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쟁병기/일반밀리

한국 항공전

21c-park 2007. 6. 27. 10:37

한국 항공전

 

 

* 비극의 씨앗 

1945년 8월 15일 끝까지 미국과 싸우겠다고 맹세하던 일본은 원자폭탄 2발을 얻어맞고 나서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영국이 어느 정도 관련이 되어 있었지만 미국에게 있어서 태평양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만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일본 본토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당연히 미국의 관할 하에 들어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은 전쟁이 끝나갈 때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몇 일전, 미국은 대독전선의 동맹국인 소련으로부터 전혀 달갑지 않은 제안을 받았다. 그것은 소련이 미국을 도와 일본군에게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손쉽게 한반도라는 먹음직스런 전리품을 챙길 기회를 노렸던 소련은 동맹국인 미국을 돕겠다면서 갑자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북쪽으로부터 T-34 전차부대를 앞세워 밀고 내려왔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나음날이 8월 9일 소련 극동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 25군은 순식간에 한국의 북쪽으로부터 진격해왔으며 주요 요충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모든 전력을 소진한 일본군은 싸울의사도 없었고 대부분 지리멸렬해서 도주하기 바빴다. 저항다운 저항은 거의 없었으며 소련군은 신속하게 북한지역의 주요 기간시설과 비행장, 도시에 입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마음이 급해진 것은 미군쪽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미국으로서는 4 년간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거둔 태평양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리품을 나누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그냥 내주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이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일본에 대한 지배권이었다. 만일 소련군이 북쪽에서 일본에 상륙해서 남진한다면 일본 본토를 소련과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이것은 태평양전쟁을 진두 지휘하며 최후의 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미국의 맥아더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은 분명히 미국의 전쟁이었으며 일본본토를 점령할 권한은 오직 미군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한 입장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동맹국인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염려한 미 정부는 일본은 미군의 관할 하에 두되 동맹국인 소련의 체면을 고려해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소련과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것에는 합의를 했다. 단 몇 일간의 참전으로 손쉽게 이런 전리품을 얻게된 소련도 이 제안에 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미 정부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아시아의 소국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소련과의 마찰만은 피하고 싶었으므로 양측은 지도상에서 대략 남과 북을 절반으로 나누는 북위 38도 선을 그어 그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며 이는 한국민들이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할 능력을 가질 때까지라는 것에 합의했다. 36년간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아오던 한국민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일본이 패망했음에도 이렇게 깨어졌다. 강대국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지도에 금을 그어 두동강을 내버린 한반도는 이제 커다란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 비극의 씨았이 남긴 잔재... 한국전쟁전의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어 아직도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놓고 있다. ]

한국이 스스로 자주정부를 구성하도록 돕겠다던 양측은 전혀 양보할 의사가 없었고, 결국 2년간의 혼란스런 시간이 흐르자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정부가 탄생했고, 남쪽에서는 미군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각기 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은 말로는 통일이야말로 지상과제라는 것을 외치고 있었지만 서로간에 전혀 상대방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있었다.

* 야심가 김일성 

만주지역에서의 항일운동 경력을 내세우고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없어 북한의 지배자가 된 김일성은 권모술수에 밝고 야망에 불타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속하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친일파들을 색출해 민중 앞에서 숙청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북한민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원하에 정권을 잡은 김일성,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

그는 곧 모든 권력을 혼자서 독식하는 스탈린 식의 독재체제를 이룩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북한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여 10000여명의 젊은이를 뽑아 소련의 군사학교에 위탁교육 시켜 미래의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병사들을 징집했다. 소련은 2차대전을 통해 생산한 막대한 전쟁 물자의 일부를 북한에 공급했다. 대독전에서 맹위를 떨친 T-34 전차와 야크 전투기들이 공급되었고 이를 조종할 조종요원들이 소련군사 고문관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48년 2월 8일 6만명의 정규군 병력으로 이루어진 북한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으며 김일성은 1948년 9월 정식으로 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 혼란에 빠진 남한 

한편, 남쪽의 상황은 북쪽에 비해서 혼란스러웠다. 미군의 군정하에서 많은 정당들이 난립했고 각기 정권을 잡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를 비방했다. 결국 선거를 통해서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기는 했으나 정부는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남한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경제적인 원조이외에 군사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 소련이 북한에 대해서 막대한 군사물자를 원조하고 북한군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군의 정보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군의 관심은 태평양전쟁의 파트너였던 일본에 대한 군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남한 정부에게 있어서 가장 한심한 상황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정부의 요직에 자리잡고 큰소리치게 된 것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로 인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상황이 전개되면서, 위기에 몰린 친일파들이 느닷없이 반공을 외치면서 미군에 잘 보이는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 간부가 되어 치안을 담당하는가하면 심지어는 북한에서 숙청 당할 위기를 넘긴 친일파들이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온 후 반공투사 행세를 했다. 이들은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독립투사들을 온갖 구실을 붙여 괴롭혔으며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공산당으로 몰아붙여 내몰았다. 이런 어이없는 행태에 허탈감을 느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일까지 있었다.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반공을 목청 높여 외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도피처였던 것이다.

한편, 미군은 남한의 이런 혼란 상황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4년의 세월동안 빠져들었던 2차대전에서 승전했지만 국민들은 전쟁에 지쳐있었고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유럽에 대한 공산주의의 확장 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에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시아에서는 가장 강력했던 일본을 미국의 영향하에 둔 이상 미국의 안보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도 한국은 미국에게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고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의 딘 애치슨 장관은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방어해야할 나라들을 분류하면서 한국을 제외하는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고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국정부로부터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와 전차의 원조를 요청 받았으나 이런 무기들을 제공하면 오히려 소련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경계선에는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소규모의 병력만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폭풍전야 

1949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물자를 더 지원해 준다면 손쉽게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다면서 스탈린을 설득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대면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만일 소련이 전차와 항공기를 지원해 준다면 우리는 한 달 이내에 한국을 완전히 공산화  시킬 수 있으며 전쟁에 지쳐있는 미국은 이 작은 나라의 분쟁에 끼어 들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스탈린도 미군은 오직 유럽과 일본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빠른 전격적인 군사행동으로 미국이 관심을 보이기전에 남한을 점령하면 미군과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설득에 넘어가 김일성의 군사행동을 승인했다. 사실상 한반도만 공산화시킨다면 섬나라인 일본을 제외한 극동 아시아 전체가 소련의 영향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므로 소련에게는 김일성의 주장이 상당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곧 북한을 적극 지원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2차대전에서 맹활약을 했던 수백대의 T-34 전차들과 야포, 항공기들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이런 장비들로 무장한 북한군 8개사단이 38선으로 포진하여 침공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정부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정부관리들은 북한의 동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대부분 권력과 권모술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북한을 침공해서 통일하자는 말도 안 되는 호언까지 늘어놓기 일쑤였다. 남한정부는 전혀 북한의 침공징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1950년의 여름이 시작되었고,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6월이 되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남침을 결행할 시간표를 완성했다. 김일성과 소련군사 고문단은 미군의 반응을 최대한 늦추려면 주말을 이용해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10년 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시간대와 비슷한 것으로 미군의 장성들과 장교들이 대부분 일요일에는 자리를 비우게 마련이므로 미군의 반응을 최소한 24시간 이상 지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성은 최대한 빨리 침공을 결행하기로 했으며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로서 한국의 산과 강, 그리고 하늘을 온통 피로 물들일 한국전쟁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정한 침공시점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였다.

* 베일에 숨겨진 북한 공군

한국전쟁이 발발 하기 전부터 김일성이 주도한 전쟁 준비에 따라서 북한 정규군이외에 북한 공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북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서 소련이 설립한 군사학교인 '슈꼴르이 르스꼬워 야즈이까 (북한측 명칭은 제 1종합군관학교)'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장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1946년 이 학교에 편입된 신의주 항공대가 북한공군의 모체가 되었다. 1947년 8월 20일 신의주 항공대는 독립적인 비행대로 창설되었으며 이날이 공식적인 북한공군의 창설일로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원자들을 모집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았다. 북한지역에서 항공기 조종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본군에서 군용기를 조종했던 조종사였거나 일본 민간기를 조종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이 사실이 알려져 친일파로 몰릴 경우 숙청될 것을 두려워하여 북한 공군의 모집에 전혀 자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식인들과 부르조아들을 배척하는 북한정부의 정책으로 인해서 조종사로 훈련시킬만한 교육수준을 가진 우수한 인적자원들은 대부분 숨어 지내거나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한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북한 공군이 단시간만에 전멸했으므로 전쟁 개시 시점을 기준으로한 북한공군의 전력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으나 전후에 미군이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완성한 자료와 최근 공개된 러시아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북한 공군은 육군과 달리 완전한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전을 맞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공군의 전체 병력은 약 2000여명이었다고 하며 이중 조종사들은 150명 미만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특히 전투에 참가할만한 기량을 가진 조종사들은 이들 중 과반수를 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훈련시간의 대부분을 지상공격 위주로 교육 받았기 때문에 전투기간의 공중전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공군의 조종사들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것은 위에 전술한 이유에 더해서 단기간에 양성이 가능한 육군과 달리 공군 조종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훈련체제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서둘렀던데 따른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1950년 북한에 대량으로 공여된 야크-9P 전투기의 일러스트이다. 북한 공군 야크의 도색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있는데 위의 그림처럼 은빛으로 도장된 기체와 전체가 녹색인 기체, 그리고 회색으로 도색된 기체들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무렵 북한 공군이 가지고 있던 항공기들은 대부분 소련이 대독전선에서 사용한 2차대전의 잔여기들로서 주력은 2차대전의 명전투기였던 야크-9 전투기들이었다. 미군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전에 소련으로부터 총 132기의 항공기를 제공받았으며 여기에는 전투기 70기 (야크-3, 7B, 9 전투기와 La-7)와 지상공격기 62기 (Il-10 슈트로모빅)였다고 하는데, 최근 공개된 러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북한공군은 93기의 Il-10으로 이루어진 제1 강습 항공연대와 79기의 야크-9으로 이루어진 제1 전투 비행연대가 주축이었다고 하며 67기의 훈련기와 정찰기, 수송기를 보유했던 제1 훈련 항공연대가 이들을 보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측의 자료가 가장 신빙성이 있으나 전쟁 중에 UN군 조종사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는 그들이 마주친 적기 중에 La-5, Pe-2, 야크-3, 야크-7, Il-2와 같은 다양한 항공기들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미국산의 P-39 에어라코브라나 영국산 스핏화이어까지도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물론 소련이 2차대전중 상기 기체들을 사용했으므로 이런 기체들이 북한에 공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나 이런 목격담을 뒷받침 할만한 사진자료나 신빙성있는 자료가 없어서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북한 공군의 상황은 육군을 완벽하게 지원할 만한 본격적인 전력을 갖추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항공전력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월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 미약했던 한국 공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한국군의 상황은 북한군에 비해서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물론 육군의 상황도 매우 빈약했지만, 항공전력은 특히 그 정도가 심각했다. 1949년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20기의 L-4 / L-5 연락기와 미군이 한국정부의 고성능 전투기의 원조요청을 거부하면서 국민성금을 모아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10기의 T-6 Texan 훈련기의 항공기들로서 출발하게된 한국공군은 전쟁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이런 항공기들은 전투를 위한 무장을 갖춘 기체들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진정하게 공군이라고 불릴만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군이 많은 항공기들을 원조받고도 충분한 조종사를 확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은 것과 달리 남한에서는 조종사가 조종할 비행기조차 태부족인 상황이었다.

