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세계적으로 한물간 2선급 전투기로 평가되지만 최소한 한국공군에서 만큼은 제2의 주력으로서 현재까지도 영공방위의 최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F-5전투기는 한국공군이 최초로 보유한 초음속 전투기로써 이후 도입된 F-4전투기와 함께 한국공군 최초로 하이-로우 믹스개념으로 운용되었으며 한국오군의 황금기라 불리는 1970년대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전투기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공군의 F-5도입과 개량, 그리고 국내면허생산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관심과는 달리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번기회를 통해 한국공군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F-5의 활약과 영광, 그리고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야사를 통해서 한국공군 근대사의 한 단면을 알아보도록 하자.
1. 한국공군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F-5A
-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F-5A의 도입
마하 2.27의 F-4와 마하 2.1의 MiG-21로 대표되는 초음속 전투기들은 본격적으로 "마하 2의 시대"를 열었으며 이에따라 동서 양측 역시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마하 2 이상의 최신예 전투기로 빠르게 전력을 교체해 나갔다. 그러나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원조하에 북한공군이 MiG-21을 실전배치하여 이를 전력화 하는 동안에도 제1세대 제트전투기인(요새에는 클래식취급을 받는) F-86으로 무장한 한국공군은 T-33A나 RF-86과 같은 미공군의 퇴역기체를 인수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북괴가 최신예 MiG-21과 MiG-19로 전력을 정예화 함에 따라 남북한 공군력의 격차는 더욱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한국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86F만으로 북한공군의 MiG-19와 MiG-21에 대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신형 전투기 도입의 필요성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당시 한국공군을 위협하던 MiG-21
당시 한국공군은 F-4의 도입을 원하고 있었으나 유럽 및 이스라엘, 일본과 같은 수평적 관계의 동맹국이 아닌 수직적 관계의 동맹국이었던 한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단호했고 표면상 최신예 전투기의 운용 및 유지능력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F-4의 도입은 보류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집요하고 끈질긴(?) 요구과 북한의 공군력이 빠른 속도로 현대화 되는 상황을 좌시할 수 만 없었던 미국은 결국 제3세계 우방국을 위한, '보급형 초음속 전투기'로 평가되는 F-5A 20대를 1965년 4월 30일. 한국공군에 인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마지못해 인도한 F-5도 한국공군에게 있어서는 '아음속' 의 시대에서 '초음속'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한 최신예 전투기였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명실상부 주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F-5, 사진은 제공호
이후 F-5A는 1969년 한구공군에 F-4D가 도입되기 전까지 명실상부한 한국공군의 주력전투기로 활약했으며 F-4D의 도입이후에도 경쾌한 기동성을 통한 근접 공중전 전용 전투기로 운용된다.
- F-5A 그 절반의 성공
한국공군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이며 초음속 전투기 시대를 열은 기체로 기록되는 F-5A는 F-4D 도입전까지 명실상부한 한구공군의 주력전투기로 활약하였으며 전 공군장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경전투기로서 현재도 일부기체가 제1선기로 활약하고 있는 역전의 노병이다. 대한민국공군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기체로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이기도한 F-5A는 도입 초기 전투기를 한번 만지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줄을서야되고, 복좌형 F-5B는 조종사 훈련을 위한 비행횟수 보다도 높으신 어른들(?)을 위한 동승시범비행 횟수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실전배치 이후의 인기는 지금의 KF-16 못지 않았다고한다. 특히 경량급 기체를 바탕으로 한 경쾌한 기동성능, 그리고 초음속 비행성능은 F-86에 익숙해있던 한국공군으로서는 일찍이 경험한 예가 없는 일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전 공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F-5A도 실전배치 및 운용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먼저 가장 큰 문제점은 미공군에서 운용하고 있지 않은 전투기이지 때문에 미공군과의 합동작전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유사시 미군의 군사원조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F-5의 모체가 되었던 T-38
사실 F-5A는 T-38고등훈련기를 모체로 하여 탄생한 1인승 전투기로 미국의 우방국 원조계획에 따라 개발되었으나 매우 우수한 가격대 성능비를 자랑한 걸작 전투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미공군에서는 공식적으로 단 한대의 F-5도 운용되지 않았고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당시 거의 모든 군수지원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야만 했던 한국공군으로서도 F-5A의 운용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T-38고등훈련기를 모체로 하여 전투기로 개량된 만큼 화기관제 시스템의 성능이 간략했기 때문에 무장 및 화기관제시스템 성능이 미비하였고 처음부터 제3세계 국가를 위한 수출전용 기체였던 만큼 무장 탑재능력도 한국공군의 작전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 시키지 못했다. 이밖에도 고공에서의 조정성이 불량하고 최고속도가 마하 1.2~1.3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대적으로 북한의 전투기보다 속도가 느려서 북괴의 MiG-21을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F-5A로는 북한의 MiG-21 뿐만 아니라 MiG-19조차도 대적할 수 없다는 비평이 공군내부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영원한 자유의 투사 F-5A Freedom Fighter
이뿐만 아니라 조금 자질구레한 문제들로는 겨울철에 온도차에 의한 항공기 엔진의 터빈 블래이드 균열현상 발생이 빈번하고 약간의 이물질 및 충격에도 FOD와 IOD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결국 F-5A는 F-4의 도입 전까지 공군전력의 공백(?)의 메운 과도기적 기체로 평가 할 수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일부기체는 고등훈련기로 용도전환되어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공군의 F-5A는 지속적인 개량을 통하여 현재 일부기체는 F-5E급의 성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F-4의 보조 전력으로서 대지상 근접 지원 및 근접 공중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더욱이 F-5A는 공군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기체로서 그 역사적 의미는 절대 간과할 수 없으나 이미 성능상의 한계로 인하여 현재에는 제2선급 기체로 평가받고 있으며 점차도태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2005년 이전에 모든 기체가 퇴역할 예정이다. |
2. 제2의 주력. F-5E/F와 KF-5E/F '제공호'
- 베트남전 때문에 교환된 18대의 F-4D와 36대의 F-5A
1969년에 베트남전 파병을 대가로 한국공군은 꿈에도 그리던 F-4D 16대를 실전배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력으로서 운요되기는 그 숫자가 너무나 부족했고 한국공군은 F-4D의 추가적인 도입을 추진하게 되지만 한국공군의 야심찬 계획은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와 국내사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러던 중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 위해 월맹과의 평화협정에 서명을 하게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월남정부는 미국에 대해 철군 조건으로 월남군의 완전한 재무장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월남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져 월남주둔 미국이 철수하면서 보유하고있던 거의 대부분의 장비를 월남군에게 인계하게 되고 미공군도 월남공군의 전력강화를 위해 F-5 전투기를 공급해 주기로 했으나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미공군이 보유하지 않은 F-5를 어디서 확보해서 월남공군에 공급한단 말인가?
