 공중전에서의 손해보다 훨씬 많았고 사고로 인한 손실과 수리불가능한 기체 등등, 수많은 손실이 있었다. 이로서 제18전술 전투비행단과 제6411전투비행단의 F-105세력은 점차 감소하여, 이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주둔 항공군의 제36전술전투비행단과 제49전술전투비행단의 기체들을 이동시켜 투입하였다. 이렇게 되어 서유럽 항공군의 F-105운용 비행단들은 운용기체를 제대로 보유하고 있지 않은 그야말로 서류상의 비행단이 되었다. 여기서 가데나의 제18전술전투비행단 휘하의 제44,67전술전투비행대대는 태국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가데나기지에는 제12전술전투비행대대만이 훈련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초에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면서 이 마저도 한국으로 긴급배치되어 제18전술전투비행단 마저도 서류상의 비행단이 되고만다. 그나마 제6411전술전투비행단에 F-4D가 보급되면서 잉여분의 F-4C가 제18전술전투비행단으로 지급되었고, 서유럽의 제36,49전술전투비행단 역시 1966년말 F-4D를 수령함으로써 공백을 메꿀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미 본토의 F-105 운용비행단들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세이무어존슨기기, 멕코넬기지 등에 주둔하던 다수의 전술전투비행대대가 임시전개 비행대 (TDY)로 재편되어 베트남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비행대의 기체들은 태국의 타클리, 코라드 기지에 전개되었고 소속은 제355,388전술전투비행단으로 운용되었다.& 큰손실, 하지만 값진 성과 1965년 1월 시점에서 1972년 말까지 동남아시아에서 잃어버린 F-105D/F/G는 382대에 달했다. 이 중 332대는 D형, 나머지 50대는 F/G형이다. 1970년 11월 시점에 미공군이 보유한 가동상태의 F-105D는 양산대수인 610대의 4분의 1 수준으로 감소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하였다. 그 만큼 베트남에서의 소모전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북베트남의 대공방공망이 강력한 탓도 있으며 F-105가 단발엔진 장착기라는 이유도 어느정도 존재한다. 미공군은 F-105의 부족을 예상하고 1967년에 F-105D의 생산라인 재가동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F-4의 양산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F-105D는 북폭이라는 본래 임무외에 공중전에서도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F-4의 엄호하에 공습작전에 나선 F-105D는 폭탄투하후 근접전에 돌입하여 매우 우수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F-105D의 기수에는 20mm M61A1 발칸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주날개의 바깥쪽 파일런에는 사이드 와인더와 ALQ-101전자전 포드를 장착하였다. F-105D의 베트남전 전기간동안 적기격추 기록은 25대이다. 대부분이 사이드와인더를 이용한 격추이고 20mm 발칸포를 이용한것은 3건으로 알려져 있다.
& 복좌형 선더치프들의 활약 단좌형인 F-105D가 계속 양산되고 또 수요가 증가하게 되자 F-105E의 양산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1962년 5월 다시금 F-105F라는 복좌형의 양산이 결정되었다. 결국 F-105D의 양산라인에서 최후의 F-105F 143대가양산되었다. 이 기체들은 넬리스 기지의 제4520비행대대에 인도되어 전환훈련에 들어갔고 12월 23일에는 세이무어존슨 기지의 제4전술전투비행대대에 인도되어 실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베트남으로 투입된 F-105F는 1965년 1월부터 적 방공망 제압기로 개조되어 시험비행을 거친후 와일드위즐I 이라는 별명을 얻고 북베트남 방공망파괴에 투입된다. 1965년말에서 1968년 3월 사이에 F-105F 86대가 레이더 호밍 경계장치 (RHAW)인 AN/APS-107을 AN/APR-25-26으로 교체하였다. 와일드위즐III 은 맥라렌 기지에서 개조되었는데, 1966년 여름, 와일드위즐III 13대가 동남아시아에 보내졌다. 이 기체들은 EF-105라고 부르기도 한다. 3개월 후에는 10대가 추가로 보내져 베트남전에 투입되었으며 SA-2 가이드라인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 진지를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베트남전을 통해 F-105D의 전환훈련용으로 계획된 복좌형이 방공망제압기로 전용되어 가장 위험한 공격임무에 나선다는 전례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미 공군은 고육지책으로 F-100F를 F-105D의 전환훈련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68년 4월 F-105F 와일드위즐III 14대에는 미해군이 만든 대레이더 미사일 스탠더드 모드0형의 발사능력을 추가하여 방공망 제압에 나섰다. 스탠더드 대레이더 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한 개조는 1969년 6월에 완료하였다. 9월에는 추가로 60대의 F-105F 와일드위즐III가 스탠더드미사일의 운용능력을 획득하였고, 전자전장비의 성능도 강화되었다. 보통 F-105는 북폭을 위한 출격에 바깥쪽 포드 파일런에 ALQ-101 전자전포드를 탑재하였다. 안쪽 포드에는 연료탱크를 장착했기 때문에 전자전 포드를 바깥쪽에 장착할 수 밖에 없었다. F-105F는 스탠더드 미사일 이외에 로켓모터가 없는 슈라이크 미사일도 장착하였는데 한 예로 센터라인에 연료탱크를 탑재하면 안쪽 포드에는 스탠더드, 바깥쪽에는 슈라이크 미사일 1발을 탑재하였고, 반대측에는 1기의 ALQ-101 전자전 포드가 장착된다. F-105G는 와일드위즐III를 개량한 기체로 와일드위즐III가 직면한 스테이션 부족 문제점을 해결 하였다. 또한 필요에 따라 기내공간에 탑재하는 전자전기기도 개발되었다. F-105G는 1967년 가을부터 에그린 공군기지의 전술항공전센터에서 개발을 시작하여 베트남전에 부족한 파일런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전자전 포드는 동체측면에 인입식으로 ALQ-105포드를 내장한 QRC-380전자전 브리스타를 장비하였다.