[ 한국군이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항공기인 T-6 택산 훈련기, 본기체는 국민성금으로 도입된 기체로서 초기의 국적 마크를 잘 볼 수 있는 사진이다. ]

더욱이 남한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던 김포 비행장조차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였으며 이 열악한 환경에서 민간 항공기들을 이착륙시키고 있었다. 1949년 7월에 설립된 항공 학교에서는 군용 항공기를 조종할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려 했으나 이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련이 북한에 적극적인 전쟁물자 원조를 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남한군의 전력은 소총과 박격포정도로 빈약하게 무장한 상태였으며 이는 국가방위보다는 치안유지에 적합한 수준이었다. 특히 이는 항공분야에서 매우 심각했다. 전후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개전 당시 한국 공군의 병력은 50여명이하의 조종사요원을 포함한 1899명이었다고 집게되고 있다.

* 침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에 포진한 북한진영의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귀청을 찢는 대포소리가 전역에서 울려 퍼지고 동시에 수많은 붉은 섬광이 38선 남쪽을 강타했다.  그리고 격렬한 포격이 멈추자 지축을 울리는 캐터필러의 굉음과 함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보병들이 38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완전한 기습으로 그때까지의 산발적인 군사도발이 아닌 본격적인 침공이었으며 이것은 이후 3년간 온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고 피로 물들이게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일제히 남침을 결행한 북한군의 칭공방향을 표시한 지도이다. ]

소련군으로부터 전술을 교육받은 북한군답게 우선 대대적인 대포사격으로 상대방의 혼을 빼놓은 상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밀어붙이는 러시아식의 대대적인 기습적인 공격으로 38선의 남측 수비라인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무엇보다 기습을 당한 국군에게는 북한군의 T-34 전차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수류탄을 들고 전차로 돌진하는 육탄공격과 같은 장렬한 희생으로도 북한군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전 9시가 되자 개성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강릉에는 북한군이 상륙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가 시작되었다. 이런 한국전쟁 초반의 지상전 양상에 대해서야 대부분의 방문객들께서도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수없이 배우고 TV에서 보고 들었을 것이므로 본 연재에서는 항공전을 중심으로 진행해 보도록 하자.

 

[ 침공의 선봉에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소련의 걸작품 T-34 전차는 산악지형인 한국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

침공 첫날, 북한 지상군의 맹렬한 진격과 달리 항공전의 측면에서는 북한군이 효과적인 항공작전을 거의 시행하지 못했다. 북한공군은 160기가 넘는 작전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지상군의 전진을 돕는 근접지원에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북한공군의 훈련상태가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이 시점에서는 공군의 지원이라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남한군의 전력과 북한군의 전력의 차이가 컸으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이 빨랐고,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열세였던 국군의 방어선은 북한 지상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붕괴되고 있었지만, 만일 제대로 훈련된 조종사들이 IL-10과 같은 우수한 지상공격기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지상군을 지원했다면 북한군의 진격 속도는 더욱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공군이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6월 25일 오후 1시경 38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진출한 야크-9 전투기 4기가 김포공항 상공에 나타나 지상시설에 대해서 기총소사를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비슷한 시각에 서울비행장에도 야크 전투기들이 나타나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지상에 주기중인 한국공군의 L-4/5 관측기 7기를 격파했다. 그리고 오후 7시경 다시 6기의 야크 전투기들이 김포비행장에 나타나 기총소사를 퍼부었는데 이때 미군 소속의 C-54 수송기 1기가 파괴되었다. 이 기체는 미군이 자국민의 철수를 위해서 대기시켜 놓았던 기체로서 이 기체의 손실은 자국민의 안전에 촉각을 기울이던 미군을 자극하게 된다.

1950년 6월 북한공군의 도색을한 IL-10이다. 북한공군에 약 60여대 이상이 공급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우수한 지상공격기였음에도 실전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개전 며칠만에 대부분 지상에서 격파당하게 된다.

여하간 160여기의 작전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북한공군이 침공 첫날 겨우 몇 대의 야크 전투기만을 사용해 공습에 나섰다는 것은 북한공군내에 지상공격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가진 조종사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습에 나선 기체들이 우수한 지상공격기인 IL-10이 아니라 야크 전투기들이었다는 것은 북한공군이 제대로 전쟁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전에 돌입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남한공군에는 북한공군의 작전을 저지할만한 항공전력이 없었으므로 만일 북한 공군기들이 대규모 공습으로 김포 비행장과 같은 주요 목표물을 강타했었다면 커다란 성과를 올렸을 것이다. 

[ 최선을 다했건만....  한국공군의 L-4 관측기가 침공해오는 북한군 전차를 향햐 수류탄 공격을 하려는 장면을 담은 전쟁화이다.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재) ]

한편 전면적인 기습을 당한 한국공군은 전쟁이 시작된지 몇 시간만에 북한 전투기들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기체를 상실했으며 불과 2-3대의 생존기들이 다급한 상황에서 급히 이륙하여 전선으로 출동을 했다. 이 용감한 조종사들은 전투용 기체라고는 볼 수 없는 L-4 관측기에 박격포탄이나 수류탄을 싣고 북한군의 상공으로 날아가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용전분투를 했다. 비록 밀려오는 파도를 맨손으로 막는 것과 같이 무모한 것이었으나 이런 용기는 훗날 한국공군의 정신적인 모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용감한 출격도 북한군이 계속 남으로 밀려오면서 출동 근거지를 상실함에 따라 곧 중단되게 된다. 물론 침공 첫날 북한공군은 지상군의 엄호를 거의 실시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날 남과 북의 항공기들이 하늘에서 마주치지는 않았다. 

* 미 극동공군

[ 1950년 6월 주일 미공군의 기지를 표기한 지도이다. 대부분의 항공작전은 이타즈께와 같이 한국에서 가까운 기지에서 수행되었다. ]

한국이 전면적인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이 주일미군에게 전달되자 미군은 크게 놀랐다. 특히 주일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날 크게 공산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며 남한내의 미수송기가 북한전투기의 공격에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더욱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미군이 참전을 주저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예측과 달리 맥아더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즉시 미군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백악관의 눈치를 보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을 즉시 움직일 태세였다.

이때까지 주일미군은 북한군의 군사력을 게릴라전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정도로 과소 평가했으며, 북한군이 이처럼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사실이 알려지자 맥아더는 즉시 미군의 힘으로 공산군을 저지하고 전력을 다해 반격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을 발판으로 하는 극동공군 (Far East Air Force; 이하 FEAF)을 편성해놓았었는데 비록 이와 같은 본격적인 전쟁에는 대비를 하고있지 않았지만 이 FEAF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FEAF의 주력은 약 360기가 배치된 제트기 F-80 슈팅스타였으며 장거리 호위기 F-82 트윈 머스탱이 32기, A-26 공격기가 26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외에 30기 정도의 B-29 폭격기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C-47, 54와 같은 수송기가 50여대 활동하고 있었다.

[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출격대기중인 F-82G 트윈머스탱,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설계되어 P-38을 대체하였다. ]

FEAF의 사령관이었던 패트리지 중장은 6월 25일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으며,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침공 다음날인 6월 26일부터 한국내의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시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시행된 미공군의 항공작전은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의 철수를 위한 것이었으며, 미군의 수송기 C-54가 야크기의 공격으로 대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지자 북한공군기의 위협으로부터 철수작전을 엄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날 한국상공으로 출동한 기체는 제트기인 F-80이 아니라 장거리 호위에 적합한 쌍발 프로펠러기인 F-82G 트윈머스탱이었다. 이 F-82G는 전천후 작전이 가능한 장거리 전투기로서 일본의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출발하여 김포까지 날아가 철수를 엄호한 후 다시 돌아오는 장거리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 공격적인 야크 

[ 드디어 한국상공에 모습을 나타낸 제트전투기, F-80 슈팅스타는 한국전쟁 전기간동안 고르게 활동한 기종이었다. ]

6월 26일 김포와 서울비행장 그리고 인천항에서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이 시행되었다. C-47 수송기들이 김포로 날아왔으며 이들의 상공에는 일본에서 날아온 F-82G 편대가 초계비행을 하면서 북한 전투기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철수작전은 아무런 방해없이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오후 1시경 김포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야크-9 전투기 1기가 초계중이던 2기의 F-82G와 마주쳤다. 미군 조종사들은 북한기가 먼저 사격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선회하면서 야크-9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 야크 전투기는 일직선으로 날아오면서 한차례 기총사격을 하고는 F-82들 회피하면서 선회를 시작하자 그대로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FEAF는 이날 야크 전투기가 선제 공격을 한 이상 미군의 철수작전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이후에는 모든 조종사들이 북한기와 마주치면 즉시 반격에 나서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 한국전쟁 최초의 공중전 승리는 F-82G의 몫이었다. 야크-9에게는 순수한 공중전 능력에서 떨어졌으나 북한 조종사의 수준이 낮아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

6월 27일,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매우 빨라 벌써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에 놀란 미군은 철수작전을 신속하게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11기의 C-47 수송기들이 F-82의 엄호를 받으면서 김포로 날아갔고 이날은 드디어 제트전투기인 F-80 슈팅스타 2개 비행대가 고공에서 엄호를 했다. 이것은 저공의 위협은 F-82가 맡고 고공은 F-80이 맡는다는 하이-로우 믹스의 개념이었다. 

