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원두막

우리들의 박치기왕 김일 -하늘나라로 가다.

21c-park 2006. 10. 27. 19:59



우리들의 박치기왕 김일
-하늘나라로 가다.

 

 

 

 

1960∼7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던 `박치기 왕' 김일 씨가 26일 낮 12시17분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신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하루 전날 급격히 혈압이 낮아지면서 의식을 잃은 김씨는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심폐소생술과 혈압을 높이는 치료 등을 받았으나 끝내 숨을 거뒀으며 아들 수안(56)씨와 첫째 딸 애자(61)씨, 둘째 딸 순희(59)씨 등 친인척, 제자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지인 30여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이왕표 프로레슬링연맹 회장은 "선생님은 얼마 전만 해도 출판기념회를 열 것이라며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돼 너무 안타깝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난 1957년 역도산체육관에 입문하며 레슬링을 시작한 김씨는 1963년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당시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았던 국민적 영웅.

특히 특유의 박치기 기술로 상대를 제압할 때면 전 국민이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면서 당시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다.

고(故) 장영철, 천규덕 등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와 함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1970년대 중반 현역에서 물러난 김씨는 이후 일본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봐야 했고 이후 경기 후유증으로 지병까지 생기면서 외로운 투병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김씨의 팬이었던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1994년 1월 귀국해 10여년간 을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며 한 때 건강이 호전돼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사업 등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난해 결장 제거수술 이후 인공항문에 의지해야 했다.

최근에는 만성신부전증까지 겹쳐 신장투석을 받는 등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했고 결국 이날 세상을 떠났다.

 

 

 

 2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박치기왕’ 김일씨가 현역 시절 경기중 상대방을 박치기로 제압하고 있다.

 

 

 

 

8개월 전, 5평 남짓한 병실에 비좁게 누워 있던 한 노인은 “아니, 이럴 수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파킨슨병, 중풍으로 노쇠해진 노인 앞에 휠체어를 힘겹게 밀고 들어오는 ‘박치기왕’ 김일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자네 (장)영철이를 못 만날 것 같아서지.” 김일도 박치기 후유증으로 거대결장증·고혈압·임파부종·심부전 등 합병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한때 한 끼 식사량으로 생선 99마리를 먹었다는 김일은 130㎏이 나갔던 몸무게가 75㎏까지 줄어들었다.

그 몸을 이끌고 서울에서 김해까지 온 것이다. 1965년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고 했다는 언론 보도 이후 둘은 “저승에서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등을 지고 살아왔다. 김일보다 더 큰 손을 가졌던 장씨는 수척해진 손으로 김일을 잡으며 “꿈만 같아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 주먹 멋졌는데.” 오해와 증오는 그렇게 사라졌다.

 

 

일본서 활약하던 ‘역도산’ 보고 레슬러 꿈 키워
배고프고 힘들던 시대 국민에 위안 줬던 ‘챔피언’
경기후유증과 아내·아들 잇단 사망에 힘든 말년

김일은 병마와 싸우던 삶의 끝자락도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1960~70년대) 국민들에게 위안을 줬던 그 모습다웠다. 그는 늘 호랑이에 삿갓,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었다. 그 가운을 벗어던진 순간 가운의 호랑이는 김일의 몸으로 들어간 듯했다.


상대가 의자로 내려쳐 머리에서 피가 나올 때 관중들과 텔레비전 앞에 모인 국민들은 “박치기, 박치기”를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자신의 머리로 상대를 내려찍었다. 그러면 승부를 끝내는 종소리가 ‘땡땡땡’ 울렸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방과 만홧가게에는 ‘오늘 김일 레슬링’이란 간판이 나붙었고, “텔레비전을 보러 오라”는 동네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의 높은 인기를 이용해 김일을 사칭하고 다니는 사기꾼들이 나와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였다.

1929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서 태어난 김일은 180㎝의 큰 키와 몸집을 이용해 마을 씨름대회를 휘어잡았다. 그러던 중 한 잡지에서 일본에서 활약하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레슬링의 꿈을 품었다. 김일은 밀항을 해 일본에 들어가려다 붙잡혀 1년간 감옥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역도산에게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김일씨는 지난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때늦은 은퇴식을 가졌다.