에그린기지에서의 실험결과 60대의 F-105G가 탄생하였고, 이들은 1968년 4월 동남아시아에 배치되어 작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 동안 기존 비행대에 와일드위즐 기체를 배치하던 편성을 탈피하여 독립된 와일드위즐 비행대를 만들기에 이른다. 넬리스 공군기지의 제4573비행대대의 일부기체, 제66비행대 등을 독립시킨 것을 시작으로 1970년 제6010와일드위즐 비행대대가 편성된다. 이 비행대는 코라드 공군기지의 제388전술전투비행단에 편입된다. 임시편성의 냄새가 나는 제6010비행대대는 1971년 12월에 제17와일드위즐 비행대대로 비행대대 명을 바꾸에 된다. 제355전술전투비행단의 제561전투비행대대는 와일드위즐이라는 이름으로 F-105G를 운용하였다. 이들 2개비행대대는 라인베커II 북폭기간중 와일드위즐 임무를 수행하였다. 와일드위즐 임무를 수행하는 F-105F 기체중 MiG전투기의 요격을 받아 공중전을 벌인 경우가 있어 2대를 단독으로 격추, 1대는 팬텀과의 협동으로 격추한 기록이 있다.
Convair F-106 Delta Dart 냉전시대 당시 언제나 절치부심 본토방공에 힘썼던 미 공군은 WS201이라는 계획의 일환으로 F-102A를 개발하여 배치했다. F-102A로서 WS201은 끝나는것이 아니고 1단계에 불과하였다. 2단계로 계획된 전투기는 새로이 개발될 J67엔진과 XM-1179 프로젝트로 개발된 MA-1 화기관제장치를 조합한 새로운 방공전투기였다. 하지만 J67엔진의 개발이 늦어지자 일단은 J57의 파생모델인 J75를 장착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공군의 ROC를 충족시키지 못하고(실용상승고도 : 70,000ft / 최대속도 : M.2) 좀더 추력을 높힌 J75-P-17로 교체한 뒤에야 공군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게 된다. F-106의 동체는 F-102의 그것을 개조 한것으로 애초에 F-102B라 불리웠다. 전체적인 형태는 F-102 후기형의 그것을 하고 있다. 주익은 동일한 형상을 하고 있고, 수직미익은 면적이 확대되고 높이가 조정되었다. 공기흡입구는 약간 뒤로 후퇴되어있고 양산형부터는 엔진의 교체로 인해 확장되어있다. 화기관제장비인 MA-1은 F-106과는 시스템의 복잡함으로 인해 궁합이 잘 맞지 않았으나, 북미방공시스템인 SAGE에 자동으로 데이터링크가 되면서 자동조종이 가능케 되어서 적기에 대한 추적, 조우코스를 지정해주고, 긴급출격시 적기와의 조우상황에서 AIM-4 펠컨 공대공미사일, AIR-2 즈니 핵탄두탑재 로켓 중 어느것을 발사할것인가를 선택해주고 발사 후에는 자동조종기능을 이용하여 회피기동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SAGE와의 연동으로 F-106은 미 본토공습에 보다 효율적이고 기민한 대응을 할수 있었다. F-106은 미본토 방공군단 휘하의 40개 비행대대에 1,000여대를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엔진과 화기관제장치의 개발지연과 F-102/TF-102A의 영향으로 계획이 대폭 축소되어 F-106A가 277대, F-106B가 63대만이 제작되는것으로 양산이 종료된다. 1959년 5월 F-102의 후계기로 미 공군 방공군단소속 제498요격전투비행대대에(워싱턴주 가이가기지) 최초로 배치되었다. 배치는 급박하게 이루어져서 같은해 10월에 작전능력을 갖추게되었다. 59년 말까지 F-102 비행대대 3개가, 1960년에는 3개의 F-86L 비행대대, 1개의 F-89J, F-102 비행대대 6개를 F-106A/B로 교체하게 된다 이리하여 애초 40개 비행대대를 창설하려는 계획에서 대폭 축소되어 대대당 18대의 F-106으로 14개의 비행대대를 창설하게 된다.