이날의 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정오를 넘기면서 다시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이 나타났으며 5기의 야크-9 전투기들은 전날과 달리 상당히 도전적으로 비행장의 미군 수송기들을 공격해왔다. 이에 대해서 근접엄호를 하던 F-82 전투기 5기가 요격에 나서면서 한국전쟁에서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약 5분간의 공중전이 펼쳐졌으며 결과는 북한공군의 완패였다. 3기의 야크전투기가 F-82에게 차례로 격추당했으며 나머지 2기는 도주했다. 사실 공중전만을 위한 성능에서는 야크-9쪽이 더 우세했지만 이날이 공중전이 말해주듯이 북한공군 조종사들은 공중전을 위한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시간 뒤, 드디어 북한공군의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8기가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서울을 향해 남하해왔다. 그러나 이 공격기들이 서울 상공에 이르렀을 때, 마침 철수작전을 엄호하기 위해서 한강 상공을 초계 중이던 미공군의 F-80 슈팅스타 전투기들과 마주쳤다. 북한기들이 미군의 철수작전을 방해하려한다고 판단한 미군 조종사들이 즉시 공격을 시작했으며 이내 2기의 IL-10이 명중탄을 맞고 추락했고 나머지 IL-10은 전의를 상실한 듯이 일제히 흩어지면서 북쪽으로 도주했다. 이때 F-80 조종사들은 느린 IL-10을 따라잡아 2기를 더 격추시켰으나 철수작전을 지원하는 목적이외에 적기를 북쪽으로까지 추격해서 격추시키지는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서울상공을 떠나지 않고 잔존기들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날의 북한기들은 평양의 비행장에서 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미군기들이 이렇게 신속하게 한국상공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북한공군의 IL-10을 공격하는 F-80 슈팅스타, 전투기의 엄호가 없어 손쉬운 먹이감이 되었다. ]

6월 27일 소련의 불참속에 진행된 UN의 긴급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한다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명분을 얻게된 맥아더는 FEAF의 전력을 총 동원하여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패트리지 중장은 일단 F-80, F-82와 같은 전폭기이외에 우수한 지상공격기인 B-26을 사용하여 지상공격을 수행하기로 했다.

이날 미공군 조종사들은 일본에서 출발하여 남한상공으로 날아가 지상의 목표물 중 북한군의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무차별로 공격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단, 작전 지역은 38선 이남으로 제한 되었다. 그리고 개전 3일째부터 미공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전투기가 나타날 위협은 있었지만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라 미군기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의 상공에 출현하여 그 북쪽에서 움직이는 목표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퇴각중인 국군병사들이 지친 몸을 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정신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

특히 북한군의 전차들이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었으나 전선으로 향하는 차량이나 기차, 교량 그리고 병력들도 시야에 나타나기만 하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아직 미군기들의 수가 적었지만 이런 항공공격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북한군의 손실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기들의 공격을 받은 목표물중에 피난민이 탑승한 차량이나 기차, 그리고 피난민 행렬과 같은 경우도 포함되어 있어서 민간인들의 피해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또한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공군이 상공에 나타났다고 해도 지상의 전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침공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북한군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남하할 것으로 보였다. 김포 비행장은 6월 28일 오전 북한군의 수중으로 떨어졌으며 따라서 작전이 가능한 전선에 가장 가까운 비행장은 수원 비행장뿐이었다. 

[ 북한 전투기의 기총 공격을 받고 불타고 있는 C-54 수송기 ]

침공 3일째인 6월 28일은 북한공군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날이었다. 전날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 조종사들의 싸우고자하는 전의는 높아서 이날 오후 1시경 4기의 야크-9 전투기가 수원 비행장으로 침투하여 주기하고 있던 미군기들을 공격했다. 이 공습은 거의 기습에 가깝게 진행되어 미처 준비하고 있지 못하고 지상에 주기중이던 F-82G 1기와 B-26 1기가 기총사격을 받고 대파되었다. 그리고 북한 지상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서울로 몰려오는 사이에 오후 6시경이되면서 이번에는 6기의 야크 전투기들이 다시 날아와 지상에서 철수작전을 진행중이던 C-54 수송기 2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북한 전투기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해오리라고 예상치 않았던 미공군이 잠시 상공의 엄호를 소흘하게 한 결과로서 이날의 피해로 인해서 미공군은 전투기의 엄호가 없이는 절대로 수송기를 한국 상공에 투입하지 말 것을 결정했다. 한편, 6월 28일은 미공군도 적극적으로 북한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날이어서 B-26 인베이더 공격기들이 한강상공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에게 점령된 교량이나 철도역과 같은 주요 목표물들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 격추된 북한공군의 IL-10,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하다. ]

그러나 지상의 전황이 워낙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북한공군기들의 위협이 불길할정도로 증가하면서 6월 29일부터 미공군이 무엇을 해야 할것인지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미공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는 북한공군을 빠른 시간내에 섬멸하고 동시에 북한 지상군에 대한 공중공격을 강화하여 진격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붕괴되는 전선

6월 29일 전선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FEAF의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B-26 폭격기들이 편대단위로 전선의 북한군 차량이나 보급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F-80 전폭기들도 한강 상공에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여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부터 날아와 단시간의 작전 후에 돌아가는 미군기들의 수가 적어 북한군의 진격에는 별 장애가 되지 않았다.

[ 미군기들의 폭격으로 파되된 교량 ]

아직 미군은 남한지역의 전황이 얼마나 다급하지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맥아더는 북한군의 침공 사실을 보고 받았을 때, 미군이 개입하면 이를 한강에서 충분히 저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미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군사고문단이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수원에 도착한 것은 6월 28일 밤이었으며 이들은 한국군의 지휘관들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았다. 이들로부터 북한군의 군사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며 현재의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6월 29일 오후 패트리지 대장과 함께 직접 일본을 떠나 수원으로 날아갔다. 수원 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자신이 한국땅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북한군에게 큰 충격이 될 것이라며 자신있는 표정으로 한국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 미군기들의 공습으로 한강의 교량들이 파괴되자 바지선을 이용해서 도하하고 있는 북한군 차량 ]

수원에 도착한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은 후 한국군과 미군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주재했다. 그때 수원 비행장 상공으로 폭음과 함께 4기의 야크-9 전투기들이 돌입해왔다. 마침 수원 비행장에는 맥아더를 호위하기 위해서 따라온 F-51 머스탱 4기가 발진 대기 상태로 주기하고 있었는데 미군 조종사들은 경보를 받자마자 즉시 이륙하여 야크 전투기들을 요격했다. 맥아더가 보는 앞에서 공중전이 벌어진 것이다.

미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은 야크 조종사들은 예상과 달리 도주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양측의 전투기들이 선회를 하면서 서로 후미를 잡기 위한 격렬하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은 얼마간 F-51과 접전을 벌이는 듯 하였으나 얼마안가 한 대씩 명중탄을 맞고 격추되었으며 마지막 기체도 검은 연기를 끌고 지상에 격돌했다. 북한 조종사들은 공중전을 수행할만한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된 사건이었다. (일부 기록에는 이날 공습을 감행한 기체가 IL-10이었다고 되어있음) 야크 전투기들을 격파한 F-51D 머스탱 편대가 수원 비행장에서 승리의 빅토리롤을 실시하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던 맥아더는 만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패트리지 대장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38선 이북의 모든 북한공군 비행장을 공격해서 파괴하도록 하시오."

* 한반도에 나타난 항공모함

한편 미해군도 한국해역으로 신속하게 전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오끼나와의 해군기지에는 미해군의 항모 밸리포지가 선발대로서 출항했으며 UN의 참전 결정이 내려지면서 일본근해에 있던 영국 항모 HMS 트라이엄프도 한국을 향해 닻을 올렸다. 그리고 한국 해역으로 접어든 이 두 항모는 북한공군의 근거지인 해주와 평양 비행장을 공격 목표로 설정했다.