 
지난 9월에는 휠체어를 탄 채 잠실야구장에서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시구를 했다. 한국일보 제공, 연합뉴스

 

 

결국 역도산은 보증을 서 김일을 형무소에서 빼낸 뒤 57년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박치기 기술을 연마한 김일은 극동 헤비급 챔피언(65년),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66년), 제23대 세계헤비급 챔피언(67년) 등을 거치며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국민에게 힘을 줬던 그 박치기가 김일의 말년을 힘들게 했다.

경기 후유증으로 87년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렸고, 아내를 백혈병으로, 막내아들을 군대에서의 불의의 사고로 먼저 하늘로 보냈다. 김일은 지난 94년부터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을지병원 특실 4108호에서 무료 치료를 받았고, 투병 중에도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위해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1960~70년대 ‘우리들의 영웅’은 자신의 집이었던 병원에서 만성신부전증과 심장혈관 이상으로 말미암은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10월26일 낮 12시17분. 김일이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일과 같은 날 생을 마감했다.

향년 78. 한국에 온 뒤 그의 곁을 지킨 부인 역할을 한 이인순(59)씨와 아들 수안(56)씨와 맏딸 애자(61)씨, 둘째딸 순희(59)씨, 김일 도장의 1기생이었던 이왕표씨 등 후배들이 마지막 길을 같이했다. 이왕표씨는 “지난 일요일에도 후배 결혼식에 다녀오셨고, 12월에는 자서전 출판 기념회도 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래도 돌아가실 때 편안한 모습이었다”며 대선배를 애도했다. 병원 쪽은 “일반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오늘 새벽쯤에 숨을 거두기 마련인데 김씨는 체력이 워낙 좋았고 저항력이 뛰어나서인지 잘 견딘 끝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링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적이 없던 그 옛날처럼 마지막도 ‘박치기왕 김일’다웠다.

이날 빈소에는 당대 유일한 맞수였던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를 비롯해 정부와 체육계, 기업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잇따랐다.

 

 


고 김일 선생과 역도산 26일 ‘박치기왕’ 김일 선생이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김일 선생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지난 60년대 프로레슬링 경기 지난 1960~70년대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던 ‘박치기왕‘ 김일씨가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로레슬링 경기의 한 장면.2006.10.26 (서울=연합뉴스)

 

 

[김남훈 칼럼] 프로레슬링, 박치기, 김일

 

 

 

 

 

 



“형. 김일 선생님이 위독하시대요.”


격투기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밤샘근무의 여파가 있어 노트북의 모니터를 열자 뿌옇게 포털사이트의 뉴스화면이 들어오고,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박치기왕 김일 위독.” 굵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처럼, 굵은 글씨체로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관련 기사.


내가 그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내가 아직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갖기 이전이었다. 송탄 미군부대앞 철길에서 뛰어놀던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복면을 쓴 레슬러들이 포니픽업에 탄 채 ‘지옥의 혈전’을 홍보하며 다니고 있었던 것. 프로야구의 인기와 레슬링은 쇼라는 인식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른 마지못한, 궁여지책의 프로모션이었다. 그 때 동네 여기저기에 붙은 포스터의 정중앙에 ‘박치기 왕 김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동네에서 옷장사를 하던 우리집에도 공짜표가 들어왔으나,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경기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동네어귀 전봇대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용차가 한 대가 서더니, 창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버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어제 우리집에 흘러왔던 프로레슬링의 티켓이었다. 흥행이 실패하자 남은 표를 길에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 승용차 뒷편의 좌석에 묘한 살기가 도는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벗겨진 머리, 상기된 얼굴, 앉아 있어도 차 안에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풍채. 바로 김일이었다. 그 때의 경험은 매우 특이했다. 아니 김일에 대한 나의 느낌은 항상 특이했고 변화했다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어귀에서의 만남 후 미국의 WWF 프로레슬링을 AFKN으로 보면서 레슬러의 꿈을 갖게 되고, 직접 링에 오르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거대한 부의 제국을 만들었다(정동 MBC건물도 그의 소유였다). 스승 역도산이 그러했듯 사람을 휘어잡고 인기를 만들어내고, 카메라의 앵글을 자신에게 맞추는 방법을 알았으며, 링에서는 사생결단의 경기,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를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시멘트’ 경기로 상대선수를 ‘때려잡았다’.