 F-106은 한 비행대대당 18대가 배치되어있었다. 이 사진은 요격비행단의 모든 기체가 모여있는 사진.
F-106의 배치과정에서 여러가지 자잘한 결함이 발견되었고 이는 배치를 서두른것에 대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3단계에 걸쳐서 개량작업을 벌이게 된다. 1960년 9월에는 항공자재군단의 기술자 팀들에 의해 1단계 개량이 실시되었고, 2단계 작업에서는 적외선수색,추적사이트의 추가가 이루어졌다. 2단계까지 개량작업을 하는데에는 기체당 60일이 소요되어서 전 기체의 개량은 1963년까지 계속되었다. 3단계 작업은 1961년 8월 ~ 1962년 4월까지 진행되었다. 여기서 사출좌석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핵폭발로 인한 섬광과 방사선으로부터 조종사를 보호하는 서말 플래쉬포드가 추가되었다. 이 밖의 개량사항은 아래와 같다. - MA-1의 개량(진공관소자 개량) - 전술항법장치 (TNS) 개량 - 공중급유구 추가 - 초음속비행 전용 연료탱크 운용능력부여 1958년에는 복좌형인 F-106B가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F-106B는 TF-102A가 취했던 SIDE-BY-SIDE 방식이 아닌 근래의 전투기들이나 훈련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탠덤식으로 본래 단좌석이던 F-106A을 복좌로 바꾸기 위해 조종석 바로뒤에 있던 전자장비 수납부와 연료탱크가 제거되었고 전자장비들은 무장장착부로 이동하여서 탑재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F-106B의 화기관제장치는 AN/ASQ-25로 MA-1의 개량형이다. 하지만 디스플레이와 듀얼화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차이는없고 거의 동일한 모델이다.
  F-106A와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복좌형 F-106B F-106은 1970년부터 무장운용 방식을 변화시킨다. 지금의 무장운용개념으로 보면 그야말로 '무식한' 무장인 AIR-2 즈니의 운용을 중단하고 대신 근접전에 대비하기 위해 M61 20mm 기관포를 탑재하게 된다. 이는 F-4D 처럼 기관포팩을 부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원래 즈니가 있던 자리에는 M61의 드럼탄창이 자리를 잡게 되고 그와 함께 컴퓨터로 제어되는 조준기가 추가되었고, 250대의 F-106에 한하여서 전자전장비가 추가되었다. 이는 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에서 소련제 전투기들과의 근접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즉, F-4(F-15도 포함되지만 이때에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에...)와 같은 일선급 전투기의 보조개념으로 투입될 것이라 사료된다. 또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1980년대에는 F-106의 기동전 훈련이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F-106은 1960년대 부터 배치되기 시작한 F-4 팬텀의 성능적 우위와 대량생산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F-15 이글로 완전히 뒤로 물러나게 되어 1988년 9월 뉴멕시코주 주방위항공단 제177/199요격비행대대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F-106은 F-102에 밀려 340대만이 양산/배치되었지만 1,000여대가 생산된 F-102가 10여년의 운용기간을 보여준 가운데 F-106은 30여년동안 미 본토방공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F-106이 그간 운용했었던 요격전투기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었음을 의미한다.