[ 영국 해군 항모의 갑판 모습, 영국도 한국전쟁에 항모 기동부대를 파견했다. 파이어플라이 공격기가 이륙대기 중이고 갑판 바깥쪽에는 씨퓨리 전투기들이 시동을 걸고 있다. ]

7월 3일 서해안으로 북상한 HMS 트라이엄프에서 최초로 항모 작전이 시작되었다. 영국해군의 패어리 파이어플라이 공격기 12기가 슈퍼마린 씨파이어 전투기 9기의 엄호를 받으며 해주의 북한공군 비행장으로 날아갔으며 이곳까지 UN기들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 해주 비행장은 완전한 기습을 받았고 지상 시설과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지상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고 잠시후 미항모 밸리포지에서는 AD 스카이레이더 전폭기들과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미해군의 최신예 F9F 제트전투기들의 엄호하에 평양을 공습하기 위해 발진했다. 속도가 빠른 F9F 팬더 전투기들은 공격팀이 도착하기 전에 평양 비행장 상공으로 진입하여 적기들을 제압하라는 임무를 받은 상태였다. 이들이 폭음을 울리며 평양 상공에 나타나자 야크 전투기 10여기가 이들을 막기위해 긴급 발진했다. 그러나 속도에서 우세한 F9F 전투기들이 신속하게 우세를 점했으며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2기의 야크 전투기가 20mm 기관포 세례를 받고 불덩어리로 변했다. 이후 다른 야크 전투기들은 사기가 떨어진 듯이 이리저리 흩어져 도주했고 공중전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F9F 전투기들이 지상의 북한공군기들을 공격하여 3기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이닥친 F4U와 AD 스카이레이더 공격기들이 평양 비행장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날의 공습이 끝난 후 북한군은 평양 비행장의 피해가 매우 큰 것에 놀랐다. 특히 연합군의 항모들이 북한의 수도를 공습했다는 사실에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북한군은 이들 항공기가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양 비행장은 잔존기를 중심으로 다시 복구되었으나 북한공군의 상황이 매우 열악한 상태였으므로 평양 비행장은 UN군의 항공작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그나마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날의 항모 항공작전은 이후 한국해역에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미군과 영국의 항모들의 대규모 항공작전의 시작이었다. 

* 무너지는 미군

공군과 해군이 항공작전에서는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지상의 전세는 미군의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군의 스미스 파견부대가 최초로 한국전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은 북한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스미스 부대의 병사들은 2차대전을 경험한 백전노장들이 아니라 전후에 새로 양성된 젊은 병사들로서 전투 경험이 대부분 없었다. 그들은 천하무적의 미군이 나타났으니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군대 따위는 자신들을 보면 놀라서 도망갈 것이라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산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고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 (일개 중대 규모였다.)는 곧 T-34 전차를 앞세우고 돌진해오는 북한군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얼마 싸워보지도 못하고 많은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미군으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 7월 26일까지 미군이 설정한 공격 목표들, 이미 경상북도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 무차별 항공작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

그후 이번에는 신속하게 북진하여 한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대던 딘 소장 휘하의 제 24 보병사단이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24 보병사단도 너무 급히 한국으로 공수되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결정적으로 북한군의 T-34 전차부대를 물리칠만한 화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북한군이 미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 대전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에서도 미군이 상당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으며 이 혼란의 와중에 사단장 딘 소장까지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수난을 겪었다. 결국 7월 20일 미군이 방어롤 호언장담하던 대전마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이것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으로 이로인해서 북한군은 미군을 물리친 강한 군대라는 이미지를 얻게되었다고 한다. 

*제공권을 장악하라.

하지만 북한 지상군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북한 공군기들의 엄호를 거의 받고 있지 않았으므로 미군의 항공 공격에 거의 무방비였다는 것이다. 점차로 미군기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대낮에 일렬로 행군하는 북한군 부대는 미군기 1-2대의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북한군 병사들도 항공 공격에 대처하는 것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서 미군기들이 바로 머리위에 날아올 때까지도 전차나 차량을 피신시키지 않기 일쑤였다. 특히 전차병들은 미공군기들의 공격을 받더라도 전차속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들은 로켓탄이나 네이팜탄의 공격을 받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전차안에서 불에 타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미군기들의 공습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북한군의 진격속도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 대지공격을 위해 급강하중인 F-80, 이미 발사된 2발의 로켓탄 연기가 보인다. ]

7월 1일부터 한강 철교 및 수원 이북의 교량들과 북한 보급선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었고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지상에서는 북한군이 계속 밀고 내려왔지만 하늘에서는 미군이 상공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에서 선봉에 선 기체는 만능 지상공격기인 B-26 인베이더와 오끼나와에서 출동하는 B-29 중폭격기들이었다. 7월 6일에는 대구를 향해서 밀려오는 북한 지상군의 행렬을 발견한 B-26 6기가 즉시 공습을 개시해 전차 20여대와 수십여대의 트럭을 격파하고 수많은 북한병사들을 살상했다. 비록 B-26 1기가 지상포화에 맞아 격추되었으나 이날의 공습에서도 북한군은 항공공격에 거의 무기력함을 노출했다. 이에 더해서 B-29는 계속 고공으로 날아들어 북한 지상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에 대해서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 저공으로 접근중인 B-29, 오끼나와에서 출발하여 북한군 진영을 강타했다. ]

그러나 북한 공군이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야크 전투기를 사용해서 미군에게 도전적으로 대항했다. 7월 10일 4기의 야크-9 전투기가 청주 근처의 미군부대를 공습해서 피해를 입혔으며 다음날엔 7월 11일에는 지상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던 F-80 전폭기들이 야크 전투기 2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때 F-80 전폭기들은 연료가 거의 없어 공중전은 엄두도 못내고 속도를 이용하여 이탈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모든 기체가 야크기들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7월 12일에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오끼나와에서 출동한 제19 폭격기대의 B-29 폭격기 1기가 조치원 근방에서 야크-9 전투기 3기의 요격을 받아 격추된 사건이었다. 북한 공군을 얕보고 전투기의 엄호도 붙이지 않은 채 단독으로 작전하던 B-29였다고 해도 북한 전투기들에게 격추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B-26 1기가 야크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대파된 후 간신히 돌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지금까지 북한공군에는 이런 기량을 가진 조종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던 미공군 정보부에서는 소련 조종사가 탑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결국 우선적으로 북한 공군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즉시 대대적인 정찰작전이 실시되었다.

 

[ 출격 준비중인 F-80 편대, 일본에서 출발하여 한국까지 비행하기 위해서 주익 끝단에 연료탱크를 장비했다. ]

미군 정찰기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북한군이 점령한 김포 비행장에 20여기의 야크 전투기가 주기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곳에서 출동한 야크 전투기들이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맥아더는 즉시 이곳을 공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7월 15일 8기의 F-80 전폭기들이 김포 비행장을 급습해서 10여기의 야크 전투기를 파괴하였으며 지상시설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지자마자 3기의 B-29가 상공으로 날아들어 김포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머지 북한공군의 잔존세력은 평양비행장과 연포, 옹진리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항공정찰에 발각되어 7월 18일과 19일에 걸쳐서 B-29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았으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북한공군은 산발적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부분의 항공전력이 손실되었다. 결국 이런 항공작전의 성과로 북한공군은 모든 전력의 80% 이상을 상실했고 7월 중순부터는 작전에 거의 투입되지 못하게 되었다. 

[ 기차 지붕에까지 몸을 싣고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 그러나 이런 기차도 미군기들에게 발견되면 무차별로 공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미군의 항공 작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전선이 너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어서 한국내에 항공기지를 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피아 식별의 곤란으로 지상의 한국군부대나 민간인 피난행렬을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7월 3일에는 정찰기로부터 북한군 부대의 위치를 보고받은 F-51D 머스탱들이 지정 장소에 도착하여 맹렬하게 공습한 후에 기지로 돌아갔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한국군 보병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전 후 7월 15일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F-80 슈팅스타 전폭기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전선상공에서 20분 이상을 비행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서 북한군은 미군기들이 나타나면 20분 정도만 몸을 숨기면 안전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 대구 비행장의 머스탱

한편, 고전하고 있는 미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한국내에 항공기지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패트리지 대장은 참모들의 의견대로 대구 비행장에 공군기들을 파견하여 작전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 대구 비행장은 활주로의 상태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제트 전투기인 F-80은 도저히 작전할 수 없었다. 활주로의 상태가 불량해서 크고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고 비가 한번 오고 나면 온통 진창으로 변해버리기 일쑤였으며 주위에 건물이라고는 낡은 목조건물 2채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작전이 가능한 기체는 프로펠러기인 F-51 머스탱 뿐이었다.

[ 빗물로 잠긴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F-51D, 한국전쟁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지상공격기로 맹활약했다. ]

어차피 지상군의 지원에는 제트전투기들보다 F-51D가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6월 30일부터 급히 10기의 F-51과 100여명의 정비요원들이 탄약과 연료를 싣고 따라오는 수송기들과 함께 대구로 날아가 항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으로부터 K-2라고 명명된 대구 비행장이 공군기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이 F-51D 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딘 헤스 대령이었으며 그에게는 지상군의 근접지원에 더해서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교육시켜 F-51을 능숙하게 조종하도록 만들라는 또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드디어 미군이 한국군에 자체 전력을 가진 공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이 계획은 '바우트 원 (Bout one)'이라는 작전명이 붙여져 있었다. 일본의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딘 헤스 대령과 교관들은 한국공군의 조종사 10명과 함께 직접 F-51을 몰고 대구로 날아왔으며 도착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한국 조종사들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전투비행 교육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이런 필요성이외에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F-51 10기로 이루어진 자체 공군을 양성하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한국군에게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공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한국측의 요구에 대한 대안이었다. 사실 F-51은 미공군에서는 폐기되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었지만 한국 전장의 환경에서는 쓰임새가 높을 것으로 다시 재평가 되고 있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미국 본토에서는 주방위군이나 훈련부대로 넘겨졌던 F-51D 전투기들이 모아져 한국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배에 탑재되고 있었고, 실제 한국상공의 지상공격 임무에서는 F-80보다 F-51이 더 효율이 높았다.