감히 그와 같이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쟁이 막 끝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그 어느 것도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밀항자의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역도산과는 다르게 조선인이라는 타이틀을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게는 오직 근성과 실력만이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스승 역도산도 어찌된 일인지 명명백백한 조선인이 분명한 그를 옆에 두고 자신의 보디가드처럼 대동했다. 역도산은 제자를 포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발로 밟고 재떨이로 이마를 내려치는 폭한이었다. 다른 일본인 제자들 중 안토니오 이노키 외에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는 점이 그 점을 증명한다.


김일과 역도산은 평소에 단 한번도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딱 한번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한 말이 있다. “그거 있잖아. 그거 봄에 나는 거.” “뭐 말입니까? 관장님. “(일본어로) “아, 도라지! 응, 그래. 도라지! 그거 지금 비벼 먹으면 맛있지 않나?” (한국어로) “네, 그렇습니다. 지금 비벼먹으면 맛있지요.”(한국어로) 가끔 이처럼 아득한 전설속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잠깐씩 들어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박치기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주었고, 그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거세게 상대를 찍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복불가능한 신체적 위험을 가져왔다. 박치기는 그의 생존의 수단이었고, 그의 생명을 지워내는 야속한 지우개였던 것이다.




김일은 한국에서는 절대선의 베이비페이스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호랑이와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링에 올라가 ‘악당 조선인’의 역할을 했다. 기자들 앞에서 일본선수의 얼굴이 그려진 베개에 깔을 꽂아댔다. 자신에게 돌이 날아올수록, 일본관중들이 침을 뱉을수록 자신의 파이트머니가 올라가고, 그 돈으로 일본선수를 한국에 불러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던 매우 영리한 야수였다.


184cm 의 키에 120kg을 육박했던 탈아시아급의 슈퍼코리안 김일. 역도산의 냉혹하고 잔인한 살기를 갖게하는 지옥훈련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같은 걸출한 라이벌들과의 경쟁, 그리고 조선인의 신분으로서 쏟아지는 차별을 당연히 감수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자신으로의 관심으로 만들어 링을 피바다로 만들곤 했던 김일. 오키 킨타로.


프로레슬링이란 허명의 격투기를 진실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람. 몰려드는 관중으로 장충체육관의 쇠철문이 여러번 휘어지게 만든 사람.


자신의 육체를 생업의 도구로,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사람. 제자들의 경기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결코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관전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패배의 황망함에 라커룸으로 힘들게 걸어가던 나에게 살살 조심해서 안다치게 하라고 손을 어루만져주던 사람.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와 투지, 육체, 그리고 야수성으로 링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사람.


그와 같이 세상의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간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진심으로 아쉽다.



프로레슬러, IT저술가, 격투기 칼럼니스트


김일(오키 킨타로)
1958년 가난을 등지고 역도산의 이름 단 석자만 외운 채 일본으로 밀항. 이후 체포. 역도산이 보증인이 되어 일본프로레슬링과 입문. 자이언트 바바 ,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세날개 까마귀’라는 별칭을 얻는다.


1963년 미국원정에서 WWA 챔피언벨트를 따냄으로서 챔피언의 자리에. 그러나 스승 역도산이 세상을 뜨자 귀국해 대한프로레슬링을 설립, 에이스로 군림한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인기를 누리나, 안토니오 이노키 및 자이언트 바바같은 일본 토종에이스들의 인기와 국내에서 자생된 프로레슬링 단체와의 불협화음으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982년 아수라 하라 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목부상이 심해져 은퇴를 하게 된다.


국내 올드팬에게는 박치기만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스파링(아마추어레슬링, 캐치레슬링)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키락, 암바, 힐락 등 다채로운 관절기를 구사하는 레슬러였다. 한 때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윌리엄 루스카의 이종격투기설도 프로모터들 사이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만약 이 경기가 30년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면, 한국의 격투기는 지금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획득타이틀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
극동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태크팀 챔피언 외 다수


제공 - <@싸이뉴스 psygram.net>

 

 

 

 

 

 

세월을  이겨낼자 그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