YF-107 YF-107은 원래 F-100B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원래 F-100A형이 달고있던 J57엔진을 개량한 엔진을 탑재하여 최대속도 M 1.8를 목표로 하였다. F-100B의 주임무는 주간제공전투기로 설계되어 레이더를 장착하고 공기흡입구는 F-86D처럼 기수아래에 위치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점차 핵공격기를 원하게 되었고, 핵공격능력이 있었던 F-84전투기의 후계기를 목적으로 계획이 수정하여, 주날개 하부에 6개소의 파일런신설, 날개구조 변경, 조종계통/조종석 설계변경등이 이루어졌고, 기체강도 증가 (최대한계치 8.67G) 랜딩기어강화, 전가동식 수직미익채택 등 기존 F-100과는 완전히 다른기체가 되었다. 마침내 1954년 7월 8일에 미공군은 F-100B에게 YF-107A라는 새로운 제식명칭을 부여한다. 이로써 새로운 센추리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다. 이름을 바꾸게된 YF-107A는 엔진을 J75로 교체하고, 핵폭탄을 동체하부 중앙에 인입식으로 탑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동체하부에 탑재하는 핵폭탄이 레이돔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공기흡입구 때문에 투하에 악영향을 끼치게된다. 대폭개조가 불가피한 상황, 결국 YF-107의 공기흡입구는 기체상부로 이동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YF-107의 형상이된다. YF-107의 인입식 무장장착부는 F-105의 폭탄창 격납식보다 구조가 간단하고 강도상으로 유리하였으나, 초음속으로 작전상공에 진입할 때 공기저항이 발생해 불리한점도 있었다. 이 점이 후에 F-105와의 경합에서 패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지상에 주기중인 YF-107 3호기 YF-107 1호기는 1956년 9월 10일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이 비행 중에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있는데, 내용은 대강이렇다. YF-107 1호기는 이륙직후 초음속비행을 실시하던 도중 초음속 도달직전에 유압계열에 문제가 생겨서 즉시 착륙을 시도하였는데, 그러던중 수평비행상태에서 밀리터리파워로 가볍게 음속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게된다. 그 후 착륙단계에서 드래그슈트의 고장으로 랜딩기어가 파손되었으나, 3일후에 비행을 재개하였다. YF-107은 단 3대만이 제작되어 시험비행에 사용되었는데 1956년에는 3기체 모두가 비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YF-107이 남긴 흔적이라곤 마하2를 가볍게 넘기는 유일한 센추리시리즈라는것이다. 현재 1호기와 2호기는 박물관에 전시되어있고 3호기는 이런저런 시험비행에 사용되다가 1959년 9월에 이륙에 실패하여 폐기처분 되었다.
XF-103 XF-103은 당시 WS201계획으로 진행되던 요격전투기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되었던 요격전투기이다. 이 XF-103에도 F-102/106에도 장착된 MX-1554 레이더(MA-1)와 XJ-67W1 터보제트 엔진를 탑재하여 마하2의 속도를 내고, MX-904 미사일 6기, 2.75인치 로켓 36발을 탑재할 계획으로 컨베어사의 YF-102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지나친 개발비상승과 엔진과 연료계통의 부조화로 인해 신뢰성이 떨어졌다. 결국 YF-102가 미 공군에 채택되었고 YF-103은 1957년 8월에 목업만을 남긴채 취소되었다.
 좁디좁은 캐노피와 자그마한 날개...
 실제로 실용화되었다면 어땠을지는 안봐도 비디오...
XF-108 Rapier 간단히 말해 XB-70의 요격전투기버전이라 말할 수 있다. XB-70 발키리를 설계하고 제작한 노스아메리칸은 발키리에 적용된 기술을 그대로 XF-108이라는 장거리 요격전투기로 재탕한다. 1959년에 목업이 완성되었고, 1961년에 초음속비행에 성공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1959년 5월에는 'Rapier'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미 공군은 소련에서는 현재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대세라는 여론이 확산된 상태였다. 그래서 XF-108은 '돈먹는 하마' 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59년 9월에 XF-108은 취소된다.
XF-109 센추리시리즈 중 최초로 VTOL(Vertical Take Off / Landing)전투기로 계획된 XF-109는 그 외형도 상당히 특이하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우주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XF-109는 애초에 미해군과 공군의 VTOL성능을 가지고 마하2의 최대속도를 발휘하는 전투기를 원함에 따라 F-101A의 기체를 이용하여 GE사의 J85엔진을 8개를 장착하고있다. 4기는 윙팁에 수직/수평조절이 가능하도록, 나머지 4기는 수직/수평고정으로 동체의 전/후방에 2기씩 장착되었다. XF-109는 1958년 목업이 제작되었고 미공군의 승인이 떨어져 곧 생산될 예정이었으나 엔진을 8개나 장착하다보니 제작비가 가파르게 상승하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취소되고 만다. XF-109는 그 발상 자체는 혁신적이지만, 너무나도 비효율적이고 억지(?)스러운 기체였다. 단지 한가지 의의가 있다면 센추리 시리즈 최초의 VTOL 기체라는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냥 얼핏봐도 '비효율' 이라고 씌여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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