[ 대구비행장을 날아오르는 F-51D, 기수에 신념의 조인이라는 노즈아트를 가진 딘 헤스 대령의 기체이다. ]

딘 헤스 대령은 F-51부대를 이용하여 미군 지상군의 근접지원과 한국공군의 교육을 동시에 시행하다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모든 기체를 한국측에 이양하고 독자적인 공군력을 가질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이런 계획을 반영하듯이 모든 기체의 미국적 마크가 지워지고 한국공군의 태극마크가 그려졌다. 특히 딘 헤스 대령의 기체에는 한 한국인이 고마움의 표시로 '신념의 조인 (信念의 鳥人)'이라는 노즈아트를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머스탱을 탑승하기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모인 10명의 한국 조종사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겠다는 의욕은 넘치고 있었지만 비행 경험이 부족해서 F-51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

애초에 미군의 교관 조종사들은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한국 공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로 했었지만 이런 규칙은 계속 어겨졌으며 한동안 이 F-51은 미군 교관 조종사들이 조종하여 지상지원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조종사들은 미군의 교관 조종사들과 함께 실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특히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조종사들에 대한 배려는 매우 세심해서 모든 조종사들이 실전에 참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까지 같이 비행하면서 훈련을 시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도 점점 전선이 붕괴되면서 위축되었고 대구 비행장이 북한군의 위협을 받게되자 딘 헤스 대령 휘하의 교관들과 한국공군 조종사들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전투비행 훈련을 계속 했다.

[ 머스탱의 로켓탄 공격을 받는 수송기차, 갈수록 미군기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서 북한군의 보급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

물론 이런 수련의 기간이 끝난 후에는 모든 기체가 한국공군에 넘겨졌으며 이후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한국공군은 전투기의 조종과 정비까지 모두 한국 공군이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공군부대를 이루게되고 미군의 F-51 부대가 참가하는 모든 작전에 동등하게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2년 6월 무렵에는 한국공군의 F-51부대는 강릉비행장을 모기지로 활동하는 비행단의 규모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한국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의 챕터로 구성해볼 예정입니다.) 

* 부산 방어전

7월 내내 북한군은 계속 기세 등등하게 남하하고 있었다. 대전이 함락된 후 군산, 영덕, 광주등 주요 도시들이 속속 떨어졌고 이러다가는 전국토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듯 했다.  결국 8월이 되면서 국군과 UN군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일단 모든 전력을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전열을 정비하고 이 지역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만일 여기서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면 제공권을 장악한 UN의 항공전력이 북한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줄 시간을 벌 수 있게되고 부산항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전쟁물자가 비축되면 전황의 역전까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낙동강 방어전의 근간이었다. 결국 1950년의 뜨거운 8월과 함께 낙동강 주위를 온통 피로 물들이게되는 최대 규모의 전투가 연일 계속되게 되는데 이것이 부산 방어전이다. 미군의 작전입안자들에게 있어서 낙동강 방어선은 북한군의 발목을 잡은후 모든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덫이었던 것이다.

[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된 부산 방어지구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낙동강을 거점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항공전력으로 대타격을 주겠다는 것이 부산 방어작전의 개요였다. ]

연일 계속된 항공정찰의 결과 부산을 공격하려는 북한군의 주공은 북한 제 6사단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부대는 금강을 지나 전주를 점령하고 하루에 20km가 넘는 속도로 서쪽에서부터 부산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외에 나머지 북한군 부대들도 북쪽과 동쪽에서 부산을 향해 속속 남하하고 있었다. 이미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이남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때까지는 북한군도 별 저항이 없이 부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으로 접근하면서는 북한군의 기세가 꺽이기 시작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절대 후퇴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과 UN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된데다가 UN군의 항공작전으로 인해서 북한 지상군의 피해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공권을 빼았긴 상태에서 빨리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여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은 북한군측으로서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이미 낙동강 이북의 모든 교량과 건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의 F-80, F-51, B-26 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면서 북한군의 진격루트를 파괴하면서 괴롭히고 있었으며 북한군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면서는 미군의 전폭기들에게는 상황이 더 유리해졌다. 이제는 일본에서 날아오더라도 항속거리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체공하면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곳이 정찰기에게 발견되면 상공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폭격을 퍼부었으며 이로 인해서 북한군의 인명 손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 네이팜탄이 투하된후 불길이 T-34 전차쪽으로 번지고 있다. 잠시후 아래의 사진처럼 T-34는 불길에 휩쌓이게 된다. ]

당시 미군의 전폭기들은 낙동강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공격하라는 무차별 공격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단 한 대의 차량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병력의 이동은 야간에만 가능했다. (물론 무차별 공습에는 예외가 없어서 피난민들의 희생도 상당했다고 한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싼 전투가 가열되면서 북한군은 길어진 보급선이 자꾸 차단되면서 손실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군의 T-34 전차 부대는 침공 초기의 엄청난 기세는 온데 간데 없이 미군의 항공기들로부터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하기 시작했다. 6월 25일 230여대의 T-34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던 북한군의 기갑전력은 부산 방어선까지 내려오는 동안 계속된 손실로 인해서 1/3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미공군기들의 항공공격으로 파괴 당했다. 반면 부산쪽으로 계속 밀려드는 UN군의 병력과 군수물자 보급작전으로 미군 전차들이 계속 늘어나 8월 말이 되면서는 오히려 미군의 기갑전력이 더 우세해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다급해진 북한군은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계속적인 공세를 취했다. 그리고 국군과 미군은 공세적으로 나오는 북한군의 기세를 저지하기 위해서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대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간다면 북한군이 점점 불리해 지리라는 것은 점점 분명해 지는 듯 했다.

[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돌격을 시도하다가 파괴된 T-34 전차들, 대부분은 항공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

승승장구하면서 계속 남하하다가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전진을 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힌 북한군은 점점 더 다급해졌으며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계속적인 무모할 정도의 공세를 폈으나 낙동강 방어선은 매우 견고했다. 결국 무모한 돌격을 계속하는 북한군의 손실이 계속 증가하면서 전선은 소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는 사이에 UN군의 항공기들은 계속 북한군의 머리위로 날아들면서 쉴새 없이 폭탄과 기관포를 퍼부었다. 결국 9월이 되면서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는 것으로 보였다.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위해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운은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이제 반격의 시점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구상한 대반격의 장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서해안의 항구도시 인천이었다.

* 맥아더의 대도박

[ 금천지구에서 F-80의 로켓탄 공격을 받고 주저않은 북한 전차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은 완전히 발목을 잡혔다. ]

1950년의 뜨거웠던 8월이 끝나갈 무렵, 낙동강 방어선이 안정되어가고 공산군의 도박이 점점 실패로 끝나가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맥아더는 대반격을 구상했다. 그는 부산 방어지구를 둘러싼 공산군 부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보다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원했고, 결국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행하기로 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은 뉴기니아의 섬 지역에 포진한 일본 수비대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섬을 하나씩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섬을 건너 뛰어가면서 공격해서 일본 수비대를 고립시켜 보급을 차단하고 전의를 상실시킨 후에 공격하는 '섬건너뛰기' 전법을 사용해서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뉴기니아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이때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북한군의 약점을 노려 낙동강 방어선을 건너뛰어 인천에 한번의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전세의 역전을 노렸던 것이다. 북한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부지방에는 병력도 적었고 낙동강에 포진하고 있는 주력부대는 보급선이 길어졌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제공권은 완전히 UN군에게 넘어간 상태였으므로 보급로는 거의 유지되고 있지 못했으며 전선 후방에 대해서는 제대로 통제가 되고있지 않았다.

[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가 전폭기이 공격을 받아 폭발하는 장면, 제공권이 장악된 상태에서 북한군의 사정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었다. ]

맥아더가 서해안의 항구도시 인천에 주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곳은 남한의 수도인 서울과 매우 가깝고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이어지는 지역을 단숨에 장악해 버린다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북으로부터의 보급선을 완전히 잃게되고 북과 남으로부터 포위 당해서 고립되게 될 것이다.

* 인천항

[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항공작전도, 인천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광범위한 공습을 시행하여 인천으로 공산군의 전력이 보강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

그러나 한국의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해서 썰물이 되면 해안으로부터 수km까지 바다물이 빠지는 곳이었으며 인천항은 심한 경우 4m가 넘는 수심의 변화를 보였고 해안선도 수km까지 후퇴한다. 더구나 물이 빠진 갯벌은 차량이나 병력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은 뻘로 되어 있어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상륙작전을 결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참모진의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어느 작전에나 위험요소는 있게 마련이라면서 인천에 상륙작전을 결행할 것을 명령했고 작전에 반대하던 연합 사령부도 결국에는 맥아더의 설득에 넘어갔다.

미군으로부터 크로미티 작전이라 명명된 인천 상륙작전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정찰기들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 북한군의 주요 포대가 포진중인 것으로 보이는 월미도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후에는 인천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시가로 신속하게 진입한 후 3일이내에 곧장 서울로 향해 진격하며 무엇보다 김포 비행장을 우선적으로 탈환하여 항공작전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이 달성되면 즉시 서울로 입성하여 북한군을 몰아내고 낙동강 지역에서 발이 묶인 북한군의 배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었다.

[ 인천을 향해 항진중인 항모의 갑판에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도열해 있다. 제트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콜세어는 여전히 해군항공전력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

만일 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면서 포진중인 UN군과 국군이 즉시 낙동강을 건너 배후가 끊긴 북한군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바다에서 상륙 작전을 결행하려면 밀물이 해안으로 가장 많이 밀려드는 9월 15일과 10월 11일이 최적기였다. 이때는 상륙정들이 인천의 내항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조시부터 3-4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작전은 최소한 3시간 이내에 신속하게 수행되어야 했다. 맥아더는 9월 15일을 공격 시점으로 정했고 인천 상륙작전은 완전한 기습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모든 작전은 공군과 해군의 항공기들로부터 완벽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 인천의 하늘

작전일이 9월 15일로 정해지자 미군정찰기들이 쉴새없이 서울과 인천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서울과 인천사이에 배치된 북한군의 병력 상황을 파악한 미공군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이 인천쪽으로 보강되지 못하도록 서울과 인천사이의 도로와 철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시작했다. 9월 9일부터 13일 사이에 B-29 편대가 이 지역을 연일 맹폭했으며 모든 철로나 도로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 인천으로 항진하는 함대 상공을 순찰중인 F4U 콜세어 ]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못했다. 상륙함대가 일본을 떠나 서해안으로 향해 접어들고 있을 때 늦여름의 불청객인 태풍이 찾아온 것이다. 만일 이 태풍의 위력이 약해지지 않고 한국과 일본을 향해온다면 상륙함대가 발이 묶일 것이고 이렇게 되서 날짜를 놓친다면 상륙작전 전체가 위협받을 상황이었다. 미군은 기상정보에 촉각을 기울이고 조심스럽게 상륙함대를 서해로 전진시켰다. 상륙함대의 260여척의 함선들과 7만여 병력이 태풍 하나 때문에 온통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태풍은 하루만에 세력이 약해진 상태로 남쪽으로 멀어져 갔으며 작전 결행 36시간 전에는 모든 기상상태가 평온을 되찾았다.