 당대 최고의 전투폭격기였던 F-4D를 손에 넣은 한국공군!!!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우방국들에 무상 원조된 전투기들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한구공군의 F-5전투기 36대를 월남공군에 공급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통지(!)한다. 그러나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옥만호 장군은 북한의 대남도발의지가 확고한 상황에서 한구공군의 전력을 반감시키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면서 이에대한 결사반대의지를 확고히 했고 오히려 맞교환 조건으로 미공군의 F-4D를 요구하게 된다. 엄밀히 따진다면 한국공군이 운용중인 F-5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군용기들은 모두 미공군의 재산이었으나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던 미국은 결국 이에 대한 절충안을 받아들여 한국공군의 F-5A 36대와 미공군의 F-4D 18대를 서로 교환하게 된다. 이로서 한국공군은 단시간 내에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정예화된 공군력을 구성하게 된다.
- F-5E/F 도입과 '제공호'
이미 F-5계열의 전투기를 운용하던 대두분의 국가에서도 F-5E/F는 2선급으로 분류되어 퇴역하거나 F-16이나 F/A-18등의 신형전투기로 교체되고 있고, 한국공군에서 역시 전력지수를 위한 예비전력으로서 점차 일선에서 퇴역하고 있는 F-5A/B와는 달리 한국공군의 F-5E/F와 KF-5E/F 이른바 '제공호'의 위치는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한국공군의 F-5E/F와 제공호는 제2의 주력 전투기로서 활약하고 있으며 전력지수 상으로는 당당히 주력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74년 11월 11일 부터 순차적으로 도입된 F-5E/F는 제13대 공군참모총장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1970년대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여 한때는 한국공군력의 중심이자 핵심전력으로서 활약했으며, 1982년 부터 양산된 제공호는 사실상 F-5의 최후기 생산형으로서 기존의 F-5E/F에 비하여 월등히 뛰어난 작전 능력과 성능을 자랑한다.
한국공군이 보유한 F-5E/F 및 KF-5E/F '제공호'는 근접항공지원(CAS) 및 전장항공차단 (BAI)작전의 핵심전력이며 유사시 북괴 기갑군단의 남하를 공중에서 지지하고 아군의 지상작전을 공중에서 엄호하는 한미연합사의 '합동대전차공격'작전의 주력이다. 또한 경쾌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공군의 전투기와의 근접전투를 담당하며, 특히 최후기 생산형으로 분류되는 제공호는 개량된 레이더를 탑재하여 기존의 F-5E/F 보다 2배이상 큰 레이더 탐색거리를 자랑하며 신형 RWR장비 및 무장/항법장치의 장착으로 평상시에는 휴전선 인근의 초계비행에 투입되기도 한다.
 F-5 Tiger ll중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것이 바로 제공호이다.
3. 참모총장이 바뀌면 정책도 바뀐다?
원래 한국공군은 F-4를 주력 전투기로 하여 전력을 강화시키고 1980년대초에는 최신의 F-16전투기를 국내면허생산하여 공군력을 정예화 시킨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계획도 제12대 참모총장인 옥만호 장군이 퇴역하고 1974년 8월 1일 주영복 장군이 제13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원대한 공군의 전력증강계획은 갑자기 180도로 급선회를 하게 된다. 주영복 장군의 취임직후인 1974년 11월 11일. 계획에도 없던 F-5E/F 30대가 바로 도입되었으며 1975년에는 F-5E/F 110대와 F-5A/B 22대를 일시에 발주해버린 것이 바로 그것으로 이후 주영복 장군이 1979년 4월 18일 퇴역하기 전까지 F-5는 총 146대가 도입되었고 이와는 반대로 F-4의 전력증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전 고인이 되신 故 주영복 장군
결과적으로 볼때 한국공군은 1970년대 이후 최근까지 F-4D/E 전투기를 주력기로 운용하게 되지만 F-4D/E의 전투기 세력이 주력 전력화 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한국공군의 전력증강은 오히려 10년 정도 후퇴하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이때 이후로 전투기를 선호하는 각각의 조종사들 사이에 일종의 파벌이 형성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참모총장 교체마다 참모총장의 취향대로 주력기종이 변화하고 전력증강 정책이 변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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