[ B-29로부터 폭격을 받은 공산군 숙영지, 소이탄으로 인해서 불길이 번지고 있다. 공습은 대단한 피해를 주었지만 필연적으로 민간인의 피해도 상당했다. ]

상륙부대의 엄호는 미해군의 4척의 항모 (밸리포지, 박서, 시실리, 바동 스트레이트)군에서 발진하는 미해군과 해병대의 함재기들이 맡게될 것이며 영국 항모 HMS 트라이엄프도 가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남쪽에서부터도 미공군기들이 가세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북한 공군은 이 시점에서 거의 활동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임무는 상륙부대의 안전을 위한 근접엄호였다.

* D-day

인천 근해에 포진한 상륙함대는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공격개시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새벽의 여명과 함께 공격명령이 떨어졌으며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새벽 하늘을 가르는 불덩어리들이 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면서 인천 해안으로 날아갔으며 곧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붉은 섬광과 검은 연기가 마치 인천 전체를 불태워 버리려는 듯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최우선 공격목표였던 월미도의 북한군 포대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잠들어 버렸고 미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여 별 저항도 받지않고 순조롭게 점령했다.

[ 포격을 받고 연기에 휩쌓인 월미도 ]

하늘에는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면서 인천 해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함포사격과 함재기들의 기관포 사격으로 인천에 있던 북한군은 엄폐호 밖으로 얼굴을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들은 인천으로 UN군이 상륙해 오리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면서 밀물이 절정에 달하자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한국군 해병대와 미 해병대 병력을 실은 상륙정들이 선봉에 서서 벌떼처럼 해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해안에 도달한 해병대원들은 산발적인 북한군의 저항을 쉽게 제압하고 목표로 했던 교두보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의 도박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하루에 예상보다 훨씬 적은 19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 목표는 인천! 예비 포격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인천항으로 맹렬하게 전진하는 상륙정들 ]

상륙작전이 결행된 다음날 인천시내의 북한군 잔존병력을 완전하게 소탕한 UN군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서 전진했다. 이중 김포 비행장 탈환을 목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미해병대는 북한군의 잔존 병력을 소탕하면서 순조롭게 전진하여 9월 17일 김포비행장을 근처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북한공군은 완전히 전멸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이날 김포 비행장에서 2대의 야크-9 전투기를 출격시켜 인천항의 연합군 함선을 공격하려 했으나 거센 대공포화에 걸려 1기가 순시간에 격추되었으며 나머지 1기는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것이 인천하늘에서의 북한공군이 시행한 유일한 반격이었다.

[ 교두보가 확보되자 해안으로 다가선 지원함에서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

다음날인 9월 18일 미 해병대가 김포비행장을 공격했고 북한군은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김포 비행장을 방치하고 후퇴했다. 김포 비행장을 쉽게 포기한 북한군 덕분에 비행장을 점령하려는 계획이 달성되자 미 해병대는 항공기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김포 비행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활주로는 크게 파손되지 않아서 쉽게 복구될 것으로 보였으며 비행장에는 파괴된 건물과 항공기들의 잔해가 깔려있는 가운데 북한군이 방치한 2기의 IL-10과 1기의 야크-9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미군은 이들 기체를 곧장 미본토로 보내어 테스트를 실시했다.

[ 파괴된 T-34옆으로 생포된 북한군 병사들이 끌려가고 있다. ]

 상륙작전 전에 촬영된 정찰사진에서는 김포에 더 많은 북한공군의 항공기들이 있었으나 나머지 기체들은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황급히 북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였다.

9월 19일 활주로가 복구되자 곧 미해병대의 항공기들이 김포 비행장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해병대의 F7F-3 타이거캣 전폭기들이 야간 방공임무를 맡고 일본을 출발한 후 가장 먼저 김포 비행장에 진입했고 미해병대 소속의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서울 탈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김포로 날아들었으며 김포 비행장은 곧 UN군의 항공기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김포가 수중에 떨어지자 곧장 모든 전력을 남한의 수도인 서울로 집중한 UN군은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이 저항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퇴각함에 따라서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서울도 손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

* 낙동강을 넘어서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수행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오기만을 기다리던 UN군과 국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UN군 사령부는 9월 17일을 기해서 대대적인 반격을 결행하기로 했다.

[ 공습중인 B-26, 한국전쟁에서 매우 광범이한 활약을 한 기체로서 2차대전의 쌍발 폭격기인 B-26 머로더와는 다른 기체이다. ]

그러나 하늘에 낮게 깔린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갑자기 악화된 기상으로 인해서 9월 17일로 예정된 대반격을 미루어야 했다. 그러나 인천에 UN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낙동강 전선에서 큰 손실을 입어가면서 공격해오던 북한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더구나 B-29 폭격기들은 구름위를 비행하면서 낙동강 이북의 북한군 진영에 연일 폭탄의 비를 퍼부어 대고 있어서 북한군은 와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고 있었다.

9월 18일 드디어 날씨가 맑아지면서 미공군의 F-80, F-51 전폭기들이 벌떼같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네이팜탄과 기관포탄이 퍼부어졌다. 북한군은 제자리에 바짝 업드려 공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날의 공습은 대반격의 예비단계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 낙동강 전선의 대표적인 격전지인 왜관 근처의 교량, UN군이 후퇴하면서 폭파시켜 끊어져 있다. ]

그리고 그 다음날 방어작전의 주공으로 대기하고 있던 미 제 8군 24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왜관근처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서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낙동강 전선의 모든 지역에서 국군과 UN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이때까지 공격만 알았던 북한군은 큰 충격을 받아 지리멸렬했으며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불과 한달전까지만해도 기세등등하게 남하해오던 정예군이 싸울 의지를 잃고 흩어져 도주하는 오합지졸로 돌변한 것이다.

물론 격렬한 저항을 해오는 북한군 부대도 있었지만 제공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전선을 날아다니면서 지상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관측기들로부터 북한군 저항거점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곧장 F-80, F-51, B-26과 같은 전폭기들이 날아들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곧장 지상군이 돌입하여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 낙동강 지구의 북한군 진영에 폭탄을 투하하는 B-29, 대대적인 반격의 신호탄이었다. ]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9월 21일의 전투로서 이날 북한군의 T-34 전차 30대가 미 24사단의 돌출부를 측면으로부터 공격하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공격을 위해서 시동을 걸자마자 T-6 전선통제기에게 발견되어버렸던 것이다. T-6가 사라지자마자 24 사단을 지원하고 있던 F-51 전폭기들이 날아들어 로켓탄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F-80 전폭기들도 네이팜탄을 투하하면서 T-34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결국 북한군 전차대는 전차포 한방 쏴보지 못하고 15대의 전차가 격파된 채로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너무 뿔뿔히 흩어져 북쪽으로 후퇴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한 UN군 부대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서 미군 전폭기들이 우군을 폭격하는 일이 속출했다. 결국 9월 23일 북상하던 영국군이 이들을 퇴각중인 북한군으로 오인한 미군 F-51 전폭기들의 공습을 받아 큰 피해가 발생하면서 패트리지 사령관은 이때까지 허용되던 무차별 공습을 전면적으로 중지할 것을 명령했으며 모든 공습은 반드시 확인 절차를 거친 후에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군의 전면적인 붕괴로 인한 UN군의 빠른 전진 속도를 반영하는 예이기도 했다. 이제 보급이 끊긴 상태로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협공을 받게된 북한군은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지리산과 같은 남한이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펴는 수밖에는 없었다.

 

[ 김포 근처에서 파괴된채 방치된 Il-10 슈트로모빅, 녹색의 기체에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하다. ]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된지 3달만에 전세는 드디어 역전되었으며 이제는 백두산과 압록강을 향한 국군과 UN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 내몰리는 북한군

[ 낙동강을 건넌후 38선을 넘어서... 인천 상륙작전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한 국군과 UN군의 진격루트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과 낙동강에서의 UN군의 공세로 인해서 남한으로 침공했던 북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미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이제는 낙동강을 건너 밀고 올라오는 미군과 한국군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더구나 하늘에서는 UN군의 전폭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들어 머리를 들지도 못할 정도로 맹렬하게 공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남쪽으로 치고 내려왔던 북한군의 주력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대부분 변변히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UN군의 포위망을 피해서 북으로 후퇴하거나 지리산과 같은 남한의 산악지대로 숨어야 했다. 

인천에 상륙한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고 교두보를 확고히 하는 사이에 낙동강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국군과 미군은 9월 26일 오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군과 합류하였으며 미 해병대는 F4U 콜세어 전폭기들의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9월 27일 서울의 북쪽에서 북한군의 잔존 병력을 일소하고 남한의 수도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내몰았다.

 

[ 김포비행장에서 이륙하는 F4U-5 콜세어, 야간 요격임무를 위한 레이더 유니트가 보인다. ]

이렇게 상황이 매우 좋아지면서 주일 미 제 5 공군은 효과적인 항공작전을 위해서 사령부를 남한으로 옮기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항공기와 병력을 남한으로 이동했다. 9월 25일, 대구 비행장 (K-2)이 제 5 공군의 임시 사령부가 되었으며 제트기들의 작전이 가능하도록 활주로가 빠른 속도로 보수되었다. 이후 F-80, B-26과 같은 주력 기체들이 속속 날아들면서 프로펠러기 한 대가 간신히 이착륙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보잘것 없던 대구 비행장은 대규모 군용 항공기지로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었다. 한편 포항 (K-3)에도 항공작전을 위한 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여기에는 F-51D 머스탱을 장비한 미공군의 39, 40 전투비행중대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공군의 77 전투비행중대가 속속 날아들어 동쪽에서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시작했다.

[ 김포 비행장으로 날아온 미해병대의 항공기들, A3D 스카이레이더와 F7F 타이거캣의 모습이 보인다. 활주로 주위의 가건물이 당시 김포 비행장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준다. ]

그러나 북한군이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붕괴되면서 UN군의 진격속도가 예상 밖으로 너무 빨라지자 항공지원을 위해서는 수원에도 비행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원 비행장은 전쟁 초기에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사용불능이 된 상태였으므로 미군은 즉시 공병대를 투입해서 비행장을 복구했으며 결국 10월 6일경, 파괴된 수원 비행장이 복구되었고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 35 전투폭격기중대의 F-51D 머스탱 전폭기들이 대거 북쪽으로 이동했고 수원 비행장은 미 공군의 정식 항공기지 (K-13)가 되었다. 그러나 수원 비행장이 사정은 아직 열악해서 대부분의 항공작전은 비교적 사정이 나았던 김포 비행장에서 수행되었다. 이 무렵 미군이 사용한 가장 큰 항공기지였던 김포에는 미 공군의 제 51 전투요격기 대대가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제 16, 25 전투요격중대와 제80 전투폭격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 남한 지역의 미공군 비행장들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K-1부터 k-47까지의 호출부호가 붙여져 있으며 이중 강릉(K-18)기지는 후에 한국공군의 작전기지가 된다. ]

* 전략 폭격

한편,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 폭격은 8월중순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오끼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출동하는 B-29 폭격기들은 일부는 낙동강 전선의 아군을 지원하고 나머지들은 북한으로 날아가 산업시설을 연일 맹폭했다. B-29가 침투하는 고공으로까지 올라와서 저항해오는 북한 전투기들이 없었으므로 이런 임무 수행은 매우 쉬운 것이었다. 당시 남한 지역은 주로 농업위주로 북한 지역은 공업시설 위주로 발달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공업시설들이 목표가 되었다. 북한의 제철소, 철도조차장, 유류저장소, 항만시설등이 일제히 목표물 리스트에 올랐으며 연일 B-29 폭격기들의 융단 폭격을 받았다. 결국 8월말이 되자 북한 산업시설의 90%가 지도상에서 사라져 폐허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B-29 폭격기들은 북폭을 중단하고 다시 낙동강 지역으로 몰려와 북한군을 다시 맹폭했던 것이다.

[ 북한지역으로 출격중인 B-29 편대, 낙동강에서 한창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북한의 주요 산업시설들을 맹폭했다. ]

북한전투기들의 출현이 완전히 중단되면서는 아예 목표지역을 단기로 날아가서 기회목표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B-29는 낙동강 전선 부근의 북한군 열차를 발견한후 초저공으로 추격해서 방어총좌의 기관총으로 열차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어떤 B-29 조종사들은 자전거를 타고가는 북한군 몇 명을 추격해서 폭탄을 퍼붓기도 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 전선이 돌파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낙관적으로 보이자 미공군은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5개의 B-29 폭격기전대 중에서 2개 전대를 미 본토로 귀환시키기도 했다. 나머지 B-29 전대로도 작전 수행능력은 남아도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 북진 

[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 화랑부대의 용사들 ]

한편, 북한군이 예상외로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북쪽으로 후퇴하자 UN군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이대로 북한군을 추격해서 38선을 돌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미 정부는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해 들어갈 경우 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해서 확전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나오자 잠시 결정을 망설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국을 통일하자는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고, 지금의 추세라면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을 결정하기도 전에 완전히 북한을 점령해서 한국을 통일할 자신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미 정부는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 파괴된 T-34 옆을 지나 북진하는 M4 셔면전차의 모습, 북한 기갑전력의 괴멸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

결국 9월 27일 맥아더는 UN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즉각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한국군 부대여야 하며 중국과 소련과의 국경지대로는 오직 한국군만이 전개하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설 움직임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외교경로를 통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올 경우 중국군이 이 전쟁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국군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위협에 대해서 다분히 말뿐인 위협정도로만 여기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김포 비행장에서 노획된 2기의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거의 완전한 상태로 노획되어 즉시 미본토로 공수되어 테스트를 받게 된다. ]

맥아더의 북진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대대적인 예비 폭격이 시작되었다. 정찰기들이 쉴새없이 북한 상공을 날아다녔으며 북한군 부대나 진격에 방해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물들이 발견되면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 폭격을 퍼부었고, 이후에는 F-80이나 F-51D 같은 전폭기들이 또다시 날아들어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퇴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야음을 틈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해야 했다.

[ 1950년 10월말경의 사진으로 평양 비행장에 날아든 F-51D와 눈이내린 활주로를 정비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의 모습이다. ]

10월 9일 개성이 미군이 개성에 입성했으며 1 기갑사단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한국군과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면서 김일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자신의 꿈이 속절없이 날아가 버린 것을 실감해야 했다. 더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남아있는 북한군에게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신속하게 중국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도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중국으로 도망길에 올랐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들어간 김일성은 즉시 모택동을 찾아가 북한군을 도와달라고 애원했고, 모택동이 참전을 망설이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건너갔다.

 

[ 출격대기중인 B-26 인베이더, 한국전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지상 공격기였다. ]

한편, 이때 맥아더는 또하나의 상륙작전을 계획했는데, 그 곳은 원산이었다. 맥아더는 이 지역에 다시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북한군을 또 한번 고립시키고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이 입안되고 실행되기 직전에 원산 지역에 대규모로 기뢰가 부설되어있고 해안에 지뢰밭이 매설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지상군의 진격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서 굳이 위험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말자는 의견들이 많아졌다. 결국 기뢰 제거를 위해서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으며 따라서 상륙은 전격적인 기습이라는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미 해병대가 원산이 해안으로 상륙했을 때는 이미 한국군이 원산을 점령한 뒤였던 것이다. 결국 맥아더의 또 한번의 과감한 전략은 별 소득이 없었다.

* 전쟁은 끝나는가...

이 시점에서 북한공군은 허울뿐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9월 중순까지도 가끔씩 출현해서 신경을 건드리던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은 10월이 되면서는 아예 한 대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북한공군의 잔존 세력도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10월 13일경에는 모두 압록강을 건너 중국진영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 진해 비행장에서 작전중인 F-51D, 기수의 샤크마우스가 특징적인 기체이다. 주익하면에는 지상공격용 로켓탄이 보인다. ]

10월 13일, 원산이 UN군에게 점령되었고 원산 비행장에는 미 해병대의 F4U 콜세어와 F7F 타이거캣 공격기들이 날아들어 북진을 위한 비행기지로 활용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자 북한의 수도인 평양도 점령되었다. 북한공군의 주요 비행장이던 평양 비행장은 북한공군이 황급히 퇴각하면서 활주로나 시설물에 대해서 제대로 폭파작업을 하지 않아 파손상태가 양호했다. 따라서 대부분 쉽게 F-51D와 같은 미 공군기들의 작전 기지로 변했고, 여기서 날아오른 F-51D 전폭기들은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퇴각 중인 북한군을 공격했다. 이 무렵 미 공군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조종사들에게 절대로 압록강을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는데 이것은 종종 조종사들의 비행착오나 항법 실수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몇몇 F-51D 조종사들이 압록강 이북의 중국지역으로 날아가서 공습을 가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신의주를 폭격하러 출격했던 B-29 몇대가 항법착오로 압록강 접경의 중국 안뚱의 철도역을 폭격한 일까지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은 조종사들의 과실로 드러났지만 중국군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 항모 박서에서 이륙 준비인 미해군의 F9F 팬써 전폭기, 공군에 F-80이 있었다면 해군에는 F9F가 있었다. 미해군의 항공전력을 크게 강화시켜준 기체이다. ]

한편 한국해역에 전개하는 UN군의 항공세력도 점점 강화되었다. 미해군의 항모 레이테가 한국해역으로 이동하여 항모군에 가세했고, 영국해군도 서해에서 작전중이던 트라이엄프를 지원하기위해서 신형 항모 시서스를 추가로 파견했다. 미 항모에서는 F9F 팬써를 주축으로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영국 해군도 항모 시서스에서는 신형 씨퓨리 전폭기를 대량으로 작전에 투입했는데 이 기체는 이전의 주력기체였던 씨파이어보다 훨씬 향상된 작전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영국해군의 항공작전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 영국항모 시서스에 탑재중인 파이어플라이 공격기, 뒤에는 신형함재기 씨퓨리가 보인다. 이들 기체들로 영국해군의 항공전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

10월 29일경, 드디어 선봉의 한국군 부대가 드디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으며 UN군의 항공작전도 점점 강도가 약해졌다. 이미 10일전부터 B-29 부대는 폭격 목표가 없어져버려 폭격임무를 대폭 줄인 상태로 날개를 쉬고 있었으며 다른 전폭기들도 압록강 근처에서 순찰 비행정도만 시행했다. 미군 병사들 사이에 이제 전쟁은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끝날 것이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흐르고 있었으며 한국민들도 연일 계속되는 승전보를 접하면서 이제 조국이 통일되리라는 것에 대해서 들떠있었다. 이제 통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 뒤 몰아칠 엄청난 폭풍전의 작은 고요에 불과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10월말의 날씨와 함께 한국전의 양상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국군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이무렵 중국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

[ 평양 비행장에 파괴된채로 방치된 야크-9의 조종석에서 미군 조종사가 기체를 점검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초기에 제대로만 운용되었다면 북한군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기체였으나 북한공군의 전력운용상의 미비점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개전후 2달이 지나면서는 이미 제트시대에는 한물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

* 움직이는 중국군

1950년 10월초부터 중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의 양상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했다. 38선을 돌파한 한국군을 선두로 미군이 주도하는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하자, 김일성은 재빨리 중국으로 도망갔으며 이 전쟁에 중국과 소련이 참전해 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절박하게 소련과 중국을 오가면서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였다.

[ 중국군의 참전을 호소하는 김일성,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중국과 소련을 오가면서 한국전쟁에 개입해 줄 것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

특히 중국은 자국과 국경을 맞대는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고 있었으며 이 점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대로 한국전쟁이 북한의 패배로 끝나고 이대로 통일이 되면 소련과의 접경인 두만강 지역에 미국의 최전선 교두보가 설치되어 큰 위협을 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중국은 대만으로 도주한 장개석 정부를 분쇄하고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적인 움직임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북한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사사건건 중국의 행보에 방해를 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인 이해관계뿐 아니라 2차대전의 양대 승전국으로서 세계를 양분하고 먼저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미국과 팽팽한 이념대결을 벌이던 소련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대규모 병력을 만주지역으로 이동시켜 배치한 상태였으며, 이미 10월 1일부터 만일 한국군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대가 38선을 넘어서 북진한다면 이것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로 간주할 것이며 즉시 중국군을 파견해서 저지하겠다는 내용의 외교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을 크게 얕보고 있었던 맥아더에게 가볍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군에게는 미군에게 대항할만한 항공전력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중국군의 병력이 많고 중일전쟁을 통해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항공전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지상군만으로 이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실로 무모한 것이 되리라는 것이 명백했으며 이점으로 인해서 중국군 장성들은 모택동에게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을 진언했다. 모택동도 이 의견에 영향을 받아 즉각적인 중국군의 투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즉시 소련으로 향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과 면담을 성사시킨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미군의 항공전력이 실로 막강하며 북한군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거의 다 이긴 전쟁을 미군의 군사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직 공산주의의 대부 소련군만이 미군의 막강한 항공전력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제발 북한을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 북한지역의 서해안에서 출격하는 F4U 콜세어, 전쟁이 다 끝나간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므로 중국과의 접경지역에대한 순찰 비행이 주 임무였다. ]

그러나 스탈린도 고민거리가 많았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한국을 통일시켜 소련의 목 앞에 칼날을 세우게 하는 것만은 허용 할 수가 없었지만, 소련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남한을 무력 침공했던 북한군은 UN에서 침략군으로 규정된 상태였고 소련은 공공연하게 이 전쟁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온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이 이런 북한군을 전면적으로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한다면 아무래도 명분이 없었다. 이는 UN의 결의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되면 참혹한 2차대전이 끝난 지 5년만에 새로운 세계대전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소련은 비록 독일과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아직 2차대전의 참화에서 완전히 일어선 상태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호전적인 스탈린이라도 막강한 미군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 1950년 10월, 진해 비행장에 집결한 미공군의 F-51D 머스탱, 이무렵 전쟁은 UN군의 승리고 끝나리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이었으며 이미 대부분의 지역이 UN군에게 장악되어 이 전투기들도 별로 할 일이 없었다. ]

10월초부터 소련과 중국사이에는 바쁘게 비밀 통신이 오고갔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소련군이 전면에 나서서 참전하기에는 아무래도 명분이 없어 곤란하니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북한 지역에서 미군을 몰아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이러한 제의를 받은 모택동은 소련이 마치 중국을 위성국처럼 여기는 것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즉시 비약한 장비의 중국군만으로 막강한 미군과 맞서 싸우도록 할 수는 없다면서 스탈린의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만일 소련군이 최신 제트전투기를 포함한 전쟁물자의 공급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소련 조종사들을 파견해서 상공을 책임져 준다면 중국군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중국은 이 기회에 소련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물자를 얻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처음에 이러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이에 분노한 중국이 단호하게 참전을 거부하자,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것에 동의했다.

[ 드디어 베일을 벗는 미그-15, 특징적인 원형의 동체와 강력한 37mm, 23mm 기관포가 보인다. ]

어차피 2차대전 중에 생산해놓은 전쟁물자가 남아돌고 있었으므로 중국에게 이런 재고들을 군수물자로 제공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스탈린으로서는 소련 지상군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 좋았고 현재 개발이 완료된 최신 미그 제트전투기를 실전에서 운용해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한편, 중국은 많은 병사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으나 미군을 북한지역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군부의 의견에 더해서 소련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술을 얻어낼 수 있었으므로 서로간에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스탈린의 비밀 항공작전

소련공군이 한국전쟁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었지만 1990년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일체 비밀로 규정하고 있었고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으므로 한국전쟁에 소련이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으며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베일에 가려진 상태였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역사적인 기록은 대부분 서방세계의 자료에 근거해서 기술되었으며 항공전의 양상도 미군의 활약상 위주로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후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당시의 참전 조종사들이 여러 가지 증언을 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특히 한국전쟁당시 압록강을 배경으로 벌어진 혈투의 실체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 소련내의 항공기지에서 미그-15의 비행훈련을 실시중인 소련공군 조종사들, 이들은 곧 스탈린의 비밀명령으로 한국상공에 투입되게 된다. ]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에 따르면 소련공군은 한국전쟁에 발발하자마자 이미 비상대기 상태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소련은 당시 북한군을 소련이 지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대신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2차대전후부터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최신예 미그-15 제트 전투기는 신속하게 실전부대로 인도되었으며 조종사들은 즉시 이 신형 제트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훈련에 돌입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미군의 첩보망을 피해서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요구로 소련공군이 중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자 비밀리에 중국의 항공기지로 병력과 제트기가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발대에 포함되어 중국으로 향했던 소련공군 대령 발렌틴 골루베프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밀임무에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어떤 임무인지 어디서 수행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으며 우리가 그 전쟁에 투입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최신 제트전투기 미그-15에 대한 비행훈련을 받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받은 비밀임무라는 것이 이 전투기를 테스트하는 것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우리는 일제히 소집되었으며 곧 임무가 시작될 것이라는 부대장의 연설을 들었다. 곧 나는 20여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소련공군 제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리고 열차로 갈아탔는데 이 열차에는 엄중한 경호를 받는 커다란 컨테이너가 여러 개 실려있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이동하는 열차 내에서 우리는 모든 신분증과 소지품을 당간부에게 맡겨야 했고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가족에게도 일체의 연락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이동한 후 열차에서 내려보니 그곳은 중국이었다. 다시 트럭을 타고 중국의 센양 비행장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전에 보았던 컨테이너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컨테이너가 개봉되기 시작했다. 속에는 우리가 훈련받았던 최신 전투기 미그-15가 동체와 날개가 분리된 상태로 들어있었으며 이 미그 전투기들의 동체와 주익에는 모든 국적마크와 표식이 지워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뭔가 중요한 임무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처럼 소련공군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조종사들과 제트기를 중국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종사들의 가족들에게도 그들이 조국을 위해서 중요한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라는 엽서만 전달되었다. 이무렵 중국에 도착한 미그-15 전투기들은 즉시 소련 기술자들에 의해서 현장에서 조립되었으며 대부분은 소련 조종사들이 운용했고 일부는 중국공군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미그-15의 공급은 전쟁기간동안 계속 증가되게 되는데, 이 미그-15에는 대부분 북한공군의 국적마크가 그려졌으며 중국공군에게 넘겨진 기체들은 중국의 국적 마크를 그려 넣거나 북한공군의 마크를 도색하기도 했다.  

* 폭풍전의 고요

1950년 10월 중순 북한의 전면적인 패배가 명확해지자 중국과 소련은 즉시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을 결정했다. 중국군은 10월 19일부터 은밀하게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이들은 북한지역에 들어온 후 주간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은신했으므로 UN군의 정찰기로부터 탐지되지 않았다. 이 무렵 UN군은 함경남도의 요지 함흥을 점령했으며 이로서 북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들어오자, 스탈린은 중국에 파견된 조종사들에게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이며 반드시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서 미공군을 격파하라는 친서를 내렸다. 소련 조종사들은 곧 전쟁에 투입될 시기가 임박했다는 통보를 받고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 중국내로 이동한 소련공군 정비병들이 미그-15의 출격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제 이 제트 전투기는 한국상공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를 운명이었다. ]

이 무렵까지 중국에는 소련공군의 3개 항공사단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28 , 50, 151 항공사단으로서 각각 압록강 근처의 주요 항공기지인 센양, 안산, 안뚱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후 계속 증강되는 소련 항공전력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제 소련의 비밀 무기 미그-15 제트전투기들은 출동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채로 출격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상의 중국군도 한국군과 미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 언제라도 발진할 수 있도록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 비극의 땅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들이 또다시 혈전을 벌이는 무대가 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북쪽으로부터의 불길한 기운

[ 중국군이 대거 북한으로 이동하는 사진이다. 1950년 10월 14일에 촬영된 사진으로 이로서 한국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게 된다.

한편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군 병사들은 다가올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첩보망도 뭔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압록강 근처에까지 다다른 미군 선발대가 갑작스레 나타난 적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미군 병사들은 이들이 북한군 복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때만해도 미군은 이들을 북한군의 잔존 게릴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 수색대가 적의 병사 몇 명을 생포해서 돌아왔는데 이들은 북한병사들이 아니라 중국군 병사들이었다. 이미 중국군은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미군이 발견한 중국군 병력은 이미 북한으로 진입한 중국군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미 30만에 가까운 대규모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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